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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박데기 영애의 반격을 조심하세요 (78)화 (78/139)

78화

* * *

천성을 내향적인 성격으로 타고난 나는 친화력이 좋지 못했다.

그래서 처음 이곳에 올 때까지만 해도 아이들과 친해질 수 있을지 상당히 걱정했었는데, ‘눈사람 공주님’이라는 칭호에는 아이들의 호감도 얻을 수 있는 버프가 내장되어 있었는지 나는 나름 아이들과 잘 어울려 놀고 있는 중이었다.

노래를 불러 달라는 아이들에게 한국에서 배웠던 동요를 불러 주고 있는데, 옆에서 친구들과 귓속말로 속닥거리던 빨간 머리 세스가 돌연 반짝 고개를 들고 내게 물었다.

“눈사람 공주님, 공주님은 혹시 ‘그 말’ 알아?”

아이의 물음에, 나는 노래를 멈추고 세스를 돌아봤다.

“‘그 말’? 그게 뭔데?”

구체적인 세부 설명 없이 지시대명사만 붙이면 내가 어떻게 알까요.

밑도 끝도 없이 들이밀어진 ‘그 말’이 뭔지 궁금해서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자, 까르르 웃은 세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괜찮아, 몰라도 돼. 모를 수 있어.”

“모르면 물어보면 되는 거고, 서툴면 연습하면 되는 거야!”

세스의 말에, 아이들이 모두 한목소리로 외쳤다.

그 외침에 불현듯 말문이 막혀서 멍하니 눈만 깜박거리고 있자, 요한이 내게 귓속말로 부연 설명해 주었다.

“교황 성하께서 아이들에게 오실 때마다 꼭 해 주시는 말씀이거든요. 아이들이 그 말을 참 좋아하는데, 비전하께도 알려 주고 싶었나 봅니다.”

“……아.”

문득, 속에서 뭔가가 울컥 치미는 듯했다.

나는 ‘그렇군요’와 같은 간단한 대꾸도 못 하고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신이 난 아이들이 다시 외쳤다.

“모르면 물어보면 되는 거고, 서툴면 연습하면 되는 거야!”

“우리는 잘못되지 않았어!”

까르륵,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아득히 멀게 느껴졌다.

가슴에 멍울이 진 것처럼 답답했다. 멍하니 눈만 깜박이고 있는데, 웃고 있던 세라가 문득 나를 돌아봤다가 깜짝 놀랐다.

“눈사람 공주님!”

“……어? 응, 왜?”

“왜 울어?”

아이가 눈을 크게 뜨며 내게로 성큼 다가왔다.

아이의 작은 손이 내 뺨을 서툴게 쓸었다.

“봐, 울고 있잖아.”

세라가 증거를 제시하듯 내 앞에 물기가 묻은 제 손가락을 내보였다.

내가 운다는 세라의 말에 웃음을 그친 아이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하나둘씩 내게로 다가왔다.

“눈사람 공주님, 왜 울어?”

“울지 마아…….”

“이 말 되게 좋은 건데. 우는 거 아닌데!”

“누가 우리 눈사람 공주님 울렸어? 내가 혼내 줄게!”

아이들이 저마다의 방법으로 내게 위로와 걱정을 건네 왔다.

나는 피식 웃으면서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그냥?”

“너희들이 하는 말을, 듣고 싶었었나 봐.”

“누가?”

아이들이 의아한 듯 저마다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나는 희미하게 웃으며 아이들의 동그란 머리통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내가.”

내 대답에, 아이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렸을 때 내가 부모에게 듣고 싶었던 말은 너무나도 간단했다.

너는 잘못되지 않았다고. 원래 처음엔 다 모르고 서툴다고.

그러니까, 너는 나쁜 게 아니라고.

그냥 그 간단한 말이면 너무나 충분했는데.

“사람 새끼가 어떻게 이런 거 하나도 제대로 못 해!”

“아주, 네 어미년처럼 개 패듯이 처맞아 봐야 똑바로 하지?!”

김해수 시절의 어린 나는 애비 새끼의 저 엿 같은 소리를 철석같이 믿었다.

