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아…….”
그제야 나는 내가 숨도 멈춘 채 그와의 키스에 열중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이룬의 조언에 따라 숨을 쉬기 시작한 나는 입가를 엄지로 훔쳐 주는 세이룬에게 물었다.
“……어때? 지금도 아까 내 고백이 마음에도 없는 말인 것 같아?”
문득, 그의 손이 멈췄다.
“네가 정인으로 너를 좋아해 달라고 했지?”
“…….”
“이런 건 반려동물이랑 안 하잖아. 반려랑 하는 거지.”
내 입술을 향해 슬긋이 내리깔려 있던 눈동자가 다시 나를 향했다.
세이룬이 내 쪽으로 쓰러지듯 안겼다. 긴 흑빛 머리카락이 밤의 장막처럼 흘러내렸다. 목덜미에 닿아 오는 숨결이 뜨거웠다.
“……네, 맞아요.”
그가 그렇게 속삭이며 목에 입술을 대었다.
흠칫해서 몸을 파드득 떨자, 낮게 웃음소리를 낸 그가 다시 고개를 들어 나를 응시했다.
붉게 달아오른 눈가가 요망하게 휘어졌다.
“이런 건 반려와 하는 거죠.”
다시금 입술이 겹쳤다.
‘진짜’ 새해를 알리는 불꽃이 밤하늘을 화려하게 수놓기 시작했다.
창밖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사람들의 환호 소리가 아득히 멀어져 갔다.
황홀한 새해의 첫날이었다.
* * *
성혼식 당일 아침, 황후에게서 선물이 도착했다.
물론 순수한 선물은 당연히 아니고, 최근 구교파의 베네로사 후작 가문에서 무리하게 키우고 있는 신흥 의상실인(그래 봤자 에인시아의 위엄을 따라잡기엔 아직 한참 멀었지만) ‘휘페리’에서 만들어진 드레스였다.
‘이걸로 대공비는 우리의 수중에 있다고 대공에게 경고하는 것과 동시에, 에인시아의 주인인 ‘해수’가 휘페리의 옷을 입는 것으로 해수의 이미지를 실추시키려는 것이겠지.’
구교파 귀족들에게는 웃음거리가 되고, 신교파 귀족들은 해수를 경계하도록.
이런 게 바로 가성비 정치질이라는 걸까.
“어머, 저한테 이런 귀한 걸 내려 주시다니…… 반드시 입고 갈게요!”
나는 행복한 것처럼 한껏 화사하게 웃으며 두 손을 맞잡았다.
전령은 이제 대놓고 나를 무시하듯 대충 두어 번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공저를 떠났다.
전령이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나는 짓고 있던 웃음을 곧바로 던져 버리고는 곱게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엿이나 먹고 꺼져, 진짜.”
황후든 전령이든 쌍으로 재수가 없다.
“너네는 재수 말고 반수 해라. 첫 학기는 수능 공부한다고 결석해서 모조리 F 받고 다음 학기는 휴학해서 열나게 공부했는데 결국 수시 6광탈하고 정시는 수능 성적이 간당간당하게 나와서 3개 넣은 것 중 딱 한 군데에 예비 번호 겨우 받았다가 마지막 날의 마지막 시간에 전화 와서 기쁨에 겨워 받았더니 정치인 선거 홍보 전화여라.”
등록금은 등록금대로 들고, 학원비는 학원비대로 들고, 원서비는 원서비대로 들면서, 멘탈은 멘탈대로 팡팡 터지는 최악의 입시를 선사하고 싶네.
옷을 수선하지도 못하도록 바로 당일 아침에 보내는 센스에 감격한 대가로 말이다.
“어떻게 황후라는 자가 기본 상식 머리도 없이 당일 아침에 불쑥 전령을 보낼 수가 있죠?”
이미 단단히 여며져 있는 숄을 한층 더 꼼꼼히 여며 주며 포카가 분개했다. 옆에서 등롱과 드레스 상자를 들고 있는 레비나는 전령이 나간 대문 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포카와 레비나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응, 예의를 밥 말아 먹어서 그래.”
