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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박데기 영애의 반격을 조심하세요 (73)화 (73/139)

73화

“아니야, 카리에. 걱정해 줘서 고마워……!”

나도 카리에를 따라 웃으며 다시 카리에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이번에 카리에는 내 손을 떨쳐 내지 못하고 그저 호호 웃고만 있었다. 그래, 어디 한번 실컷 불편해 보라지.

“……대공께서는, 베이센 소공작의 티파티에서 반가면을 쓰고 오셨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오늘은 쓰고 오지 않으셨군요.”

급히 화제를 돌리듯 카리에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세이룬은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는 것처럼 내게로만 시선을 고정한 채, 카리에의 손을 잡고 있는 내 손을 부드럽게 가져가 그 위에 입술을 대었다.

“아무리 부인님의 손이 공공재라지만, 그렇다고 정말로 아무거나 닿게 두시면 어떡합니까.”

그 말이 내뱉어진 순간, 아닌 척 이쪽을 기웃거리던 귀족들이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순식간에 사방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번에는 칼릭스가 망해 버린 분위기를 되살리기 위해 다급히 입을 열었다.

“대공비께서는, 제 아내를 무척 잘 따르시나 봅니다.”

딱 봐도 칼릭스의 저 말은, 친하다고 알려져 있는 나와 카리에의 우애를 언급함으로써 방금 전 세이룬의 말이 악의적으로 카리에를 공격하려는 의도임을 우회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물론 칼릭스의 의도대로 일이 풀리게끔 순순히 따라 줄 리 없는 나는 칼릭스에게로 시선을 맞추며 의아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제가 카리에를 따르다니요?”

“대공비께서는 비의 사촌 동생이 아닙니까?”

내 물음에, 칼릭스가 오히려 의아한 듯 반문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아니에요. 카리에가 저의 사촌 동생이랍니다.”

“……아아, 그렇군요. 저는 당연히 비가 대공비의 언니인 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칼릭스의 금안이 카리에를 한 번 향했다가, 이어 근처에서 다른 귀족들과 함께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셀루리아 후작 부부에게 닿았다.

그 행동에서 나는 후작 가문 측이 나를 얼마나 카리에의 아래에 두려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아무리 태어난 일수가 아흐레밖에 차이 나지 않는다지만, 나를 카리에의 ‘언니’가 아닌 ‘동생’으로 여기게끔 수를 쓰다니.

‘거기다, 황가 측은 내가 셀루리아에서 학대당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나 보네.’

하긴, 그게 뭐 자랑할 만한 일이라고 제국의 주인이자 사돈 될 사람들에게 미주알고주알 알리겠어.

“……태어난 일수가 얼마 차이 나지 않아서, 언니 동생이라기보다는 그냥 친한 친구 같은 존재로 지내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누가 언니고 누가 동생인지 저희도 가끔 헷갈리더라고요. 그렇지, 에리카?”

차분히 변명을 내놓은 카리에가 나를 보며 눈웃음쳤다.

그 뻘뻘거림이 가상해서 나도 마주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줬다.

“응, 맞아. 우리, 정말 친한 친구처럼 지냈잖아.”

그 말에, 불현듯 움찔 어깨를 떤 카리에가 내 시선을 피했다.

“이, 이제 연회가 열리는 파니에 홀로 이동할 시간이지? 내가 너무 너를 잡아 뒀네. 에리카, 어서 가 있어. 다시 한번 와 줘서 고마워.”

공식적인 자리에서 티가 날 만큼 당황한 적이 없던 카리에가 당황했다.

횡설수설하듯 내게 인사한 카리에는 칼릭스와 함께 급히 자리를 떴다.

그 모습이 수상해서 눈을 가늘게 뜨고 두 사람의 뒷모습을 응시하고 있는데, 옆에서 세이룬이 슬쩍 내 손을 끌어당기고는 손목 안쪽에 촉 입을 맞췄다.

꽃문양이 새겨져 있는 바로 그곳에.

여린 살갗에 말캉한 입술이 닿자 온몸에 오싹함이 번져 갔다. 흠칫 놀라며 그를 돌아보자, 줄곧 나를 보고 있던 세이룬과 눈이 마주쳤다.

“드디어 마주쳤다.”

찬란한 빛깔의 눈동자가 곱게 접혔다.

늘 느끼는 감상이지만, 예쁘게 웃는 그 모습이 귀여워서 피식 웃어 버린 나는 그와 맞잡은 손에 힘을 주며 물었다.

