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스레인은 모국인 제나 왕국의 궁정 화가인 것으로 알고 있어요. 궁정 화가의 그림은 왕실의 재산인데, 제가 어떻게 그 그림을 걸 수 있나요?”
나는 겨우 똥 씹은 표정을 갈무리한 후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걱정하지 말라는 것처럼 검지를 좌우로 까딱인 슈리스가 비밀을 알려 주듯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비전하께서는 아직 듣지 못하셨나 보군요. 최근 제나 왕국의 재정이 나빠져서, 왕실에서 스레인의 그림 ‘어린 시절의 초상’을 경매에 부쳐 팔아 버렸지 뭡니까.”
“아…….”
“스레인이 누굽니까. 현대의 제1 화가라 추앙받는 천재 화가이지 않습니까! 타국의 수많은 스카우트 제의도 거절하고 모국의 궁정 화가로 평생을 일해 왔는데, 돈이 없다고 자신의 그림을 팔아 버리다니! 이에 분노한 스레인은 궁정 화가로서 받은 모든 것을 반납한 후 본인의 그림만을 가지고 이곳 이렌텔로 귀화해 버렸답니다.”
“아…….”
내가 복수에 집중하고 있던 사이에 그런 일도 있었군.
나는 별 감흥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좋아요. 스레인의 ‘위대한 타할린 호의 마지막을 배웅하며’는 제가 살게요.”
“헉. 저, 정말이십니까……?”
“……?”
자신이 내게 사라고 홍보했으면서, 내가 사겠다니까 놀라는 건 대체 뭐지.
나는 절로 떨떠름해지려는 얼굴 위로 활짝 웃는 표정을 덧씌우며 이어 말했다.
“이 그림은 스레인 화백 특유의 수채화적인 아련한 색감이 잘 드러난 그림으로 유명하잖아요. 특히 바다에 비친 석양의 반짝거림을 무척이나 잘 표현했다고 호평이 자자하니…… 세사르에 걸면 참 좋을 것 같아서요. 손님들이 석양 진 바다를 보는 듯한 부드럽고 편안한 기분으로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요.”
그리고 저 배의 마지막과 셀루리아의 마지막이 참 닮았단 말이지. 물론 뒷말은 속으로 삼켰다.
내가 말하는 동안 그저 어버버거리고 있던 슈리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그…… ‘위대한 타할린 호의 마지막을 배웅하며’는 특히 보석 안료만을 사용한 작품으로 유명한 그림인데, 그림의 대금도 듣지 않으시고……?”
아하, 원가부터 워낙에 비싼 그림이라 일부러 그걸 살 재력이 있는 사람에게 접근한 거로군.
‘황가나 왕가는 제나 왕국과의 외교적 불화가 생길 수 있으니 당장 구입하기에는 무리가 있고, 무일푼에 그림만 있는 스레인은 당장 먹고살 돈이 필요하니 일단 아무에게나 그림을 팔아야겠고 말이지.’
현대의 제1의 화가로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스레인의 그림이라면 사려는 사람은 줄을 서고도 남을 텐데, 왜 굳이 나한테 접근해서 그림을 팔려고 했는지 이해가 갔다.
그나저나 보석 안료로 수채화 느낌이 들게 그린 거라니, 제1 화가인 이유가 있었네.
“대금은 대공저로 그림을 갖고 오실 때 바로 지불하도록 할게요. 음, 그리고 혹시 스레인 화백에게 그림 의뢰를 넣고 싶은데, 혹시 가능할까요?”
나는 순진한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
그림의 금액이 실로 어마어마하기는 한지, 잠시 어버버하면서 버퍼링이 걸렸던 슈리스가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네, 네, 네! 당연히 가능하십니다, 고객님! 저, 그림은, 어떤……?”
“집단 초상화를 부탁드리고 싶어요.”
“집단 초상화요?”