10살까지, 나는 ‘이런 거 하나도 제대로 못 하는 내’가 사람 새끼가 아닌 줄 알았다.

12살까지, 나는 정신이 혼미해질 때까지 맞으면 ‘제구실도 못 하는 나쁜 내’가 올바르게 변하는 줄 알았다.

그러던 13살 때, 나는 내가 겪고 있는 일이 부당하다는 것을 깨닫고 엄마를 설득해서 그 새끼를 신고했다.

그리고 14살, 막 중학교에 입학했던 어느 봄날.

집행 유예를 받고 악몽처럼 다시 찾아온 그 새끼에게, 엄마는 죽도록 맞다가 지적 장애를 얻게 됐다.

학교에 가야 해서 너무 맞으면 들킬까 봐 덜 맞은 내 몫까지, 전부, 엄마가 맞아서.

“……전하? 비전하?”

문득, 나는 정신을 차렸다.

흠칫해서 고개를 돌리자, 포카와 레비나를 비롯한 모두가 나를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비전하, 괜찮으십니까?”

루시엘이 염려 어린 목소리로 나직이 물어왔다.

나는 괜찮다는 뜻을 담아 입꼬리를 들어 올려 웃었다.

“네, 괜찮아요. 잠시 다른 생각을 좀 했나 봐요.”

“……그렇습니까.”

루시엘은 할 말이 많은 얼굴로 입을 달싹거렸다가, 이내 그 한마디만 내뱉고 다시 다물었다.

“어, 어른이 울 정도야? 울 정도로 그렇게 그 말이 듣고 싶었어?”

옆에서 눈물 많은 제시가 울먹거리며 물었다.

나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면서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 울 정도고 많이 듣고 싶었어……. 나 어렸을 적엔, 그런 말을 해 준 사람이 아무도 없었거든.”

“그, 그럼 내가 많이 해 줄게!”

“앗, 나도! 나도 많이 해 줄게!”

“나도 많이 해 줄 수 있어!”

아이들이 저마다 필사적으로 손을 들며 할 수 있음을 피력했다.

나는 기대 어린 얼굴로 아이들을 바라봤다.

“정말? 정말 해 줄 거야?”

“그럼! 당연하지!”

아이들이 투지에 불타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고, 귀여워라. 나는 병아리처럼 삐약거리는 아이들을 내려다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하지만 얘들아, 너희도 잊지 말아야 하는 거, 알지?”

“우리는 우리가 알아서 하니까, 눈사람 공주님은 공주님만 생각하면 돼.”

세라가 근엄하게 말하며 손을 번쩍 들어서 아이에게 하듯 내 머리를 토닥거렸다.

나는 왠지 느껴지는 기시감에 허허롭게 웃으며 세라를 바라봤다.

나는 어린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에게도 지켜 주고 보살펴 줘야 하는 존재로 낙인찍힌 것인가…….

뭔가 씁쓸하네.

* * *

최근 들어 체사는 밀린 업무를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며칠 동안 녹셰에 머물고 있었다.

에리카가 맡긴 인쇄술 연구에 관한 내용으로 체사를 만나기 위해 녹셰를 찾았던 빈센트는 맞은편에서 스쳐 지나간 인영을 보고 순간 걸음을 멈췄다.

‘……베이센 소공작?’

보통 얼굴이 알려져 있는 고위 귀족은 이런 길드에 직접 걸음 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소공작이 직접 이곳까지 찾아온 거지?

빈센트는 의아한 얼굴로 뒤돌아봤지만, 점점 멀어지고 있는 인영은 클록에 달린 후드를 깊게 쓰고 있어서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소공작은 대체 무슨 정보를 알아보고 싶어서 이곳에 직접 걸음 한 것일까. 잠시 그렇게 생각하던 빈센트는 이내 의문을 털어 내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길드원의 도움을 받아 체사가 기거하는 마스터실로 올라가니 서류를 처리하고 있던 체사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빈센트를 맞았다.

“와아, 빈센트다!”

다다다 달려가 빈센트를 와락 껴안은 체사가 아이처럼 즐거워했다.

“빈센트,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어요? 내가 보고 싶지는 않았고?”

