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그 질문에, 세이룬은 눈을 가늘게 뜨고 에스로타를 응시했다.
에리카 르 셀루리아의 학대 사실은 당사자와 가해자 본인들, 그리고 대공성의 일부 사람들이 아니고서야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런데 수도의 귀족이, 그것도 구교파의 핵심 인물이 그 사실을 직접적으로 묻다니.’
지금 베이센 소공작의 저 질문은 단순히 뜬구름 잡듯 덜컥 내뱉을 수 있는 질문이 아니었다. 즉, 그녀는 에리카가 셀루리아 가문에서 정상적이지 않은 생활을 했다는 일정 이상의 심증을 갖고 있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 ‘불미스러운 일’이 무엇인지는 아직 정확히 모르는 모양이지.’
그렇게 뭉뚱그려서 언급한 것을 보면 말이다.
세이룬은 어떻게 대답하는 것이 좋을지 잠시 고민했다.
에스로타가 이만큼까지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은 분명 에리카가 그럴 수 있도록 안배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에스로타가 지금 학대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도 에리카의 뜻에 부합하나?
“……그건 내가 사사롭게 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닌 것 같군.”
그는 사실을 답하는 대신, 에리카에게 직접 물어보라는 뜻을 담아 대답을 회피했다.
이 모든 것은 에리카가 계획하고 실행하는 복수극이었고, 자신은 단지 에리카의 뜻에 따라 에리카를 돕는 조력자일 뿐이었다.
그 어디에도 스스로 판단하여 실행에 옮기는 것은 없었다.
부인님을 위해 내린 판단이라고 하여, 그 결과가 무조건 부인님의 뜻에 부합하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세이룬의 거절에 일순 어깨를 움찔한 에스로타는 이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제가 비전하께 무례를 범했군요. 전하의 뜻은 잘 알았습니다. 귀한 시간을 뺏게 되어 송구합니다.”
정중히 사과한 에스로타는 “그럼, 이만”하고 짧게 인사한 뒤 자리를 떠났다.
세이룬은 점점 멀어지는 에스로타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쪽과 협력하기로 한 세네카 소공작에, 부인님의 어두운 과거에 동요하는 베이센 소공작이라.’
구교파의 중심을 이루는 귀족 가문 중 두 가문이 이탈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일이 점점 에리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고 있는 것 같아, 세이룬은 짧게 미소 지었다.
* * *
“셀루리아에 심어 놓은 자들과 연락이 끊겼습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셀루리아 저택에서 시신이 두 구 내보내진 것으로 보아, 아마 제거당한 듯합니다.”
며칠 전, 보좌관 세레스로부터 들은 소식을 떠올린 에스로타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움켜쥐었다.
비정상적일 만큼 입이 무거운 셀루리아의 하인들과, 심어 놓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제거당한 첩자들.
이 두 사실은, 마치 셀루리아가 외부로부터 무언가를 꽁꽁 숨기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 않는가.
‘그리고, 특히 셀루리아 가문 사람들에게 이상할 만큼 저자세를 취하는 에리카의 태도.’
그건 절대로 사랑받으며 자란 사람의 반응이 아니었다.
그래서 에스로타는 에리카가 셀루리아 영애였던 시절, 셀루리아 가문에서 모종의 좋지 않은 일을 겪었고, 가문은 그것을 숨기려 한다는 가정을 세웠다.
하지만 녹셰에서는 B등급의 정보까지만 제공했고, 그 정보에서 얻을 수 있었던 새로운 사실은 에리카가 신체적으로 건강했다는 게 전부였다.
“에리카는 원래 몸이 약하고 마음 또한 여린 아이라 부득이하게 불참하게 되었습니다. 부디 양해 부탁드려요, 베이센 영애.”
그러니까, 사교계에서 당연한 공식처럼 작용했던 ‘에리카 르 셀루리아는 몸이 약하다’는 명제는 거짓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에스로타는 지속적으로 S등급과 A등급을 요청했지만, 제공 대기 중이라는 답변만 돌아와 당장 손에 넣을 방도는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드레인 대공을 찾아가 물었다.