예상 밖이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던 슈리스가 황급히 놀란 표정을 지우고 다시 예의 그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나도 그를 따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지만 자세한 이야기를 하기에는 장소가 적절치 못한 것 같아요. 그림을 갖고 오실 때 관련 이야기를 자세히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앗! 당연히 괜찮습니다, 괜찮고 말고요!”
슈리스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괜찮음을 몇 번이나 강조했다.
아아, 고귀한 미술도 굴복시켜 버리는 자본의 힘이란…….
나는 차후 슈리스의 자작저에 연락을 주겠다고 한 뒤 그와 헤어졌다.
‘흐아아, 힘들어…….’
본디 사람과 만나면 기가 탈탈 털리는 체질을 타고난 나는 두 번의 대첩을 연달아 겪고 난 후 진이 다 빠져 버렸다.
그냥 빨리 집으로 돌아가서 한숨 푹 자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나는 돌아가기 위해 서둘러 세이룬을 찾았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안녕하세요, 비전하! 저는 리스네 백작 가문의 차녀, 데리스라 합니다!”
내가 연회장을 한 번 둘러보기도 전에, 불현듯 옆에서 명랑한 소리가 들려왔다.
흠칫해서 돌아보자 한 영애가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비전하. 저는 요식업에 몸담고 있는…….”
“드레인 대공비 전하를 뵙습니다. 저는 레스토 자작가의…….”
“저는…….”
갑자기 주위가 순식간에 신교파 귀족들로 가득 채워졌다.
나는 흔들리는 눈으로 내게로 쏟아지는 시선들을 마주했다.
‘아니, 황후가 나한테 드레스를 선물한 이유 중 하나가 신교파 귀족들이 해수를 경계하도록 하기 위함인 거 아니었어……?’
근데 경계는커녕 제가 구심점이 되어 버렸는데 말이죠.
‘아무래도, 아까 사람들에게 넌지시 보여 줬던 셀루리아 후작 부인과의 미묘한 관계가 변수가 된 것 같은데…….’
대공비가 구교파를 지지해서 휘페리 드레스를 입은 게 아니라 그들의 강요나 협박에 의해서 입은 거라면, 신교파 귀족 측에서 대공비를 경계해야 할 이유가 없긴 했다.
오히려 구교파에 대항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들 수 있으니 더 좋아할지도 모르지.
어쨌든, 사방에서는 아까 내 주위를 포진해 있던 구교파 귀족들 대신, 나와 연을 맺고 싶어 하는 신교파 귀족들의 목소리가 귓가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나는 HP가 급격히 수직하강하는 것을 느끼며 울지 못해 웃었다.
누구 나 기절시켜서 집까지 데려다줄 사람…….
* * *
에리카가 델레미아와 함께 휴게실로 향한 후, 세이룬은 혹시 모를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에리카가 있는 2층으로 신경을 집중시켰다.
그의 주위에 있는 귀족들은 구교파, 신교파 상관할 것 없이 제국의 유일한 대공을 흘끔거리기에 바빴다. 물론 두 파의 각 시선에 대한 의도는 경계와 호의로 완전히 달랐지만.
그때, 묘한 긴장감을 뚫고 사용인 하나가 그에게 다가와 귓속말로 고했다.
“대공 전하, 황제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그 말에, 세이룬은 연회장 상석에 마련되어 있는 황제의 보좌를 흘끗했다.
황제는 그곳에 없는 것으로 보아, 이 담화를 비밀리에 진행하고 싶어 하는 듯했다.
“……안내해.”
세이룬은 황궁의 연회장 곳곳에 배치해 둔 비밀 호위를 느릿하게 훑은 뒤 사용인에게 명령했다.
사용인은 짧게 묵례하고는 세이룬을 회장 밖 작은 응접실로 안내했다.
“황제 폐하, 드레인 대공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들도록.”
황제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문이 열렸다.
세이룬은 무표정한 얼굴로 응접실 안으로 들어섰다.
“드레인 대공과의 독대라니, 역사적인 날이로군.”
테이블에 앉아서 차를 홀짝이고 있던 황제가 입을 열었다.