“저자를 죽이면…… 비전하께서 많이 곤란하실까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 레비나가 올망올망한 눈으로 허락을 구하듯 나를 보았다. 나는 흐린 눈을 뜨고 레비나를 바라봤다.
‘너는 살벌한 말을 왜 그렇게 애처롭게 하고 있는 것이니.’
수인족이라니까 그 말이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나는 안 된다고 진지하게 못 박은 후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성혼식은 오후에 시작되지만, 준비는 아침부터 빡세게 들어가는 것이 연회 준비의 정석이었다.
나는 피곤한 얼굴로 대충 식사를 해치운 후, 황후가 보내 준 드레스를 중심으로 콘셉트를 다시 준비했다.
* * *
성혼식은 황궁의 대형 연회장 중에서 가장 크고 웅장한 화이트 홀에서 진행되었다.
내빈객들은 구교파와 신교파 할 것 없이 참석하여 규모가 엄청났고, 차기 황제의 성스러운 결혼식을 축복하기 위해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부었다.
그리고 그것이 끝이었다.
그러니까, 이건 그냥 돈 많고 권력 많은 사람의 결혼식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는 소리다.
‘신분이 높다고 결혼식 도중에 천사가 강림해서 노래 부르고 요정이 축복을 내리고 그러지는 않잖아?’
물론 화이트 홀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백색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홀은 곳곳에 금과 다이아몬드로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어 무척이나 아름다웠고, 신랑과 신부의 의복은 억 소리가 날 만큼 무척이나 값비싼 것이었으며, 귀빈으로 참석한 자들은 하나같이 명성이 자자한 대귀족이었지만, 고작 그 정도로는 차별성을 갖추긴 어려웠다.
그 이유 중 하나로, 내가 결혼식을 올렸던 대공성의 세레니티 홀이 이 화이트 홀보다 더 웅장하고 고풍스러웠다는 것을 들 수 있겠다.
어쨌든, 지금 중요한 것은 이 결혼식이 정말이지 지루해서 죽을 것 같다는 거였다.
구교파의 핵심 인사 둘의 결혼식이라고 어찌나 근엄하고 성스럽고 정숙하게 준비를 했는지, 고루하다 못해 하품이 절로 나올 지경이라 애꿎은 허벅지만 열심히 뚜들겨 맞았다.
‘눈 뜨고 자는 방법이라도 배워 둘 걸 그랬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갖다 버리는 시간이 너무 아까워서 속이 탔다.
남아도는 시간에 멜로디 구상이나 할까 싶어도, 근처에 셀루리아 후작 부부가 뙇 하고 앉아 있는데 이 더러운 기분으로 좋은 멜로디가 나올 리 없어 포기했다.
음식물 쓰레기조차 재활용이 가능한데, 이 사람들은 도대체가 쓸모 있는 구석이 한 군데도 없었다.
‘……아냐, 에리카. 괜찮아. 지금 이 순간에도 대공령에서 기술자와 학자들이 열심히 인쇄술 연구에 매진하고 있어.’
그렇게 생각하니 답답했던 마음이 놀랄 만큼 차분해졌다.
역시 사람은 뭔가를 하면서 살아야 한다.
“……이로써, 카리에 르 셀루리아 소후작께서 카리에 르 이렌텔 황태자비 전하가 되셨음을 선언합니다.”
성혼식의 주례를 보는 구교 교황의 선언에, 예법에 따라 카리에의 아버지인 셀루리아 후작이 자리에서 일어나 외쳤다.
“소신, 셀루리아 후작이 이렌텔의 황태자비 전하를 뵙습니다!”
그가 카리에를 향해 허리를 굽히는 것을 시작으로, 앉아 있던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후작의 말을 복창했다.
“이렌텔의 황태자비 전하를 뵙습니다!”
“이렌텔의 황태자비 전하를 뵙습니다!”
나도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자리에 일어나 카리에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다시 고개를 들자, 왠지 모르게 이쪽을 빤히 응시하고 있던 카리에가 빙긋 웃었다.
환희에 가득 찬 미소였다.
‘……나한테서 인사받은 게 그렇게 좋나?’
아니면 왜 저렇게 웃는 건데, 소름 돋게.
