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속삭이듯 중얼거리자, 옆에서 물끄럼한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왠지 민망한 기분에 애써 쾌활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음, 이제 4번째 공연이 시작하려 하나 보다. 우리는 빨리 나가자.”
마침 건너편에서 직원 한 명이 4번째 공연 관람자인지 확인하기 위해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세이룬을 데리고 얼른 천막 밖으로 빠져나갔다.
* * *
불꽃놀이는 해가 바뀌는 것과 동시에 시작했다.
나는 자정이 되기 전에 세이룬과 함께 호텔 체크인을 마치고 예약해 뒀던 귀빈실로 향했다.
막힘없이 술술 이어지는 나의 행동에 세이룬이 얼떨떨한 목소리로 물었다.
“미리…… 준비해 두신 겁니까?”
“응. 세이룬과 데이트하고 싶어서 꼼꼼히 준비했어.”
“아…….”
세이룬이 수줍은 듯 볼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소리 내어 웃은 나는 이내 걸음을 옮겨 창가에 자리한 티테이블로 다가갔다.
‘와, 여기가 괜히 에이리트 최고의 호텔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구나.’
한쪽 벽면에 큼지막하게 달려 있는 유리창 너머로, 밤거리는 별빛을 흩뿌린 듯 온갖 램프들로 반짝반짝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찬란함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정신없이 밖을 구경하던 나는 충분히 구경을 마친 다음에야 고개를 돌려 방 내부를 한 번 훑어봤다.
웅장하면서도 고급스럽게 꾸며져 있는 내부는 고위 귀족들의 방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무척이나 화려했다. 방을 장식하는 가구나 물건은 모두 최상급이었고, 간단한 핑거푸드와 함께 마실 수 있도록 비치된 음료 또한 아무나 먹을 수 없는 고급 음식이었다.
방과 연결되어 있는 테라스는 심플한 정원을 옮겨 놓은 것처럼 꾸며져 있었는데, 밤에도 산책이 가능하도록 유리등 모양의 램프들이 바닥에 종종히 놓여 있었다. 물론, 지금은 겨울이니까 테라스의 풍경은 다소 삭막했다.
내부를 천천히 훑은 시선이 내 앞으로 다가온 세이룬에게 닿았다.
내 시선을 눈치챈 세이룬이 빙긋 웃으며 들고 있던 트레이를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선반에 있어서 가져왔습니다.”
“아, 고마워.”
마침 조금 출출했던 터라, 나는 반색하며 마카롱을 하나 집어 먹었다.
내가 마카롱을 냠냠 해치우고 있을 동안 맞은편에 앉은 세이룬이 내게 물었다.
“에리카, 멜 드시겠습니까?”
멜은 꿀에다가 여러 가지 허브나 과일즙 또는 향신료를 넣어서 섞은, 혀가 아릴 정도로 달콤한 음료였다.
“응, 마실래.”
이왕 비싼 호텔에 온 거, 이런 것도 안 마셔 주면 분위기가 서운해하겠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생긋 미소 지은 세이룬이 단정한 동작으로 유리잔에 멜을 따랐다.
쪼로록, 멜이 잔에 부딪치는 소리가 달았다. 그 소리를 감상하며 마카롱을 먹고 있던 나는 불현듯 내 주머니 속에 고이 잠들어 있는 반지의 존재를 떠올렸다.
‘맞다, 반지!’
애초에 데이트를 신청한 이유가 반지를 주기 위함이었는데, 하마터면 주객이 전도될 뻔했다.
나는 슬쩍 손을 주머니 속으로 집어넣으며 반지 케이스를 만지작거렸다. 한번 반지가 의식되고 나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평화로웠던 기분은 순식간에 긴장감 속으로 빠져 버렸다.
‘그러고 보니, 나 반지 줄 세부 계획은 짰었나?’
그런 거 없었다. 계획이라고는 그냥 ‘데이트 신청해서 축제를 즐긴 다음 불꽃놀이 보면서 반지 선물하기’가 다였다.
‘으아아…….’
갑자기 입맛이 뚝 떨어졌다. 대신 목이 탔다.
마지막 남은 마카롱 조각을 마저 먹은 나는 세이룬이 건네주는 멜을 곧장 입으로 가져갔다.
“에리카……?”
세이룬이 흔들리는 목소리로 나를 불렀지만, 나는 대꾸할 틈도 없이 멜을 그대로 원샷했다.
포도당이 몸속으로 들어가니까 확실히 아까 전보다 정신이 또렷해진 것 같았다.
‘아닌가? 너무 달아서 정신이 나가고 있는 건가……?’
뭔가 피가 빨리 도는 것 같고, 아까 전까지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기이한 자신감까지 쥐콩 정도는 생긴 것 같기도 하고.
“음, 멜 맛있네. 나 한 잔 더 줘.”
“……곧장 또 마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힘차게 빈 잔을 내밀자, 세이룬이 다소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물론 그의 걱정대로 혀가 마비되는 것처럼 아릿하긴 했지만, 지금 나는 내 정신을 맑게 해 주면서도 나가게 해 줄 이 역설적인 음료가 필요했다.
“그냥 오늘이 좋은 날이라 그런가, 멜이 잘 넘어가네. 하하.”
“멜을 좋아하신다면 내년부터 영지에서 꿀을―”
“응, 그거 아냐…….”
나는 흐린 눈으로 중얼거리며 세이룬이 새로 따라 준 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멜을 홀짝이며 시간을 확인하자, 정각이 되기까지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다. 5분도 안 남은 것 같은데.
