79화
“……그냥 미리 보고하는 건 없는 겁니까.”
빈센트가 중얼거렸지만, 체사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다시 서류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아, 찾았다.”
서류의 홍수 사이에서 서류 한 뭉치를 들어 올린 체사가 그것을 빈센트에게 내밀었다.
“자요. 곧바로 대공령에 있는 기술자들과 연구자들에게 주는 것 맞죠? 인쇄술에 관한 거라면 시대나 장소 가리지 않고 가능한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수집해서 정리했으니까 도움이 많이 될 거예요.”
“……네, 확실히 도움이 될 것 같군요.”
서류의 앞부분을 빠르게 훑어서 확인한 빈센트가 중얼거렸다.
이렇게 일을 확실하고 깔끔하게 하는 사람이 왜 소공작이 방문했다는 것은 먼저 보고를 올리지 않은 걸까.
빈센트의 이런 의문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처럼, 체사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제수씨가 요청하신 정보잖아요.”
* * *
오늘, 슈리스 에시타 자작이 주선해 준 화가 스레인이 방문했다.
허리까지 오는 옅은 금발을 어깨쯤에서 묶은 스레인은 밝은 연두색 눈동자를 가진 50대쯤의 여자였는데, 현재 에시타 자작저에 빈객으로 머물고 있는 그녀는 에시타 자작의 보좌관인 필립과 함께 방문했다.
“화가 스레인이 드레인 공국의 대공비 전하를 뵙습니다.”
궁정 화가로 일한 경력 덕분인지, 스레인은 대공저에 왔어도 떨지 않고 완벽한 예법으로 인사를 했다. 예법도 제나 왕국의 예법이 아닌 이렌텔 제국의 예법인 것을 보니, 이곳의 예법을 완벽히 숙지한 모양이고.
“네, 안녕하세요, 스레인 화백. 기다리고 있었어요.”
“말씀은 부디 낮춰 주십시오, 비전하.”
나의 존대에도 스레인은 당황하지 않고 정중히 요청했다. 나는 방긋 웃으며 알았다고 답했다.
딱딱했던 분위기는 이어진 간단한 한담으로 부드럽게 변했다. 스레인의 얼굴이 한층 자연스럽게 풀렸을 무렵, 나는 일부러 내온 셀루리아의 흑차를 한 모금 마신 다음 들뜬 어조로 입을 열었다.
“오늘은 내가 스레인 화백의 명작인 ‘위대한 타할린 호의 마지막을 배웅하며’를 갖게 되는 날이잖아. 실은, 나 너무 설레서 잠도 제대로 못 잤어.”
“과찬이십니다.”
짐짓 얼굴을 붉힌 스레인이 슬쩍 고개를 숙였다.
나는 기대하는 얼굴로 두 손을 맞잡았다.
“나, 지금 그 그림을 볼 수 있을까?”
내 질문에, 잠시 머뭇거리던 스레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레인의 옆에 시립해 있던 필립이 눈짓하자 하인들이 가져온 커다란 캔버스를 응접실 안으로 옮겼다. 마지막으로 하인이 그림을 보호하기 위해 덮은 암막 휘장을 벗긴 뒤 물러나자, 그토록 유명한 그림의 원본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와…….”
그림을 보는 안목이 전혀 없는 나조차도 멍한 탄성을 내뱉게 할 만큼, 그 그림은 굉장했다.
오묘하게 타할린 호로 시선을 집중시키는 명암, 크고 아름다운 함선이 작고 볼품없는 배에 끌려가는 것에서 느껴지는 쓸쓸함과 비탄, 그 주위를 가득 메우는 노을이 비치는 바다의 따스한 일렁임.
‘그림 전체를 보석 안료로 그렸다고 했던가?’
정말로, 돈을 처바른 보람이 느껴지는 그림이었다.
“너무, 너무 예뻐. 정말 아름다운 그림이야. 사기를 정말 잘한 것 같아.”