‘에리카 르 셀루리아’가 불미스러운 일을 경험한 적이 있느냐고.
“……내가 너무 경솔했어.”
에스로타는 한숨 쉬듯 중얼거리며 연회장 출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원래라면 그녀는 사교계의 별이란 칭호에 맞게 회장의 정중앙에 나가 구교파의 인사들을 이끌어야 했지만, 머릿속이 엉킨 실타래처럼 엉망인 지금은 도저히 그럴 수 있는 기분이 아니었다.
최대한 연회장의 구석진 곳으로 이동했지만, 유명 인사인 에스로타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해 오는 귀족들은 존재했다. 최대한 태연하게 그들에게 인사하며 걸음을 옮기던 때였다.
“…….”
빗긴 시야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 해맑게 웃고 있는 에리카가 들어왔다.
에스로타는 순간 걸음을 멈췄다.
“실은, 저 그동안 정말로 에스로타의 티파티에 꼭 한번 초대받고 싶었어요.”
‘……사람들 사이에서, 저렇게 행복하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인데.’
대체 왜, 후작가는 에리카를 건강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꽁꽁 숨겼던 것일까.
에스로타는 멍하니 에리카를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웃고 있던 에리카는 이제 자신에게 다가온 드레인 대공을 보며 활짝 웃고 있었다.
대공이 에리카에게로 고개를 숙이며 무어라 말하자, 에리카는 쑥스러운 듯 배시시 미소 지었다.
홀린 듯이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에스로타는 이내 흠칫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다시 연회장을 벗어나기 위해 걸음을 옮겼을 때였다.
“……베이센 소공작, 에스로타가 황태자 전하와 황태자비 전하를 뵙습니다.”
에스로타는 차분한 동작으로 어느새 제 앞까지 다가온 칼릭스와 카리에에게 예를 올렸다.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칼릭스가 짐짓 서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베이센 소공작도 참석했었군. 늘 사교계를 빛내 주던 사교계의 성신께서 보이지 않아 불참한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송구합니다, 전하. 부끄럽게도 제가 몸이 좋지 않아, 전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였습니다.”
면목이 없다는 듯, 에스로타는 사죄를 청하듯 고개를 숙였다.
옆에서 에스로타의 안색을 살핀 카리에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확실히 소공작의 낯빛이 좋지 않군. 몸이 좋지 않으면 어서 귀택하여 건강을 보존하도록 하게.”
“……예, 전하.”
에스로타가 한 박자 늦게 답했다.
그 대답에서 묘한 위화감을 느낀 카리에의 푸른색 눈이 슬쩍 가늘어졌다.
위화감은 다음 순간 사라졌지만, 카리에는 여전히 에스로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인사가 늦었습니다. 두 분 전하의 성혼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에스로타는 카리에의 시선을 느꼈지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물 흐르듯 인사했다.
셀루리아 저택으로 들여보냈던 첩자들은 모두 입막음을 단단히 했으니, 셀루리아에서는 그들과 자신의 연관성은 찾기 어려울 것이다.
에스로타의 담백한 인사에, 칼릭스가 맞잡고 있던 카리에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웃었다.
“사교계의 별이 우리의 결혼을 축하해 주다니, 영광이로군.”
잘생긴 얼굴에 떠오른 미소는 달콤하면서도 부드러웠지만, 에스로타는 그것이 계산된 미소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높은 신분의 결혼이란 원래 그런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드레인 대공과 에리카는 그런 것 같지 않았는데.’
저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하던 에스로타는 이내 생각을 흩뜨리며 머릿속에서 지워 냈다.
사생활에 대한 깊은 관심은 실례다.
“하면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두 분 전하께 신의 은총이 깃들기를.”
정결한 동작으로 예를 올린 에스로타는 다시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피곤해서, 어서 빨리 저택으로 돌아가 쉬고 싶었다.
