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는데, 역시 속닥거림을 눈치챘는지 문득 걸음을 멈춘 후작 부인이 나를 돌아봤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에리카.”
“네, 네, 후작 부인……!”
“호호, 우리 조카딸은 예법도 참 잘 지킨다니까. 그냥 편하게 외숙모라 불러도 된다고 했잖니.”
착 소리를 내며 부채를 접은 후작 부인이 눈을 접어 웃으며 장갑 낀 손을 뻗어 내 어깨를 도닥였다.
흠칫 몸을 굳힌 나는 구원의 밧줄을 찾아 헤매듯 재빨리 눈동자를 굴려 연회장을 훑었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눈동자를 굴려도 세이룬의 모습은 머리카락 한 올도 찾을 수 없었다. 세상에, 이런 우연찮은 일이.
대신 후작 부인이 물러갈 낌새가 보이면 내게로 다가오려는 듯 기웃거리는 구교파 귀족들만 잔뜩 확인했을 뿐이다. 신교파와 나를 갈라놓기 위한 황후의 의도대로 말이지.
“네, 외숙모…….”
뭐, 딱히 상관없지. 나는 가늘게 떨리고 있는 손을 숨기듯 뒷짐을 지며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때였다.
“에센테르 후작, 라리엘이 드레인 대공비 전하를 뵙습니다.”
붉은 머리칼과 주황색 눈동자를 가진 여자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에센테르 후작 가문은 신교파 소속의 가문으로, 자기 무역 사업에 주력하고 있었다.
허리 아래까지 굽이치는 붉은색 머리카락을 위로 틀어 올려 고정한 라리엘은 에인시아에서 제작한 게 분명해 보이는 아이보리색의 연회용 바지 의상 세트를 입고 있었는데, 척 봐도 해수인 나에게 잘 보이려 한다는 것이 눈에 보였다.
‘저번에 내가 에인시아에 방문했을 때 디자이너에게 거액의 팁까지 줄 만큼 바지를 마음에 들어 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모양이네.’
나에게 대놓고 잘 보이려고 작정한 상대에게 불쾌감이 드는 사람은 거의 없다. 더구나 에센테르 후작은 나를 후작 부인에게서 ‘구해 준’ 사람이 아닌가.
나는 반가운 사람이라도 만난 것처럼 화하게 웃으며 라리엘을 바라봤다.
“아, 안녕하세요, 에센테르 후작님.”
“후작님이라니요, 과분한 호칭입니다. 그냥 라리엘이라 편히 이름을 불러 주세요.”
라리엘이 사람 좋게 웃으며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그 친근감에 맞춰 나도 한결 편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라리엘.”
“그나저나 옆에 계신 분은 누구신가요? 별로 친해 보이지는 않는데.”
차륵, 부채를 펼쳐 입가를 가린 라리엘은 순진무구한 척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작스럽게 정면에서 도발을 받게 된 후작 부인이 차갑게 웃으며 탁 소리를 내며 부채를 접었다.
“에센테르 후작께서는 눈이 참으로 좋지 않으신가 봅니다. 저와 에리카는 가족 사이인데, 어떻게 사이가 좋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에리카?”
불시에 호명된 나는 흠칫 어깨를 떨며 허겁지겁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라리엘이 이내 비웃듯 입꼬리를 비틀었다.
“가족이라뇨? 제가 아는 가족의 정의가 그새 바뀌기라도 했나 봅니다.”
“후작, 지금 대체―”
“아무튼, 제가 지금 중대한 사안으로 대공비 전하와 긴히 나눌 이야기가 있어서요. 제삼자께서는 자리 좀 비켜 주시겠어요?”
그 말에, 나는 기대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후작 부인을 돌아봤다가, 이내 황급히 표정을 수습하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라리엘은 그런 나를 보며 의기양양하게 웃었고, 후작 부인은 나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다시 부채를 펼쳤다.
실망시키지 말라고 한 게 불과 얼마 되지도 않는데 벌써부터 이렇게 실망하게 해 드리다니, 속이 좀 많이 썩어 가겠어요?
