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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박데기 영애의 반격을 조심하세요 (71)화 (71/139)

71화

그가 숨을 다시 내뱉은 것은, 내가 그의 눈가리개를 스륵 풀었을 때였다.

“이제 네 눈 봐도 아무도 뭐라고 할 수 없겠다.”

나는 활짝 웃으며 손에 든 눈가리개를 휙 뒤로 던져 버렸다.

그러고는 담백하게 상체를 바로 세웠다.

“아…….”

왠지 아쉬운 것처럼 흔들리던 금빛 은빛 눈동자가 아래로 내리깔렸다.

반지를 꺼내기 위해 곧장 고개를 숙였던 나는 세이룬의 반응을 보지 못하고 반지 케이스를 꺼냈다.

“자, 세이룬. 왼손 줘 봐.”

“왼손……?”

의아한 목소리로 되물은 세이룬은 이유도 묻지 않고 내게 왼손을 내밀었다.

나는 케이스를 열어서 군청색 사파이어 두 개가 달린 반지를 꺼냈다.

반지를 본 세이룬의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

“반지…….”

그렇게 중얼거리던 세이룬의 뺨이 불그스름하게 물들었다. 그의 입가에 수줍은 듯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 사파이어는 꼭 에리카의 눈을 닮았습니다. 정말 예뻐요.”

“응. 그리고 내 거는 네 눈동자와 비슷하게 만들었어.”

나는 다른 케이스에서 내 반지를 빼낸 뒤 세이룬에게 보여 줬다.

내가 보여 준 반지를 보고 작게 웃음 지은 세이룬이 시선을 들어 나를 보았다.

“에리카의 반지는 제가 끼워 드리고 싶습니다.”

“좋아. 네가 끼워 줘.”

나는 반색하며 세이룬에게 반지 케이스를 건네주었다.

케이스를 받아 든 세이룬이 조심스럽게 반지를 꺼내 내 왼손 약지에 맞춰 끼워 주었다.

시원한 감촉이 손가락을 느릿하게 쓸어 가다가 안쪽에 자리 잡았다. 내 손가락에 끼워진 금빛 은빛 보석의 반지를 만지작거리던 그가 천천히 내 손을 당겨 반지 위에 입을 맞췄다.

옅은 숨결이 손가락에 닿았다. 그 순간, 나는 여린 살갗에서 느껴지는 야릇함에 당황해서 파드득 손을 빼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내 손을 놓친 채로 굳어 있는 세이룬의 의식을 환기시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눈동자를 굴리던 나는 적당한 질문을 하나 떠올리자마자 서둘러 입을 열었다.

“바, 반지는! ……마음에 들어?”

내 질문에, 눈동자를 들어 나를 바라본 세이룬이 입술만 들어 올려 미소 지었다.

“……굳이 절 위해서 애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 아니 나는 그냥 궁금해서―….”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너무 예쁜 반지입니다. 감사합니다.”

“…….”

망했다. 이건 그냥 세이룬의 말도 제대로 귀담아듣지 않은 사람이잖아!

나는 아까보다 더 당황해서 눈동자를 굴리다가, 이번에는 좀 더 적절한 말을 떠올리고는 다시 다급히 입을 열었다.

“조, 좋아해 줘서 다행이야. 너도 알다시피 셀루리아 저택에 있었을 땐 내가 힘없는 미성년자라서 너한테 아무것도 못 해 줬잖아. 그게 너무 속상해서 해수의 힘만 되찾으면 네게 이것저것 많이 해 주고 싶었거든!”

“……샤샤에게, 말입니까?”

“응! 샤샤에게!”

“요컨대, 이 반지는 소중한 반려동물에게 주는 반지라는 말씀이시지요…….”

서러운 듯, 그렇게 중얼거린 세이룬이 입술을 꼭 깨물고는 시선을 피했다.

그 반응에, 나는 직감적으로 내가 말을 잘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중한 반려동물이라니…….’

내가 친구들에게서 눈치 없다는 말을 좀 듣는 편이긴 했지만, 이쯤 되면 내 입은 그냥 재앙의 문이 아닐까.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나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이 망해 버린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머리가 터져라 고민하고 있는데, 문득 세이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리카는, 저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 어?”

예상치 못했던 물음에, 나는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다른 곳을 향하고 있던 세이룬의 시선이 다시 나에게 닿았다. 서러움을 참아 내는 것처럼, 그의 눈가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저는 그대를 좋아합니다.”

알고 있었다.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 나온 말에, 나는 그대로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그대를, 정인으로서 좋아해요.”

“…….”

밀랍을 발라 굳히기라도 한 것처럼,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다는 듯, 그가 눈동자를 슬긋 내리깔고는 이어 속삭였다.

“그대를 줄곧 그려 왔습니다. 그리고 그리다가, 한 번이라도 그대를 눈에 담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이 두 눈에 그대가 늘 담겼으면 좋겠고, 나중에는 그 시선이 나를 향했으면 좋겠고, 결국에는 나만을 향했으면 좋겠고…….”

“…….”

“……끝내는 나를 원했으면 좋겠어요. 이것이 제가 그대를 좋아하는 감정입니다.”

그가 다시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려 내 눈동자를 응시했다.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 버렸다. 나를 곧게 응시하는 그의 눈동자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러니, 부디―…”

내게로 천천히 손을 뻗은 세이룬이 한 손으로 내 뺨을 스치듯 매만졌다.

그러다가, 무너지듯 상체를 기울여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제가 에리카를 좋아하는 것처럼, 아주 조금만이라도 그렇게……”

“…….”

“……그렇게, 저를 좋아해 주세요.”

그가 울듯이 애원했다.

