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내 대답에 만족한 그가 제1기사단장을 돌아보며 말했다.
“보고는 끝났으니 이만 나가라.”
“하지만 주군, 아직―….”
“끝났다.”
“……하지,”
“끝났어.”
세이룬이 냉정하게 기사단장의 말을 끊어냈다. 시무룩해진 기사단장이 “알겠습니다……”하고 나와 세이룬에게 인사한 뒤 밖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그 커다란 덩치가 어깨를 축 늘어뜨린 모습이 왠지 짠하게 느껴졌다.
‘진짜로 다시는 보고 중간에 찾아오지 말아야겠다.’
나라고 세이룬이 보고 받던 중간에 다 때려치우고 무작정 나올 줄 알았나…….
나직이 폭 하고 한숨을 내쉬는데, 세이룬이 기대감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얼굴로 내게 물어왔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아…… 별 건 아니고, 그냥 너한테 데이트 신청하려―…”
“좋아요.”
……고. 말을 채 끝까지 잇기도 전에 세이룬이 냉큼 대답했다.
“데이트는 언제 가는 겁니까?”
그리 묻는 목소리는 차분하기 그지없는데, 내 손을 찾아 쥔 손은 들뜬 기분을 감추지 못하고 잔뜩 힘을 주고 있었다. 나는 키득키득 웃으면서 말했다.
“옷만 갈아입고 바로 출발하자.”
* * *
옷은 적당히 평범하면서도 솜이 잔뜩 들어간 따뜻한 의복을 입고 나왔다.
호텔에 말을 맡기고 수도의 광장으로 가니, 노을이 지기 시작한 광장에는 벌써부터 노점 곳곳에 달린 노란색 램프들이 하나둘씩 밝아지고 있었다.
광장을 가득 채운 인파들은 저마다 웃으며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고, 상인들은 한몫 잡을 수 있는 이때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적극적으로 고객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와, 이런 축제 분위기 진짜 오랜만이다.”
나는 멍하니 중얼거리며 입고 있던 클록 자락을 더욱 꼭 움켜쥐었다. 마지막으로 축제에 간 게, 죽기 전 시험 끝나고 갔던 불꽃 축제였던가?
‘그때 신아한테 큰맘 먹고 알바해서 번 돈으로 커다란 닭꼬치랑 소떡소떡이랑 슬러시 사 줬었는데.’
음, 이렇게 죽을 줄 알았으면 그때 그냥 물주 노릇 좀 제대로 할 걸 그랬다.
“이전에도 이곳에 와 본 적이 있습니까?”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던 세이룬이 나직이 물어왔다.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는 그동안 계속 저택 골방에 갇혀 있었는데 어떻게 와 보겠어.”
“그럼……?”
“한국에서 밤 축제에 가 본 적이 있거든. 분위기가 비슷해서.”
“그렇습니까.”
세이룬이 알겠다는 듯 가볍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세이룬은 내가 한국에서 살았다느니, 여기가 소설 속 세계라느니 하는 말에 한 번도 의문을 표한 적이 없었다.
‘그게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나?’
나 같으면 속으로 ‘아 이 사람 정신이 많이 아프구나’하고 생각한 다음 말없이 손절했을 텐데.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샤샤는 이상하게 생각 안 해?”
“무엇을 말입니까?”
“나 이상한 말 많이 했잖아. 한국에서 살다가 죽었다느니, 눈을 떴더니 친구가 구상한 소설 속 세계였다느니 하는 거 말이야. 안 이상해?”
내 물음에, 세이룬은 이상한 것을 다 묻는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당신이 해 준 말이잖아요.”
“뭐?”
“혹시 저를 속이려고 일부러 그런 말을 지어내셨습니까?”
그리 묻는 세이룬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담백해서, 나는 되레 내 물음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아니, 그럴 리가.”
“그런데 제가 왜 그 말을 이상하게 생각할까요.”
그가 다시금 웃었다.