겉으로는 방긋방긋 웃고 있어도 속으로는 읅 하며 난리 블루스를 치고 있는데, 문득 옆에 있던 세이룬이 내 귓가로 고개를 숙였다.
그 자세 그대로 그가 속삭였다.
“……제국의 황태자비쯤 되면, 기꺼이 두 눈이 되어 줄 자가 많을까요?”
“음? 그렇겠지?”
차기 권력의 중심축 중 하나이니 당연히 카리에도 수많은 첩자를 부리겠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세이룬을 돌아보자, 그가 기쁜 듯 활짝 웃으며 이어 말했다.
“그럼 저 건방진 두 눈은 제거해 버려도 상관없겠군요.”
“……우리 샤샤, 착하지? 착한 성인은 눈 함부로 뽑고 그러는 거 아니야.”
“함부로는 아닙니다…….”
세이룬이 시무룩한 목소리로 웅얼거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길고 섬세한 속눈썹 아래로 짙은 음영이 진 까닭에, 지금 세이룬은 수심에 가득 찬 한 떨기 가녀린 미인 같아 보였다.
“……아무리 예쁘게 칭얼거려도 그건 안 돼.”
“…….”
“대신 복수할 때 네 의견도 적극 반영할게.”
세이룬도 카리에에게 목숨을 잃을 뻔한 피해자이니 당연한 말이긴 했다.
다행히도 내 말에 만족한 세이룬은 생긋 미소 지었고, 나는 ‘세이룬의 미인계: 수심편’에서 간신히 벗어날 수 있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돌렸다.
공교롭게도 시선을 돌린 곳에는, 후작 부부와 인사를 나눈 뒤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황태자 부부가 있었다.
아, 내 눈.
“안녕, 에리카? 오늘 성혼식에 와 줘서 기뻐.”
칼릭스 황태자의 손을 잡고 내 앞까지 걸어온 카리에가 화사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황태자 부부와 대공 부부의 만남을 흥미롭게 여긴 귀족들이 슬금슬금 이쪽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의 따끔거리는 시선을 느끼며, 나도 활짝 웃는 얼굴로 카리에의 두 손을 덥석 잡았다.
“응, 나도 너무 기뻐! 황태자비가 된 거 축하해……!”
내 말에, 불현듯 카리에의 웃음이 미묘하게 굳었다.
이어 다시 부드럽게 웃은 카리에가 내 손에서 제 손을 빼내며 말했다.
“에리카, 아무리 내가 반갑다 하더라도 예법은 지켜야지.”
“예법?”
“응. 이제 나는 황태자비인걸. 나는 괜찮지만, 네가 괜한 구설에 휘말릴까 봐 걱정돼.”
“……아아.”
나는 곧바로 감을 잡았다.
카리에는, 지금 내 위에 서고 싶은 것이다. 온 귀족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그럼 당연히 그렇게 못 하도록 해 줘야지.’
누구 좋으라고. 나는 난처한 얼굴로 두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렇지만…… 네가 먼저 나한테 하대를 했잖아? 근데 내가 너에게 공대를 하면, 사람들이 너를 예법도 모르는 무식한 사람이라고 욕할 거야. 넌 이제 황태자비니까, 사람들 시선이 중요하잖아…….”
“뭐? 그게 무슨―”
“카리에랑 나는 둘 다 ‘전하’인걸. 공대를 하려면 상호 공대를 하는 게 옳으니까…….”
아차 싶었는지, 카리에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아까 내가 저한테 고개 숙인 걸로 저가 내 위에 있다고 단단히 착각하고 위풍당당하게 온 것이 분명했다.
‘꼬우면 황후가 되고 말하시든가요.’
그래 봤자 바로 폐후로 만들어 버리겠지만 말이다.
속으로 히죽 웃은 나는 여전히 안절부절못하는 것처럼 울상을 지었다.
꽉 쥔 주먹을 풍성한 치맛자락 속에 감춘 카리에가 다시금 생긋 웃음 지었다.
“……역시 나를 생각해 주는 건 에리카밖에 없어. 하나밖에 없는 사촌이 혹시라도 곤경에 처할까 봐 걱정되어서 그만, 내가 성급했지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