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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박데기 영애의 반격을 조심하세요 (77)화 (77/139)

77화

제게로 떨어진 질문에 흠칫 어깨를 떤 제센은 서둘러 입을 열었다.

“대, 대공비는 소문과 같았습니다! 심약한 성정이면서 셀루리아 후작 부인한테 유독 저자세를 취했습니다. 의상은 휘페리 의상실의 드레스였고, 신교의 인사들과 교류했습니다.”

“그렇구나.”

사피엔의 금안이 부드럽게 휘었다.

그가 만지작거리던 금화를 다시 주머니에 집어 넣으며 말했다.

“더 보고할 것 없으면 이만 물러가.”

“예, 전하!”

깊이 절하듯 인사한 제센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며 문이 닫힌 후, 사피엔은 자리에서 일어나 금화 주머니를 책상 서랍 안에 대충 넣었다. 그곳이 쓰고 보관하기에 가장 편했으니까.

어차피 제센이 아니면 이곳에 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가끔 비웃기 위해 황태자가 온다고 해 봤자 불결하다고 1층에만 잠시 있다가 돌아갈 뿐이라 이런 곳에 있어도 들킬 걱정은 없었다.

천천히 서랍을 닫은 사피엔의 시선이 글씨가 반쯤 채워진 종이에 닿았다.

‘그때 갑자기 찾아왔던 대공비가 이상한 거지.’

에리카 르 드레인.

구교파의 대귀족인 셀루리아 후작의 심약한 조카딸로, 제국 유일한 공국의 안주인이 된 여자.

척 들어도 꽃길만을 걸으며 자라온 온실 속의 화초가 아닌가.

‘하지만, 확실히 소문과는 달랐어.’

사피엔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제 별궁을 보고 얼굴을 찌푸리지 않은 귀족을 본 적이 없었다.

평생을 깨끗하고 포근하고 아름다운 곳에서만 자라왔는데 이런 지저분한 곳이라니, 당연히 얼굴이 찌푸려지지 않겠는가.

‘뭐, 그조차도 내가 어렸을 때 겪었던 일이 다지만.’

어느 정도 머리가 자라고 살기 위해 멍청한 연기를 시작했을 무렵에는, 진지한 의도는커녕 호기심으로라도 자신을 찾는 귀족은 없었으니까.

그런데 그 귀족들의 정점에 위치한 대공비는, 이 더럽고 누추한 별궁을 보고 인상 한번 찌푸리지 않았다.

그리고 물었지.

‘하늘’을 좋아하냐고.

‘녹셰를 통해 알아본 바로는, 어렸을 때부터 자신을 학대해 온 가문에 복수하기 위해 반역을 결정했다고 하던가.’

대공비는 셀루리아 영애일 적, 가문에서 학대를 받았다고 했다. 그 때문에 복수의 기반을 마련하고자 비밀리에 해수라는 가명으로 부를 쌓았다고.

“……하지만, 그것만이라기에는 뭔가가 부족한데.”

가장 대표적인 의문점은 이것이었다.

성인이 될 때까지 얌전히 숨죽이며 기다리고 있던 ‘해수’가, 왜 갑자기 1년을 앞두고 셀루리아의 자금줄을 공격적으로 막아 버린 것인지.

결국, 그것 때문에 에리카는 팔려 가듯 드레인 대공과 결혼했고, 1년 더 일찍 복수를 준비할 수 있었다.

고작 1년을 더 일찍, 말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숨죽이며 기다려온 사람이 고작 1년을 못 버티다니, 말이 안 되지.’

분명, 뭔가가 더 있다.

사피엔은 제가 적어 내린 종이를 손끝으로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알고 싶은데…….”

그래야 대공비를 더 파악할 수 있을 텐데.

일부러 숨기는 것은 대개, 그 사람의 약점이었으니까.

종이에 적힌 글씨를 느리게 훑어 내리던 금빛 시선이 문득 ‘에리카 르 드레인’이란 글자에 닿았다.

종이의 끝을 쓸어내리던 손끝이 천천히 움직여 그 이름을 덧그렸다.

오늘 성혼식 연회에서, 대공비는 셀루리아 후작 부인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과 동시에 대공과 친밀하다는 것을 공공연하게 드러냈다. 그 일련의 모습은 일전에 그녀가 뿌려 놓은 떡밥과 미묘하게 맞물리면서 귀족들로 하여금 다양한 생각을 하도록 만들었다.