나는 그 웃음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이 이런 비슷한 말 하면서 보증 서 달라거나 물건 강매하거나 해도, 절대로 넘어가면 안 돼. 알았지?”
저렇게 순수하고 고운 심성으로 이 험난한 세상을 어찌 살아가려고.
안타까움이 깃든 내 표정을 본 세이룬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끄덕임에 다소 안심이 된 나는 그제야 방긋 웃으면서 노점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는 눈 돌아갈 정도로 향기로운 저 먹거리들에게 향기에 대한 보답을 할 차례였다.
“세이룬, 혹시 저런 꼬치 같은 거 먹어 본 적 있어?”
“아뇨, 없습니다.”
“좋아, 그럼 오늘 경험시켜 줄게.”
나는 세이룬을 데리고 근처 꼬치구이 노점 앞으로 다가갔다.
“어서 오십쇼!”
밝게 웃으며 인사하던 노점 주인은 눈가리개를 한 세이룬을 보고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눈을 그렇게 가리고 있으면 보통 안 보이지 않습니까? 방금 잘 걸어온 것 같은데…….”
“쉿, 남자의 비밀은 함부로 묻는 거 아니랍니다.”
나는 검지를 입술에 대고 장난스럽게 한쪽 눈을 찡긋거린 뒤, 주인이 더 묻기 전에 곧장 꼬치를 주문했다.
“엄청 매운 양념 꼬치 하나 주세요. 세이룬은 뭐 먹을래?”
오늘을 위해서 빈센트에게 부탁해 동화로 환전까지 했다.
지갑을 꺼내며 세이룬에게 묻자, 세이룬은 메뉴판도 보지 않고 곧바로 입을 열었다.
“저도 같은 것으로 먹고 싶습니다.”
“같은 걸로 하나 더 주세요.”
“예, 동화 4개입니다!”
지갑에서 동화 4개를 꺼내 건네주자, “잠깐만 기다리십쇼!”하고 외친 주인이 구워져 있는 꼬치를 데운 뒤 시뻘건 소스를 듬뿍 묻혀서 건네주었다.
“여기 있습니다! 맛있게 드십쇼!”
“네, 수고하세요.”
꼬치 두 개를 받아 든 나는 하나를 세이룬에게 건네준 다음 신이 나서 꼬치를 한 입 먹었다.
이곳에 와서는 한 번도 먹어 본 적 없었던 매콤하면서도 알싸한 맛이 입 안 가득 퍼졌다. 과거 한국에서 신아와 종종 만들어 먹었던 불오리볶음면을 떠올리게 하는 매운맛에 내 얼굴에는 웃음이 한가득 퍼졌다.
‘이렇게까지 매우리라고는 사실 기대 안 했는데.’
매운 거라면 사족을 못 쓰는 우리 신아의 소설 설정답다.
“꼬치는 입맛에 맞아?”
나는 꼬치를 우물거리다가 세이룬을 돌아봤다.
입가에 소스를 묻힌 채 오물거리던 그가 빙긋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맛있습니다.”
“세이룬, 잠깐만. 가만있어 봐.”
“네?”
세이룬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걸음을 멈췄다.
나는 피식 웃으며 엄지손가락으로 세이룬의 입가를 훔쳤다.
“우리 샤샤, 얼마나 맛있으면 입가에 소스도 다 묻힐까.”
“……아, 그―”
내 손가락에 묻은 소스를 본 세이룬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어쩔 줄 몰라 하던 그가 허둥지둥 품속에서 손수건을 꺼내려 했다.
“소, 손수건을―….”
“아니, 됐어. 이런 걸로 괜히 빨랫감을 늘릴 수야 없지.”
여기의 빨래는 모두 순수 노동이니까 말이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손가락에 묻은 소스를 핥아 먹었다.
“……!”
내가 손가락을 핥는 순간,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세이룬이 앓는 소리를 내며 손등으로 얼굴을 가렸다.
“음? 세이룬, 왜 그래?”