“외숙모가 된 도리로서 조카의 사교를 막을 수는 없지요. 하지만 에리카.”
나를 부른 후작 부인이 봄이 녹아들기라도 한 것처럼 사르르 웃었다.
“사교계에는 모두 좋은 사람만이 있는 것이 아니란다. 우리 같은 대귀족인 자들에게는 불량한 사람을 거를 줄 아는 안목이 필요해.”
그렇게 노래하듯 말한 후작 부인의 시선이 흘끗 라리엘을 훑었다.
“안목을 기르기에 좋은 예가 바로 옆에 있구나.”
라리엘이 하, 하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후작 부인이 이어 말을 맺었다.
“너는 이런 사교계에 경험이 거의 없으니 그런 데에는 미숙하지. 조언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셀루리아에 찾아오렴. 성심껏 도와주마.”
“네, 후작 부― 아니, 외숙모…….”
나는 후작 부인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어벙한 반응에 후작 부인의 이마에 커다란 혈관 마크가 새겨졌지만, 그녀는 사교계에 능숙한 귀부인임을 증명하듯 끝까지 표정을 흩트리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지독한 사람.”
멀어지는 후작 부인의 고고한 뒷모습을 보며 음산하게 중얼거린 라리엘이 이내 생긋 웃으며 내게 다시 예를 올렸다.
“다시 인사드립니다, 비전하. 저는 자기 무역 사업을 주력으로 삼고 있는 에센테르 후작 가문의 가주입니다.”
“네, 반가워요, 라리엘.”
나도 콘셉트에 맞춰 수줍게 웃으며 후작에게 인사했다.
“저, 그런데, 제게는…… 무슨 일로…….”
“해수 님께 제안하고 싶은 사안이 있어서요.”
라리엘의 시선이 잠시 내 뒤로 향했다.
“아무래도 비전하를 찾는 자들이 많은 듯하니, 용건만 빨리 말씀드려야겠군요.”
“네?”
“후후, 그건 조금 뒤 알게 될 거랍니다. 지금은 저와의 대화에 집중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라리엘이 한쪽 눈을 찡긋하며 말을 이었다.
“현재 이렌텔의 상류층에 수입되고 있는 자기 그릇은 모두 카헨 왕국에서 고가에 들여온 고급 제품이지요. 아무리 자기가 고귀함을 상징한다지만, 원가격에 유통비까지 더해지면 그 가격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래서 저는 직접 자기를 생산할 수 있도록 관련 기술을 연구하여 자기를 직접 생산하고자 합니다.”
사업 이야기로 화제가 전환되자마자 라리엘의 주황색 눈동자가 날카롭게 변했다.
나 역시 진지한 얼굴로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하지만 저희 회사의 예산만으로는 기술 연구가 다소 빠듯하여, 실례를 무릅쓰고 이 자리를 빌려 감히 투자 요청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런가요.”
나는 짐짓 고민되는 표정으로 눈동자를 내리깔았다.
내 반응이 미적지근하자 라리엘이 얼른 다시 입을 열었다.
“물론 절대로 실패하지 않으리라 확신할 수 있습니다. 자기 제작에 필요한 핵심 원료를 알아냈거든요. 이 원료를 발견하기만 한다면 자기 제작은 반드시 성공할 수 있어요. 원하신다면 관련 자료도 보내 드리겠습니다.”
많이 절박한 모양인지, 애써 태연하려고 가다듬는 표정조차도 흔들리는 눈동자를 감추진 못했다.
나는 조금 고민하는 척 우물쭈물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음, 좋아요. 후작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관심이 생기네요. 나중에 후작저로 사람을 보낼 테니, 더 자세한 이야기는 제 보좌관과 시간을 조율해서 나누면 좋을 것 같아요.”
어차피 자체 자기 생산은 언젠가 성공할 일이었고, 극 상류층을 제외한 중하급 귀족들은 아직도 도기를 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기의 시장은 무궁무진했다.