대공비에 대한 평판은 애초부터 ‘순수하고 가녀리면서 상냥한’ 사람이었으니, 사람들은 대공비를 ‘선량한 존재’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히 셀루리아 후작 부인은 선량한 존재에게 두려움을 주는 ‘악’으로, 대공은 선량한 존재를 보호하는 ‘선’으로 인식될 터.

자기 일이 아닌 것에는 깊게 생각하지 않는 단순한 대중 심리를 이용해서 말이다.

“무엇을 바라고 저와의 거래를 수락하셨는지는, 너무나 명약관화이지 않나요?”

그리 말하며 대공비가 지었던 배부른 웃음은, 먹이 사냥에 성공한 맹수의 그것이었다. 자신이 내민 손을 절대로 뿌리치지 못하리란 것을 잘 알고 있는 자의 웃음.

그런 웃음을 뒤에 숨기고 있는 사람이 ‘선량한 존재’라.

사피엔은 천천히 상체를 무너뜨려 책상 위로 엎어졌다. 두 팔을 포개고 그 위에 얼굴을 묻은 그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궁금해…….”

멍한 속삭임은, 다시금 불어온 매서운 겨울바람에 묻혀 사라졌다.

* * *

눈이 내렸다.

나는 과할 정도로 두툼하게 옷을 차려입은 뒤 신교의 성전으로 가기 위해 마차를 탔다.

같이 마차를 탄 포카와 레비나가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비전하,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밖에 저렇게 눈이 내리고 있는데 춥지 않으세요?”

“저도 걱정되어요, 비전하……. 차라리 눈이 그쳤을 때 가는 게 어떠신가요?”

얘야, 원래 눈이 내릴 때보다 눈이 내린 후가 더 추운 법이란다. 그 말을 속으로 삼킨 나는 인자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괜찮아. 인류도 나름 추위에 강하거든.”

한파 특보가 내려도 맨다리로 등교를 해야만 했던 여학생을 아시오?

그때에 비하면 지금 이 두툼한 옷과 외투는 한여름이나 다름없다오.

나는 울망울망한 눈망울로 “하지만……”을 연발하는 포카와 레비나를 외면한 채 마차를 출발시켰다.

바닥에는 눈이 점점 쌓여 가고 있었지만, 마찻길의 눈은 아직까지는 말끔히 치워져 있었다. 물기에 젖은 바퀴 소리와 말발굽 소리를 들으면서 마차의 휘장을 걷으니, 입김이 서린 창 너머로 눈송이가 떨어져 내리는 것이 흐릿하게 비쳤다.

나는 장갑으로 입김을 닦아 낸 뒤 창밖을 바라봤다. 새하얀 눈이 소복이 쌓인 에이리트는, 무언가 색다른 느낌을 주었다.

‘좀…… 가증스러운 느낌?’

눈 뜨고도 코가 베인다는 수도 에이리트가 깨끗하고 귀여워 보이다니, 기만이었다.

‘어제 황후가 불러서 레틸기스 즙 마시러 갈 때만 해도 눈 같은 건 하나도 없었는데…….’

금세 입김이 다시 차오른 창문만큼 흐릿한 눈으로 밖을 응시하고 있자니, 마차는 어느새 신교의 성전에 도착했다.

나는 포카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연락을 받고 미리 대기하고 있던 추기경 루시엘이 내게 다가와 예를 갖췄다.

“드레인 대공비 전하를 뵙습니다. 이레알 신교의 추기경, 루시엘이라 합니다.”

루시엘은 허리까지 닿는 군청색 머리카락에 청록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날카로운 인상의 소유자였는데, 외알 안경을 쓰고 있다는 점이 특이점이라면 특이점이라 할 만했다.

나는 부드럽게 웃음 지으며 인사를 받았다.

“네, 반가워요, 루시엘 추기경.”

“송구스럽게도, 오늘 교황 성하께서는 갑자기 타 교구에 일이 생겨서 출타하셨습니다. 성하께서 오늘 직접 인사드릴 수 없음에 안타까워하시면서 이 서신을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아아…… 그렇군요.”

‘신.로.줄’의 에리카로 빙의한 지 어언 7여 년, 이제 겨우 여주를 볼 수 있으려나 싶어 기대감에 가득 차서 열심히 달려왔건만, 이게 대체 무슨 소리요 추기경 양반!