내 숨마저 막힐 듯한 거센 심장 고동이 맞닿은 옷깃으로 전해져 왔다. 닿아 오는 감정이 무척이나 달콤하면서도 묘하게 낯설어서, 나는 나도 모르게 세이룬의 옷자락을 꾹 움켜쥐었다.

“잠깐, 나 숨…….”

반사적으로 입술을 달싹였지만, 목이 꽉 막힌 듯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몇 번 더 그렇게 입술을 달싹이다가, 결국 도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심장이, 정말 말 그대로, 터질 것처럼, 뛰어대서―

“……좋아합니다.”

“어떻게 말해야 이 마음을 온전히 전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을 만큼…… 정말 많이 좋아합니다.”

그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내게 감정을 숨긴 적이 없었다.

그토록 절절하게 말로, 온몸으로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가 샤샤라는 걸 몰랐을 때라면 몰라도, 샤샤라는 걸 알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모를 수 있겠어.

‘……다 알고 있는데, 이놈의 심장은 왜 이렇게 요란하게 뛰어 대는 거야.’

어쩔 수 없는 조건 반사에,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내 한숨을 들은 세이룬이 움찔 몸을 떨었다. 혹시라도 내가 질려 하는 건 아닐까 바들바들 떠는 것이 짠했지만, 예상치 못한 곳에서 불쑥 들려온 그의 애원에 심장 떨려서 말도 제대로 안 나오는 나도 짠하긴 마찬가지였다.

나는 아직까지도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는 세이룬을 천천히 떼어 낸 다음, 두 손으로 그의 두 뺨을 감싸고 나와 시선을 맞추게 했다.

“……반려동물에게 키스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잖아.”

숨을 내뱉듯 속삭인 내 말에, 세이룬의 두 눈이 커졌다.

나는 느릿하게 숨을 내쉬며 말을 이어 갔다.

“고작 이틀 안 봤다고, 네가 미치도록 보고 싶었어.”

“…….”

“네 입술을 볼 때마다 키스하고 싶단 생각이 떠올라. 너한테 볼 키스 받았던 그날엔 심장이 하도 시끄럽게 울려 대서 잠도 못 잤어. 너랑 합방하는 날에는 네가 신경 쓰여서 제대로 자지도 못해.”

“…….”

“손가락에 네 숨결이 닿으면 가슴이 울렁거려. 네가 다른 사람이랑 결혼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정말이지, 기분이 너무나도 엿 같아서 속이 뒤집혀.”

“…….”

“나 너를, 이렇게 좋아하고 있어.”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그 침묵 동안 내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하던 그가 이내 희미하게 웃었다.

“……괜히 저 때문에 마음에도 없는 말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에서는 왠지 모를 아련함이 감돌고 있었다.

오글거림을 무릅쓰고 내 진심을 그에게 고백했던 나는 한순간에 허탈해져서 그를 바라봤다.

“저기, 음, 나 거짓말 안 했는데. 선의의 거짓말도 아닌데.”

“전 괜찮습니다. 에리카가 절 걱정해 주는 것만으로도 기쁜걸요.”

“아니, 진짜라니까. 나도 너 정인으로 좋아해.”

“저도 정말로 괜찮습니다. 에리카가 저를 정인으로 좋아할 수 있도록, 제가 더 노력하겠습니다.”

“…….”

나는 눈을 흐리게 뜨고는 비장하게 다짐하는 세이룬을 바라봤다.

“거봐요. 세이룬, 괜히 저 위한답시고 마음에도 없는 말 하지 않아도 돼요.”

그때의 업보를 지금 이렇게 돌려받다니, 모두 내 부덕의 소치였다.

‘내가 그렇게 믿음이 없었나……?’

나도 나름 마음을 표현한다고 한 건데 그 모든 게 반려동물에게 보이는 애정처럼 보였단 말이지…….

물론 내가 미자 신분이라 과도하게 조심한 것도 있고, 낯간지러운 분위기를 어색해하고 간질간질한 감각을 잘 못 견뎌서 분위기를 싸하게 만든 적이 몇 번 있기는 한데, 인간적으로 그건 정상 참작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안 그래도 그런 데 면역이 전무한데, 심장이 진짜로 터져 버리면 누가 책임질 거냐고.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나는 두 손을 뻗어 세이룬의 얼굴을 감싸 쥐고는 그와 눈을 맞췄다.

순식간에 나와 지척에서 눈을 마주하게 된 세이룬이 급히 숨을 들이켰다.

“세이룬, 여기서 더 노력하면 나 심장 터져서 죽어.”

“아,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괜히 저 때문에―…”

“―마음에도 없는 말 하지 말라고?”

“…….”

자신이 하려던 말에 지레 상처받은 것처럼 움찔한 세이룬이 나와 눈을 피하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엄지로 그의 뺨을 슬쩍 쓸어내리면서 고개를 기울였다.

“그럼, 내 고백이 마음에 있는 말인지 없는 말인지 한번 확인해 볼까?”

“네? ……읍.”

나는 그대로 그의 입술에 내 입술을 겹쳤다.

과거 상상했던 대로, 세이룬의 입술은 말캉하면서도 따스했다. 내가 불현듯 숨을 들이켠 것은,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

주도권을 쥔 사람이 바뀌었다.

내 뒤통수를 강하게 움켜쥔 그가 각도를 틀며 내 입술을 삼켰다. 두 사람의 호흡이 섞였다. 달콤한 소리가 주위를 가득 메웠다.

“……숨,”

한동안 무아지경으로 그와 키스를 하던 도중, 돌연 그가 입술을 떼고 속삭였다.

빨리 다시 이어 갔으면 하는 마음에 열에 취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자, 그가 옅게 미소 지으면서 내 입술을 엄지로 훔쳤다.

“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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