더구나 현재 자기를 생산할 수 있는 나라는 카헨 왕국밖에 없으니, 자기를 생산할 수만 있으면 수출을 통해서도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을 테고 말이다.
승낙이 떨어지자, 한층 더 환하게 웃음 지은 라리엘이 바지 위를 치마처럼 덮어 내린 옷자락을 잡고 나를 향해 살짝 다리를 굽혔다.
“감사합니다, 대공비 전하.”
“처, 천만에요…….”
“이런, 저는 이만 비전하를 놓아드려야겠습니다. 이대로 조금 더 전하의 시간을 뺏었다가는 뼈도 못 추리겠군요.”
내 뒤를 보며 나직이 혀를 찬 라리엘이 마지막으로 내게 인사를 건넸다.
“그럼 저는 해수 님의 연락만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미소 지은 라리엘은 몸을 돌려 인파 사이로 사라졌다.
‘세이룬에게 가지 않고 나에게 와서 사업 얘기를 한 건, 내가 진입 장벽이 낮아 보였기 때문일까?’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점점 멀어지는 라리엘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드레인 대공비 전하를 뵙습니다.”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얼른 뒤를 돌아봤다.
곱슬 기가 있는 갈색 머리카락에 암녹색 눈동자를 가진 한 남자였다.
나와 눈을 마주친 남자가 사람 좋게 웃으며 내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저는 회화 관련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에시타 자작 가문의 가주, 슈리스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에시타 자작님.”
“어이쿠, 자작‘님’이라니요! 황송하니 부디 존칭은 거두어 주시길!”
“아, 네…….”
내가 쭈뼛거리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편안한 웃음을 지은 슈리스가 내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비전하께서는 혹시, 그림 ‘위대한 타할린 호의 마지막을 배웅하며’를 아십니까?”
“……네, 알고 있어요. 현대의 천재 화가로 손꼽히는 스레인이 100여 년간 모국을 지켜 주었던 전함 타할린 호가 배로서의 수명이 다하여 고물상으로 예인되고 있는 모습을 그녀의 고유한 기법을 사용하여 그린 그림이지요.”
에리카의 몸에서 눈을 뜬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그때 들었던 교양 예술 수업에서 달달달 외웠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먼 과거를 좇는 눈이 절로 흐려졌다.
스레인의 모국인 제나 왕국은 아이테와 바다를 맞대고 있는 부유한 소왕국으로, 예로부터 아이테 출신의 해적단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이에 대비하고자 제나 왕국은 해군과 군함대를 증강시켜 해안선의 방비를 공고히 했는데, 타할린 호는 군함대 중 가장 공적이 뛰어난 함대였다.
그리고 스레인은 그 위대하고 아름다운 함대가 볼품없는 작은 배에 힘없이 끌려가는 모습을 캔버스에 담았다.
‘뭐라더라, 위대한 존재의 쓸쓸한 퇴장이 낭만적이라고 했었나…….’
배가 조각조각 해체되려고 가는 길이 대체 뭐가 낭만적이라는 건지는 아직까지도 의문이지만.
그렇게 잠시, 이곳에 와서도 주입식 교육의 노예가 되었던 시절의 나를 회상하고 있을 때였다.
슈리스가 감동한 얼굴로 두 손을 맞잡았다.
“역시! 소문처럼 비전하께서는 영민하고 똑똑하실 뿐만 아니라 미술에도 조예가 깊으시군요!”
“……네?”
순간, 나는 지금 내가 연기하고 있다는 것도 잊고 진심으로 반문했다.
똥 씹은 내 표정을 못 봤는지 아니면 보고도 무시하는 건지, 슈리스는 여전히 해맑게 웃는 얼굴로 넌지시 물어왔다.
“비전하께서는 스레인의 명작을 에인시아나 세사르에 걸고 싶지 않으십니까?”
*본 화에 등장한 그림 ‘위대한 타할린 호의 마지막을 배웅하며’는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의 그림 ‘해체를 위해 예인된 전함 테메레르(The Fighting Temeraire Tugged to Her Last Berth to Be Broken Up)’를 작품에 맞게 각색하여 묘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