왜 귀족이나 부자들이 사치를 할 때 그림을 사들이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포카를 시켜 대금에 해당하는 어음을 필립에게 건네고 나서도 얼마간 더 홀린 듯이 그림을 바라보다가, 이내 정신을 차렸다.
“아…… 그림이 너무 예뻐서 쳐다보다가 그만…… 손님을 가만히 내버려 두고 있었네.”
“아, 아닙니다, 비전하.”
지금까지 계속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던 스레인이 귓가를 살짝 붉히면서 시선을 피했다.
그 모습이 상당히 의외였던지라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모국이 제 그림을 팔자 그림만을 가지고 모국을 떠났다고 해서 그림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줄 알았더니, 의외로 칭찬에 약하네.’
칭찬 같은 건 질리도록 들어서 당연하게 여길 줄 알았는데 말이지.
대금의 액수를 확인한 필립이 편히 대화를 나누라는 의미에서 자작가의 하인들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문이 완전히 닫히고 나서, 나는 부끄러워하면서도 뿌듯해하는 스레인을 빤히 바라보다가 질문을 던졌다.
“스레인은, 본인의 그림을 사랑해?”
“자신의 그림을 사랑하지 않는 화가도 있습니까?”
스레인이 오히려 의아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했다.
그 순수한 반응에서 진심을 읽어 낸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혀서 대답하지 못했다.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방금 내 질문은 상당히 웃기다 못해 어이가 없는 질문이었다. 창작하는 사람이 자신의 창작물을 어떻게 돈줄로만 보겠어.
‘……저렇게 자신의 그림을 사랑하는 사람의 작품을 일언반구도 없이 정치질하는 데 사용하려고 했었다니.’
나 꽤 쓰레기였잖아?
요 2여 년간 복수에 골몰해서 주위의 모든 것을 어떻게 이용하면 좋을지로만 생각하다 보니 인간성이 점점 결여되어 가는 느낌이었다. 왠지 한숨이 흘러나오려 해서 나는 애써 한숨을 삼켰다.
아무런 말도 없이 그림을 정치적 목적으로 사용하는 건 진짜로 실례겠지. 짧은 고민을 마친 나는 태연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타할린 호가 정말로 많은 해적들에게서 왕국민들을 지켰다지?”
“네, 그렇습니다.”
“그토록 위대한 영웅의 말로가 이토록 보잘것없다니, 사람들은 생각이나 했을까.”
달칵, 나는 찻잔을 놓으며 다시 그림으로 시선을 미끄러뜨렸다.
그림을 가만히 응시하며, 나는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본디 영광이란 영원할 수 없는 법이지. 기존의 영웅이 가야 새로운 영웅이 탄생할 수 있는 게 아니겠어?”
“……!”
문득, 찻잔을 들고 있던 스레인의 손이 움찔거렸다.
찻물이 잔잔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림에서 시선을 거둔 나는 황급히 찻잔을 아래로 내려놓는 스레인에게로 시선을 맞췄다.
“다들 해가 질 때만 노을이 생긴다고 알고 있지만, 실은 해가 뜰 때도 노을이 생기거든. 내가 보기엔 이 그림의 노을은 해가 뜨는 것처럼 보이는데.”
“…….”
“예전 영웅의 말로를 지켜보면서 새로 떠오르는 태양이라니, 멋지지 않아?”
“…….”
스레인은 입을 꾹 다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희게 질린 그녀에게 다시금 생긋 웃어 보이며 차를 마셨다.
방금, 나는 스레인에게 당신의 그림을 정치적으로, 그것도 공격적인 방향으로 사용할 예정임을 미리 알려 주었다.
그것이, 본인의 그림을 사랑하는 자에게, 내 음악을 사랑하는 내가 내보일 수 있는 단 하나의 기만이자 예의였으니까.
‘되도록 후자로 받아들였으면 좋겠지만.’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는, 본인의 선택에 달렸겠지.
물론, 스레인은 오늘 이곳에서 보고 들은 모든 것을 함구해야만 할 것이다.