“자, 그럼 이제 파니에 홀로 자리를 옮겨 볼까?”

* * *

“드레인 대공 전하와 대공비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안내인의 우렁찬 외침을 끝으로 육중한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나는 세이룬과 함께 회장 안으로 들어섰다. 예식이 끝나자마자 파니에 홀로 이동해 있던 귀족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와르르 쏟아졌다.

사람들의 반응은 단순했다.

가장 먼저 세이룬의 미모에 놀라고, 그다음으로는 내가 입고 있는 휘페리의 드레스에 놀랐다.

‘하긴, 예식이 진행됐던 화이트 홀에서 먼저 인사를 나눴던 셀루리아 후작 부부도 내 드레스를 보고 놀랐었지.’

황가 측은 내가 셀루리아의 귀염받는 조카딸인 줄로만 알고 후작 가문 몰래 레틸기스 즙으로 나를 조종할 생각인가 본데, 이미 레틸기스 즙은 셀루리아에서 질릴 정도로 먹어 대서 약빨이 떨어진단 말씀! 물론 통하지 않는 진짜 이유는 해맞이풀과 달맞이풀 덕분이지만.

‘오히려 셀루리아가 내 학대 사실을 황가에 털어놓으면 잘했다고 칭찬 들을 텐데.’

뭐, 그건 지들 사정이지 내 알 바냐.

어쨌든 결론적으로는, 황후의 바람대로 구교파 귀족들은 나와 세이룬을 보고 저들끼리 수군거리며 눈치 보기 바빴고, 신교파 귀족들은 머뭇거리며 나에게 접근하기를 꺼렸다.

덕분에 나는 세이룬과 둘만의 오붓한 연회장 데이트를 할 수 있었다.

“세이룬, 황가와 셀루리아의 처형 장소는 아까 그 화이트 홀로 하는 게 어때? 무척 어울릴 것 같은데.”

“좋은 생각인 것 같습니다.”

이런 시시콜콜하면서도 무척이나 기대되는 미래를 속삭이면서 말이지.

그렇게 하하 호호 웃으면서 세이룬과 달콤한 디저트를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을 때였다.

“어머, 에리카. 여기 있었구나.”

셀루리아 후작 부인이 혼자서 이쪽으로 다가왔다.

금세 싸늘해진 세이룬의 얼굴이 보이지도 않는지, 후작 부인은 여전히 사르르 웃음 지은 채였다. 나도 활짝 웃으며 그녀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후작 부인!”

“에리카, 정 없게 ‘후작 부인’이라니. 우리는 가족이니 그냥 외숙모라 불러도 된다고 몇 번이나 말했잖니.”

그런 적 없는데요.

주위의 시선을 의식해서 내뱉은 게 분명한 대사를 지껄이면서, 후작 부인이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에리카, 잠시 이 외숙모와 쌓인 회포를 풀지 않으련?”

“그건 안 되겠는데.”

내가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세이룬이 내 앞을 가로막으면서 싸늘하게 일갈했다.

흡사 후작 부인으로부터 나를 지키려는 모양새에, 후작 부인의 웃음에 금이 갔다.

“……전하께서 우리 에리카를 몹시 아끼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에리카에게도 가족과 정을 나눌 시간은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부인님의 가족은 나다. 구태여 추가하자면, 성 안의 사용인까지가 부인님의 가족이라 할 수 있겠지. 그러니 괜한 헛소리 말고 그만 비켜.”

얼음 칼날처럼 서늘하게 떨어져 내리는 세이룬의 목소리에 후작 부인이 일순 흠칫 어깨를 떨었다.

너무나도 맞는 말이라 세이룬의 말을 그대로 가만히 듣고만 있던 나는 문득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당황한 척 세이룬의 팔을 붙들었다.

“저, 전하! 그래도 제 외숙모이시잖아요…….”

“부인님.”

“전 괜찮아요. 가족 간의 정을 쌓는 거잖아요. 갔다 올게요.”

나는 방긋 웃으며 세이룬을 바라봤다.

잠시 나를 바라보던 세이룬은 이내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빨리 오셔야 합니다.”

“네, 빨리 올게요.”

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 뒤, 먼저 걸음을 옮기는 후작 부인을 따라갔다.

후작 부인이 향한 곳은 방음이 잘 되어 있는 2층의 휴게실이었다.

테라스 안에 들어가자마자 휘장을 친 후작 부인은, 이전 후작저에서 늘 그랬듯 경멸스러운 얼굴로 나를 휙 돌아보았다.

“―멍청한 것.”

“외, 외숙모……?”