“그대의 가문은 가주 자리가 교체되어도 황실에 보고하는 법이 없지 않은가. 그 탓에 존재조차 알 수 없는 대공이 열 손가락을 훌쩍 넘어가는데, 이 어찌 역사적인 날이 아닐 수 있겠는가.”
뼈가 들어 있는 말이었다.
황가를 상징하는 채도 높은 금안이 세이룬을 향했다. 세이룬은 대꾸 없이 저벅저벅 걸어가 황제의 맞은편에 앉았다.
“용건만 간단히.”
시선을 든 그가 짧게 말했다.
예법이고 뭐고 없이 다짜고짜 들이밀어진 본론에 황제가 일순 움찔거렸다.
그의 얇은 입술이 심기가 상한 듯 비틀렸다.
“……공국에서는 제국의 예법을 가르치지 않나?”
“아이테에 관한 것이라면 걱정할 건 없다고 말하고 싶군. 왕의 목이 효수되고 귀족들도 줄줄이 참형당했지만, 새 정부 역시 피해가 크니 당분간 전쟁이 벌어질 일은 없을 터.”
“대공.”
“설사 벌어진다고 해도 맹약대로 피해 가는 일은 없게 하지.”
황제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그대에게 고대 용의 피가 섞여 있다 할지라도, 황제에게 하대를 하는 것은 반역에 준하는 행위임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
“그래서,”
세이룬이 무료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반역죄라도 물을 생각인가?”
“…….”
구족이 멸할 중죄가 그의 입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튀어나왔지만, 황제는 그저 입을 다물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대공가가 군사를 일으켜 황궁으로 진격해 오지 않는 한, 황제는 대공가를 멸할 수 없었으니까.
공국은 아이테라는 위험 요소를 막아 주는 훌륭한 방패막이였으므로.
물론 세이룬은 내심 이 기회를 틈타 황가가 대공가를 반역도로 몰아서 당장이라도 황궁을 뒤엎을 수 있는 빌미가 제공되기를 기대했지만, 대공 부부가 정말로 반역을 획책하고 있다는 것을 꿈에도 모르는 황제는 그를 제 가문의 특수성을 이용해 감히 황권과 맞먹으려 하는 참람한 자라고만 생각했다.
“……현 대공비가 셀루리아 가문 출신이니 공식 석상에도 얼굴 보일 일이 자주 있을 텐데, 그때도 황제의 면전에 하대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괜한 잡음이 이는 것은 가문에도 좋지 않을 터. 황제는 그것을 노리고 말을 우회했다.
“기우로군.”
하지만 세이룬은 더 이상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딱 잘라 말하고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리카와 헤어진 장소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기에도 모자랄 시간에, 벌써 5분이나 쓸데없이 시간을 잡아먹고 있었다.
황제가 맹렬한 기세로 노려보든 말든 곧장 응접실을 나선 세이룬은 곧바로 회장을 향해 걸었다.
그가 회장에 다시 들어선 순간, 한 인영이 대뜸 세이룬 앞을 가로막았다.
“대공 전하.”
“……베이센 소공작?”
예상치 못한 방해꾼의 등장에 세이룬은 미간을 찌푸렸다.
더구나 저자는 지난번 부인님의 이름을 공공재로 만들어 버린 적이지 않은가.
세이룬의 표정이 점점 더 안 좋아졌다. 대놓고 꺼리는 기색에도 에스로타는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하도록.”
“……잠시, 자리를 옮기고 싶은데.”
에스로타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세이룬은 순간 짜증이 났지만, 그래도 부인님과 어느 정도 친분을 쌓은 자를 무시할 수는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로타가 안내한 곳은 연회장 중에서도 외져서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묻고 싶은 게 뭐지?”
한시라도 빨리 에리카에게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에 세이룬이 재촉하듯 물었다.
에스로타도 시간을 끌 생각은 없는지, 곧장 본론을 꺼냈다.
“혹시, 비전하께서 셀루리아 영애였을 적…… 불미스러운 일을 경험하신 적이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