시간이 임박하자 갑자기 초조함이 몰려왔다. 남은 멜을 마저 벌컥벌컥 들이켠 나는 조금 더 상승한 자신감을 안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이룬―!”
그러고는 곧장 세이룬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알코올 덕분에 빨라진 심장 박동은 내 행동을 더욱 거침없게 만들어 주었다. 나는 나를 바라보는 세이룬에게로 상체를 기울인 뒤, 그의 의자 등받이에 두 손을 얹었다.
작게 멍하니 벌어진 그의 입술을 보아하니, 상당히 놀란 게 틀림없었다.
“에리카……?”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나는 최대한 멋들어지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내가, 주고 싶은 게 있어.”
“주고 싶은 것이요?”
“응, 주고 싶은 거.”
“그게 무엇입니까?”
“그건…….”
“…….”
“…….”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새하얗게 질린 머릿속을 주체할 생각도 못 한 채 의아함이 가득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세이룬을 내려다봤다.
‘불꽃놀이…… 곧 할 때가 아니었나?’
긴장과 초조함은 미리 정해 놨던 기본 계획이 틀어지자 ‘그냥 바로 선물한다’라는 간단한 대안조차 떠올리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나는 동공을 세차게 흔들다가 슬쩍 시선을 돌려서 시간을 다시 확인했다.
분명 아까 전까지 12시가 5분도 남지 않은 시각을 가리키고 있던 시계는, 어이없게도 11시 5분이 채 되지 않은 시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대체…… 대체 저걸 어떻게 잘못 봤지……?’
긴장 풀려고 포도당을 섭취했더니, 그 포도당이 내 시신경과 대뇌에 농간을 부렸나!
“망했다…….”
어떡하지? 앞으로 1시간 가까이 이러고 있어야 하나?
“에리카.”
“어? 어, 어?”
동공뿐만이 아니라 뇌까지 열심히 흔들던 나는 나를 부르는 세이룬의 목소리에 흠칫 놀랐다.
“주실 게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 아…… 으응…….”
“혹시 주기 아까워지셨습니까?”
세이룬이 서운한 듯 풀 죽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 망해 버린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던 나는 그 목소리에 흠칫 놀라서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아니! 설마! 그럴 리가!”
“그렇다면 왜 주지 않으시는 겁니까…….”
그렇게 묻는 목소리의 끝부분이 조금 떨렸다. 웃음을 제대로 갈무리하지 못한, 바로 그 떨림이었다.
그로 인해 세이룬이 지금 장난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나직이 숨을 내쉬며 그 자리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역시 인생이란 뜻대로 되지 않는 법인가 봐…….”
나는 세이룬의 허벅지에 턱을 올려놓고 중얼거리다가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그 순간, 불현듯 딱딱하게 굳은 그가 곧장 손을 뻗어 나를 들어 올린 뒤 제 무릎에 앉혔다.
순식간에 높아진 눈높이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이룬?”
“……에리카의 미움을 받고 싶지 않은데,”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떨리는 숨을 내뱉은 그가 천천히 무너지듯 내 어깨 위에 제 얼굴을 묻었다.
“그런데 그대로 있다가는, 미움받을 것 같아서요…….”
“미움? 내가 왜 널 미워해?”
“…….”
세이룬은 대답 없이 나를 더욱 꼭 끌어안기만 했다.
가까워진 심장께에서 빠르게 약동하는 심장 고동이 느껴졌다. 나는 왠지 낯간지러운 느낌에 어색하게 시선을 굴렸다.
손발이 절로 오글거려서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 꼼질꼼질한 어색을 참지 못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주고 싶다고 한 거 있잖아. 원래 불꽃놀이 할 때 선물을 주려고 했거든.”
“…….”
“근데 내가 시간을 잘못 봐서 아까 당황했어.”
그의 얼굴이 맞닿은 어깨로 옅은 웃음이 전해져 왔다. 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툴툴거렸다.
“부끄러우니까 웃지 마.”
“하지만, 에리카가 너무 귀여워서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는걸요.”
“……반어법도 쓰지 마.”
나는 소름이 쫙 돋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다시금 키득키득 웃은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그럼, 불꽃놀이만 시작되면 되는 겁니까?”
“응? 응, 그렇지?”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빙긋 미소 지은 그가 한 손을 슥 들어 올렸다.
그와 동시에, 예전 구름빵을 만들어 줬을 때의 그 연기를 닮은 해인이 공기 중을 몽글거리다가 스르륵 사라졌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해인이 사라진 공간을 바라봤다. 세이룬이 내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창밖을 보세요.”
“창밖?”
의아하게 되물으면서 세이룬을 돌아보자, 그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커다란 창을 눈짓했다.
그 눈짓에 따라 창밖으로 시선을 준 나는 불현듯 멍하니 탄성을 터뜨렸다.
“와…….”
별빛만 가득했던 밤하늘에, 빛으로 만들어진 폭포가 우아하게 흘러내리다가 소리 없이 사라져갔다.
“불꽃놀이가 시작되었습니다, 에리카.”
멍하니 빛의 폭포를 감상하는 내게 세이룬이 기대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의 저의가 잠시 이해되지 않아서 두어 번 눈을 깜박이던 나는 이내 푸핫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지금 선물 받고 싶어서 일부러 불꽃놀이 시작한 거야?”
“에리카가 절 위해 준비하신 거잖아요. 그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었어요.”
세이룬이 어리광 부리듯 속삭였다. 나는 피식 웃으며 세이룬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세이룬, 불꽃놀이가 시작하는 건 새해 첫날이잖아.”
“……에리카?”
“그럼, 우리 드디어 성년자인 거네?”
순간, 세이룬이 불현듯 숨을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