마저 소스를 모두 먹어 치운 나는 세이룬의 이상 행동을 눈치채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얼굴이 너무 발간데. 추워서 열이 오르나?”
하긴, 겨울 공기가 차갑긴 하다. 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세이룬의 이마에 손등을 대 보았다.
“열은 아닌 것 같은데.”
“……더워서, 그렇습니다. 전 괜찮아요.”
“덥다고? 이렇게 공기가 차가운데?”
“덥습니다. 더운 거예요.”
“으응…….”
나는 찝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들고 있던 꼬치를 마저 먹었다.
다시 걸음을 옮기던 내 눈에 문득 설탕물에 과일을 넣고 얼려 만든 과자가 들어왔다.
‘더위에는 역시 아이스크림이 제일인 법!’
다 먹은 꼬치를 근처 쓰레기통에 버린 나는 서둘러 세이룬을 끌고 얼음과자를 파는 노점 앞으로 다가갔다.
“어서 오세요!”
노점 주인이 밝게 인사했다.
평소 잘 먹을 수 없는 얼음을 먹고 싶어서인지 아니면 이한치한을 노리고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노점 앞은 얼음과자를 먹고자 찾아온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나는 아직도 뺨이 은은하게 달아올라 있는 세이룬을 보며 메뉴판을 가리켰다.
“더우면 차가운 걸 먹어서 더위를 물리쳐야지. 세이룬, 뭐 먹고 싶어? 말만 해.”
“……에리카는, 뭘 드시고 싶으십니까?”
“음, 나는 딸기 먹을래.”
역시 딸기가 제일 무난하고 맛있을 것 같다.
내 말에, 세이룬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을 열었다.
“저도 딸기가 먹고 싶습니다.”
“……잠깐만. 세이룬, 너 설마, 내가 딸기가 먹고 싶다고 해서 딸기 먹으려는 거야?”
잠시 내 눈치를 살피던 세이룬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아까 그 꼬치도? 내가 매운 거 골라서 그거 고른 거야?”
“……네.”
“매운 거는 좋아하고?”
“…….”
“그거 엄청 맵던데.”
“……고통은 잘 참을 수 있습니다.”
잠시 우물쭈물하던 세이룬이 소심하게 중얼거렸다.
그 미련한 대답에 나직이 한숨을 내쉰 나는 두 손을 뻗어 그의 말랑한 뺨을 쭈욱 잡아 늘였다.
“아픈 건 참는 게 아니라 피하는 거야, 샤샤.”
“…….”
“그리고 내가 먹는 걸 먹는 게 아니라 좋아하는 걸 먹어야지.”
“……하지만, 저는 에리카와 같은 걸 맛보고, 같은 걸 느끼고 싶은걸요.”
세이룬이 시무룩하게 항변했다.
그 말에, 왠지 모르게 가슴 속에서 옅은 두근거림이 피어올랐다.
말문이 막힌 나는 잠시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이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것도 좋지만, 좋아하는 걸 공유하는 것도 좋아.”
“…….”
“그러니까, 예를 들어 내가 딸기를 선택하면 너는 블루베리를 선택해서 서로 나눠 먹는 거지. 그럼 좋아하는 걸 먹을 수 있고, 같은 걸 먹을 수도 있잖아.”
“아…….”
잠시 멍하니 벌어져 있던 세이룬의 입술이 서서히 옅은 곡선을 머금었다.
그의 시선이 메뉴판으로 미끄러지듯 돌아갔다. 메뉴판을 보고 잠시 고민하던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전, 청포도가 먹고 싶습니다.”
“청포도?”
그래, 청포도. 청포도를 좋아한단 말이지……. 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도 샤인머스캣이 있나 모르겠네.’
만약에 있다면 왕창 사 줘야겠다. 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청포도 얼음과자를 주문하는 세이룬을 바라봤다.
해 주고 싶은 걸 해 줄 수 있는 삶이라니, 너무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