“그 입 닥쳐!”

으르렁거리듯 내게로 성큼성큼 다가온 후작 부인이 오른손에 들린 부채의 끝부분으로 내 턱을 우악스럽게 들어 올렸다.

잔뜩 겁에 질린 눈으로 후작 부인을 바라보자, 그제야 분이 누그러진 듯 기세를 가라앉힌 후작 부인은 부채로 내 얼굴을 던지듯 놓았다.

“그동안 멍청하다, 멍청하다 했더니 공사도 구분 못 할 정도로 이렇게나 멍청할 줄이야.”

“죄, 죄송……”

“그래! 당연히 죄송해야지. 천한 피가 반이나 섞여 있는 주제에 대공가에 시집보내서 전하 소리 듣게 해 줬더니, 어떻게 이렇게까지 쓸모가 없을 수 있어?!”

후작 부인의 호통에 나는 잔뜩 겁을 집어먹은 것처럼 흠칫 어깨를 떨며 몸을 움츠렸다.

“보낸 서신에는 대답도 없어, 좋은 정보가 들어와도 연락도 안 해, 게다가 신교에 후원이라니! 셀루리아의 이름을 달고 대공가로 시집간 애가!”

분이 풀리지 않는지, 한동안 휴게실 창가 주변을 정신 사납게 돌아다니던 후작 부인이 이내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봤다.

“에리카.”

“네, 주인마님…….”

“내가, 너에게 계속 같은 말을 하게 하지 말렴. 나는 네 주인이고, 너는 내 하인이잖니. 아이에게 하듯 하인에게 명령을 찬찬히 일러 주는 주인은 세상에 없단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나는 비어져 나오려는 하품을 애써 삼키며 눈물 젖은 연기를 선보였다.

내 연기가 마음에 든 후작 부인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내게로 걸어왔다.

“에리카, 너에게 내릴 명령이 있단다.”

“네, 주인마님…….”

“해수로서의 일을 최종적으로 결재하는 것은 너라지? 추후 가문에서 네게로 하인을 한 명 보낼 거다. 앞으로 해수 관련 서류에 서명할 때는 그 하인을 항시 대동해서 그 말에 따르도록 해. 우리의 지시를 받고 행동할 하인이니.”

‘응, 싫어~’

“알겠습니다…….”

겉과 속이 다른 나는 고개를 푹 수그리며 알겠노라고 대답했다.

“또한, 당연한 말이지만 내 지시는 다른 그 누구에게도 알려져서는 안 돼. 알았느냐?”

“네, 주인마님. 절대로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게요…….”

내 대답에도 성이 차지 않았는지 후작 부인은 그 뒤로도 5번을 더 같은 대답을 하게 시켰고, 나는 대충 발연기를 곁들여 대답을 반복했다.

만족한 후작 부인이 한층 누그러진 얼굴을 하며 부채 끝으로 손을 한 번 톡 내리쳤다.

“이번에는 결코 실망시키지 말거라.”

“네…….”

“그럼 이제 나가지.”

그렇게 말하며 휘장 쪽으로 몸을 돌리려던 후작 부인의 시선이 문득 내 손목 리본에 새겨진, 휘페리 의상실을 뜻하는 ‘H’에 닿았다.

“……역시 멍청한 것.”

중얼거린 후작 부인이 착 하고 부채를 펼친 후 밖으로 나갔다. 우물쭈물하던 나도 황급히 후작 부인을 따라 휴게실을 나섰다.

나는 후작 부인의 뒤를 따라 걸으며, 겁에 질린 척 오들오들 떨면서 고개를 푹 수그렸다. 주위에서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고 있던 귀족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흘끔흘끔 닿아 오기 시작했다.

“저기, 셀루리아 후작 부인의 뒤에서 걸어가고 계시는 분이 대공비 전하시죠?”

“하지만 소문의 그분이라기엔, 베네로사 후작 가문에서 운영하는 휘페리 의상실의 드레스를 입고 계시는데…….”

“그보다, 전하께서 왠지…… 좀 주눅 들어 보이지 않나요?”

“헉, 그러면 설마 ‘그 소문’이 사실이었던 걸까요?”

“그 소문이라뇨?”

“못 들으셨나요? 왜 그 있잖아요, 저번 베이센 소공작님의 티파티에 참석했던 세스니아 백작 영식께서…….”

구교파 신교파 할 것 없이 남성에게서는 와인 잔 뒤로, 여성들에게서는 팔락이는 부채 뒤로 바쁜 속닥거림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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