* * *
반쯤 부서진 창문에서는 시린 겨울바람이 그대로 새어 들고 있었지만, 사피엔은 개의치 않고 종이 위에 글씨를 써 내려갔다.
책상 위에는 이미 빼곡히 글씨를 적어 내린 종이가 한가득이었다.
“황자 전하, 제센입니다.”
노크 소리와 함께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때까지 곧은 자세로 글만 써 내려가던 사피엔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들어와.”
닳아 빠진 경첩이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들어온 사람은 푸석한 회색 머리카락에 갈색 눈동자를 가진 왜소한 체구의 남자로, 사피엔이 어렸을 적 별궁에 배치된 유일한 사용인이었다.
“이번 달에 빼돌린 예산입니다. 전하의 말씀대로 오늘이 성혼식인 덕분에 관리 감시가 심하지 않아 평소보다 두 배의 양을 가져왔습니다…….”
덜덜 떨며 들어온 제센이 사피엔의 눈치를 보며 들고 있던 주머니를 내려놓았다. 척 보기에도 묵직해 보이는 주머니였다.
사피엔의 눈동자가 나른한 고양이처럼 가늘어졌다.
그가 손을 뻗어 주머니의 끈을 장난치듯 건드리며 말했다.
“그래, 수고했어.”
원래 이 돈은 사피엔의 몫으로 배정된 황궁 예산으로, 사피엔을 싫어했던 황태자의 묵인으로 인해 암암리에 횡령되던 돈이었다. 사피엔은 이를 이용하여 제센으로 하여금 그 돈을 빼돌리게끔 시켰고, 제센은 그 돈을 ‘빼돌림으로써’ 황태자의 눈을 피해 원주인에게 예산이 전달될 수 있도록 했다.
책상 위에 놓인 주머니의 끈을 풀던 사피엔의 시선이 다시 제센을 향했다.
“성혼식 연회는 어땠어?”
“성혼식 연회 도중 황제가 드레인 대공을 비밀리에 호출했습니다.”
“아아, 아이테에서 왕정이 무너지고 공화정이 들어섰다더니, 그 때문이겠군.”
무료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사피엔이 턱을 괴고 고개를 기울였다.
“다른 건?”
“성혼식 때 있었던 에스로타 르 베이센 소공작의 행보가 평소와 달랐습니다.”
“평소와 달라?”
“네……. 계속 창백한 안색으로 연회장의 구석을 홀로 돌아다니다가 황제와의 알현을 마치고 회장으로 복귀한 드레인 대공과 한 차례 접촉했습니다. 그 후에는 황태자 부부와 인사를 나눈 뒤 서둘러 귀택했습니다. 그러니까, 꼭 어디가 아픈 것처럼―…”
순간, 방 안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고개를 들고 몸을 바로 세운 사피엔의 서늘한 금안이 제센을 직시했다.
제 잘못을 깨닫고 흠칫한 제센은 서둘러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죄, 죄송합니다! 아, 아픈 것 같다는 사견은 부디 듣지 못한 것으로 해 주십시오…….”
“제센, 내가 늘 말했지?”
슬긋, 고개를 기울인 사피엔이 눈을 접어 웃었다.
주군은 미소 지었지만, 제센은 벌벌 떨었다. 차가운 눈동자에 서린 웃음은 그저 공포스러울 뿐이었다.
“네 멍청한 해석 따위는 하나도 궁금하지 않다고.”
“자, 잘못했습니다, 전하…….”
“너는 그냥 보고 들은 것만 내게 말하면 돼. 네 사견 같은 건 하나도 필요 없으니까.”
“알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제게 연신 고개를 조아리는 회색 머리통을 지그시 바라보던 사피엔은 이내 감흥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다시 일어서라는 말은 없었다.
제센이 가져온 돈주머니를 열어 금화를 만지작거리던 사피엔이 문득 질문을 던졌다.
“대공비는, 어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