“……숨, 막힙니다.”

“헉, 죽으면 안 돼요!”

얼른 빈센트를 놓은 체사가 그의 상태를 살폈다.

숨이 트인 빈센트는 흐트러진 옷매무시를 가다듬으며 나직이 숨을 내쉬었다.

“비전하께서 당신에게 인쇄술 전반에 대한 정보 수집을 명령하셨지 않습니까. 그것을 가지러 왔습니다.”

“아아, 잠깐만 기다려요. 어디 보자, 여기 뒀었는데~”

며칠간 못 봤던 빈센트를 봐서 신난 체사가 콧노래를 부르며 책상 위에 어지럽게 쌓여 있는 서류를 뒤적거렸다.

막무가내로 뒤적이는 바람에 안 그래도 위태롭던 서류 산이 쓰러지고 무너져 내려서, 원래부터 어지러웠던 책상 위는 완전한 난장판이 되어 버렸다.

보다 못한 빈센트가 책상 옆으로 다가갔다.

“저도 도와드리겠습니다.”

“손님에게 일을 시킬 수는 없죠! 음, 곧 찾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뇨, 돕겠습니다.”

그대로 보고 있다가는 복장이 터져 죽을 것 같다는 말은 조용히 속으로 삼켰다.

체사는 생글생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줘요, 그럼.”

사막에서 바늘을 찾는 시간이 시작되었다.

끝없이 재잘거리는 체사의 말에 간간이 짤막하게 대꾸해 주며 서류를 찾던 빈센트는 문득 아까 보았던 베이센 소공작을 떠올렸다.

잠시 머뭇거리던 빈센트는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까, 베이센 소공작께서…… 직접 이곳에 오셨습니까?”

“아아, 오다가 보신 모양이네요. 맞아요, 직접 왔어요. 이전까지는 계속 보좌관을 보냈었는데, 제가 정보를 제공해 주지 않아서 애가 탄 모양이에요.”

어깨를 으쓱한 체사가 대수롭지 않게 이어 말했다.

“우리 제수씨가 셀루리아 영애였던 시절에 가문으로부터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에 대한 정보를 요구하던데, 셀루리아 영애 시절의 제수씨에 대한 고급 정보는 지금 묶여 있거든요. 제수씨가 명령하셔서.”

“……비전하께서 소공작께 그 정보를 넘기는 걸 반대하셨습니까?”

빈센트는 서류를 찾던 것도 잊고 체사를 돌아봤다.

에스로타가 에리카의 과거사에 대해 의문을 품도록 유도한 것은 바로 에리카였다. 그런 에리카가 에스로타에게 그 정보를 넘기는 것을 반대할 리 없었다.

빈센트의 물음에, 체사는 느긋한 손으로 서류를 뒤적이면서 빙긋 웃었다.

“아뇨? 제수씨는 소공작이 그 정보를 원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실걸요.”

“전하께 보고드리지 않았습니까?”

“안 물어보셨잖아요?”

의아한 얼굴로 빈센트를 돌아본 체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투명한 붉은빛 눈동자에 어린 진심 어린 의문에, 빈센트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보고드리는 게, 맞지 않습니까. 비전하께서는 분명 정보를 풀도록 허락하실 텐데요.”

“하지만 저는 제수씨가 묻는 정보만 제공한다고 말씀드렸는걸요. 그 이외의 것은 제 관할이 아니에요.”

체사가 어깨를 으쓱였다.

빈센트는 잠시 침묵하다가, 이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오늘, 베이센 소공작께서 녹셰에 직접 방문하여 셀루리아 영애 시절의 비전하에 대한 고급 정보를 찾으셨다고, 비전하께 보고해 주십시오.”

“흠, 그건 내 약속 범위 밖인데…….”

도륵, 눈동자를 굴리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체사의 시선이 다시 빈센트에게 닿았다.

자신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는 빈센트의 홍안과 마주친 그가 눈을 가늘게 접어 웃었다.

“하지만 당신이 그렇게 부탁하는데 내가 어떻게 거절하겠어요. 좋아요, 이번에만 특별히 제수씨에게 먼저 말씀드리도록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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