하지만 당장 여주 데려오라고 생떼를 쓸 수도 없는 법.

나는 안타까운 얼굴로 추기경이 내민 서신을 받아 들었다.

‘분명 남주가 보낸 거겠지.’

그때, 만남 일정을 조율하기 위해 보내 주기로 한 그 서신 말이다.

나는 포카에게 서신을 맡긴 뒤 다시 루시엘에게로 시선을 맞췄다.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나와 눈이 마주친 루시엘이 입을 열었다.

“비전하께서 매달 보내 주시는 후원금은 말씀해 주신 대로 아이들에게 잘 쓰이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지금 기초 작문 수업을 끝내고 휴식 시간인데, 만나 보시겠습니까?”

“네, 부탁드려요.”

나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여주가 보고 싶어서 온 것도 있지만, 당연히 본 목적은 내가 후원하는 아이들을 만나는 것이었다.

루시엘도 작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절 따라오십시오”하고 말한 후 먼저 앞서 걷기 시작했다.

나도 그 뒤를 따라 걸었다.

성전의 중앙 정원을 가로지르는 회랑은 윗부분은 지붕으로 막혀 있지만 양옆이 뚫려 있어서 정원을 볼 수 있도록 한 형태였는데, 정원으로 시선을 돌리자 잔디가 가맣게 바래 버린 땅 위로 눈이 조금씩 쌓여 있는 것이 보였다.

포득포득, 눈을 밟으며 얼마쯤 걸었을까.

“이곳입니다.”

루시엘이 걸음을 멈춰 선 곳은 어느 방 앞이었다.

그가 문을 열자, 종종이 모여 앉아 있던 반짝이는 눈망울이 일제히 이쪽을 향해 쏟아졌다.

내가 안으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아이들의 시선이 그대로 따라왔다.

아이들을 맡고 있던 사제가 어색하게 웃음 지으며 내게로 다가왔다.

“드레인 대공비 전하를 뵙습니다. 저는 아이들을 담당하고 있는 사제, 요한입니다.”

“반가워요, 요한.”

마주 인사한 내가 시선을 아이들에게로 돌리자, 요한이 다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러분, 제가 오늘 귀한 손님이 오신다고 말씀드렸지요? 이분은 드레인 공국의 대공비 전하로, 여러분이 맛있는 밥을 먹고, 재밌는 수업을 하고, 따뜻한 이불에서 잠들 수 있게 해 주신 분이에요.”

요한의 말에도 아이들은 반응 없이 눈만 말똥말똥 깜빡이며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당황한 요한이 내 눈치를 보며 다시 입을 열려던 그때였다.

“눈사람이다!”

돌연, 아이 중 한 명이 나를 가리키며 외쳤다. 아무래도 내가 오늘 입고 온 하얗고 두터운 옷이 그 애의 눈에는 그렇게 보인 듯했다.

문득 웃음이 나왔다. 웃긴 건 나만이 아니었는지, 아이들이 키득키득 숨죽여 웃기 시작했다.

“세라―…”

이제는 당황을 넘어 기겁한 요한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

나는 한 손을 들어 그를 막은 뒤, 고개를 숙여 나를 눈사람이라 부른 아이와 눈을 맞췄다.

“눈사람 좋아해?”

친화력이 좋은 모양인지, 낯선 사람의 물음에도 세라라고 불린 아이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좋아해! 왜냐며언, 귀여우니까!”

“내가 귀여워?”

“응! 으음, 아니…….”

처음에는 응이라고 고개까지 끄덕이던 세라가 뒤늦게 말을 바꿨다.

나는 짐짓 시무룩한 얼굴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아니야? 나는 안 귀여워?”

“언니느은, 음…… 귀엽다기보다는, 예뻐!”

맞는 단어를 고르듯 잠시 고민하던 세라가 드디어 찾아냈는지 손뼉까지 짝 치며 말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치기 시작했다.

“맞아! 예뻐! 눈사람 공주님!”

“맞아, 맞아! 공주님이야! 눈사람 공주님!”

아이들이 까르르 웃으며 좋아했다.

그렇게 나는 아이들에게서 ‘눈사람 공주님’이라는 참람하면서도 영광스러운 칭호를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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