만약 대공비가 그림의 해석을 불경하게 했다는 것을 밖으로 퍼뜨린다면, 당장의 화는 피할 수 있을지 몰라도 결국에는 국제적으로 유명한 그림에 얽힌 불충한 구설수를 용납하지 못한 황가가 그림은 물론 그림의 화가인 스레인까지 제거하려 들 것이기 때문이다.
궁중 화가로서 궁의 생리에 잔뼈가 굵은 화가가 이를 모를 리 없었다. 더구나 스레인은 오늘 나의 개인적인 의뢰까지 받기로 하지 않았는가.
그러니 스레인은 본인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서라도 함부로 입을 열 수 없었다. 스레인이 이를 말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나는 차라리 스레인에 대한 예의를 저버리고 내 안전을 도모하는 것을 택했을 것이다.
내 안전은 곧 세이룬을 비롯한 대공가의 안전과도 직결되어 있으니까.
“음, 그럼 이제 이전에 말했던 의뢰를 하도록 할까?”
일부러 대접한 셀루리아의 흑차는 아무런 소용도 없게 됐네.
스레인 몫의 흑차를 흘끗한 나는 아직도 나와 제대로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는 스레인에게 다시금 생긋 웃어 보였다.
“그리 떨 것 없어. 결코 네게 피해가 갈 일은 없을 테니까.”
“…….”
“진심이니 믿어 줬으면 좋겠는데.”
나는 속상한 것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레비나에게 손짓했다.
내 손짓을 읽은 레비나가 미리 갖고 있던 중앙 기사단에 대한 간략한 정보가 담긴 종이를 스레인 앞에 내려놓았다.
“내가 집단 초상화를 의뢰하고 싶다고 했었지? 본 공국 중앙 기사단의 집단 초상화를 그려 주었으면 좋겠어. 내가 미술에 조예가 깊지 않아서 세부적으로 의뢰하진 못하지만 최선을 다해 주기를 바라. 안료나 작업할 공간, 캔버스처럼 그림에 필요한 게 있다면 뭐든 요청해도 좋고.”
내내 죽어 있던 스레인의 연녹색 눈이 내 마지막 말을 듣는 순간 반짝거렸다.
“……뭐든지, 가능합니까?”
“응, 그림을 그리는 데 필요한 거라면 뭐든.”
내 제안에 순간적으로 혹한 스레인이 몽롱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가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잠시 고민하듯 침묵하던 그녀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구상을 다양하게 시도해 보고 싶습니다. 습작을 여러 개 해야 할 것 같은데, 그에 따른 필요분 역시 요청해도 됩니까?”
“그럼, 물론이지. 작품 질의 향상을 위한 거라면 뭐든 해도 좋아. 그런데 이외의 6개 기사단도 모두 의뢰를 맡길 거라는 점도 참고해 줬으면 해.”
물론 체력과 시간을 걱정해서 하는 말이니 상관없다면 흘려들어도 좋아. 내가 덧붙이자, 결국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활짝 웃음 짓던 스레인이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표정을 갈무리했다.
큼큼, 하고 헛기침을 한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비전하. 의뢰작을 시작하기에 앞서, 우선 그림을 그리는 데 전념할 수 있는 공간과 안전을 확보해 주십시오.”
“그건 당연하지. 음, 대공저에 손님방이 많이 있는데 그중에서 원하는 곳을 골라 쓰도록 해. 하인을 하나 붙여 줄 테니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하고.”
대공저의 손님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것은, 곧 드레인 대공가의 이름으로 지켜 주겠다는 것과 같았다. 군력 1인자 가문의 보호를 받게 된 스레인이 그제야 조금 안도한 듯 웃었다.
그때였다.
“부인님, 안에 계신가요?”
가벼운 노크 소리와 함께 문밖에서 세이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세이룬이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나는 의아한 얼굴로 응접실 문을 바라봤다.
원래도 오전은 업무 시간이라 바빴지만, 특히나 오늘은 오후에 킬리언과 바네사를 보기로 해서 오후 업무까지 미리 처리하느라 더 바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