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뒤에서 들려온 나직한 미성에, 나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목소리의 주인은 내 또래 정도 되는 한 남자였다. 허리 아래까지 길게 내려오는 사파이어빛 머리카락을 하나로 질끈 묶은 남자는, 황가의 핏줄임을 뜻하는 아름다운 금안을 가진 차분한 인상의 미인이었다.
‘확실히, 저런 외모면 다른 이들의 호감을 쉽게 살 수 있겠네.’
그러니까 그를 경계한 황제나 황태자가 이곳에 가둬 둔 거겠지.
품 안 가득 수선화를 안고 있는 사피엔은 갑작스러운 방문객에 놀란 듯 눈을 댕그랗게 뜬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동자가 퍽 순수해 보였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저 남자는 품속에 칼을 숨겨 놓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 혹시 이 궁의 주인이신가요?”
나는 무해하게 웃으며 사피엔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제가 처음으로 황궁에 초대받은 거라,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길을 잃어버렸답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혹시 길을 알려 주실 수 있을까 싶어서 실례를 무릅쓰고 들어왔어요.”
“아아, 그러시구나.”
이해한 듯, 사피엔이 강아지상의 순한 눈꼬리를 접어 웃었다.
내 앞으로 다가온 그가 품에 안은 수선화 한 송이를 내게 건넸다. 얼떨결에 수선화를 받아 든 내게 사피엔이 상냥하게 말했다.
“이곳은 황궁 안에서도 제일 구석진 곳에 있는 별궁이라 정문까지는 꽤 오래 걸어야 해요. 밖은 겨울이라 많이 추우니, 잠시 들어가서 차라도 한잔하며 몸을 녹이고 가시는 게 어떠세요?”
“그럼 저야 감사하죠.”
내 대답에, 사피엔이 꽃처럼 화사하게 웃었다.
그가 에스코트하듯 내게 한 손을 내밀었다.
“그럼, 가실까요?”
* * *
사피엔이 안내해 준 별궁의 응접실은 그나마 관리한 티가 났다.
그러니까, 적어도 먼지가 쌓여 있지 않았다는 뜻이다.
“잠시만 앉아서 기다려 주세요.”
나를 응접실의 테이블 의자에 앉힌 사피엔은 품에 있던 수선화 중 두 송이를 테이블 위 꽃병에 꽂더니, 나머지 꽃들을 들고 어디론가로 사라졌다.
잠시 뒤, 다시 돌아온 그는 찻주전자와 찻잔 두 개가 올려진 트레이를 들고 있었다.
“궁 안에 차가 이것밖에 없어서요…….”
사피엔은 멋쩍게 웃으며 내 찻잔에 직접 차를 따랐다.
보리차였다.
“감사해요, 잘 마실게요.”
실로 오랜만에 마셔 보는 보리차였다.
나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보리차 특유의 고소한 맛이 입 안 가득 퍼져 갔다.
사피엔은 자신의 차도 마저 따른 후에 내 맞은편에 앉았다.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테이블 위 수선화를 구경하던 나는 그가 자리에 앉자 질문을 던졌다.
“다른 수선화는 어디에 있나요?”
내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듯 잠시 눈을 깜박이던 사피엔이 이내 “아”하고 웃으며 대답했다.
“제 침실과 주방, 그리고 제가 자주 가는 곳에 두었어요. 꽃이 있으면 덜 외롭거든요.”
겨울 햇볕이 은은하게 쏟아져 내리는 창가에서는 겨울새 우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덜 맞물린 창문으로 차가운 공기가 희미하게 새어 들어오는 것을 느끼던 나는 천천히 시선을 들어 맞은편의 남자를 응시했다.
“당신은, 제가 누구인 줄 알고 이렇게 함부로 별궁에 들이셨어요?”
내 질문에, 사피엔은 흠칫 어깨를 굳히더니 이내 우물쭈물하며 시선을 피했다.
“……오랜만에 보는 사람이 반가워서 그랬어요. 저는 맨날 저 창가에 혼자 앉아서, 하루 종일 하늘만 올려다봤거든요.”
사피엔이 변명하듯 웅얼거렸다.
사정을 모르는 이라면 퍽 가엾어할 법한 말이었지만, ‘신.로.줄’의 설정을 빠삭하게 알고 있는 나로서는 저 말이 기만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철저히 제 수족으로 복속시켜 눈과 귀로 열심히 굴리고 있는 하인 하나가 있는데, 하루 종일 창가에 앉아서 하늘만 멍하니 올려다보기는 무슨. 접수된 보고 사항을 어떻게 하면 이롭게 사용할 수 있을까 머리 터지게 고민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랄 텐데.
하지만 이걸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일부러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사피엔을 바라보자, 그가 조금은 쑥스러운 듯이 이어 말했다.
“구름이 떠가면, 내가 구름이었다면 저렇게 자유로이 흘러갈 수 있었을까 상상했어요. 새들이 날아가면, 내가 저 새였다면 원하는 곳으로 저렇게 훨훨 날아갈 수 있었을까 생각하기도 하고…….”
문득, 사피엔의 시선이 창가에 닿았다.
햇빛에 닿아 찬란하게 빛나는 금빛 눈동자가 그리운 것을 좇듯 아련해졌다.
“그러다 보면, 저 하늘마저 부러워지는 거예요. 저 모든 자유로운 존재들을 전부 담아내는 하늘은 얼마나 자유로울까, 하고.”
듣는 사람의 동정심을 자극하는 가련하고 가엾은 말과 목소리.
하지만 그 안에 든 것은, 참으로 참람하고 불경한 야망이었다.
“하늘을 좋아하세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내가 물었다.
사피엔은 해사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좋아해요.”
하지만 그 웃음은, 곧장 이어진 내 질문에 사라졌다.
“그 대답을, 하늘이 되고 싶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될까요?”
웃음이 사라진 자리에는 놀람과 당황이 가득 차올랐다. 그가 곤혹스러운 것처럼 안절부절못하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것이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제가 어디까지 돌려 말해야 할까요.”
“네?”
사피엔이 곤란이 가득한 눈동자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나는 피식 웃으며 상체를 슬쩍 앞으로 숙였다.
“황궁 밖의 정보를 요구하셔서 녹셰와 연결해 드린 게 벌써 반년 전인데. 설마 이제 와서 모르는 척이신가요, 황자 전하.”
내 말과 동시에, 사피엔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서리처럼 차가운 금안이 나를 직시했다. 드디어 가면 너머에 있던 그의 본모습을 마주한 것이 퍽 마음에 들어서, 입가에 그려진 만족스러운 미소가 더 진해졌다.
반년 전, 나는 체사에게 사피엔 황자에 대한 정보를 요청하는 것과 동시에 사피엔과 접촉해서 그와의 거래를 진행해 달라고 부탁했다. 체사는 ‘이거 추가 수당 요구해야 되는 거 아닌가요’라고 툴툴거리면서도 내 부탁을 들어줬다.
내가 사피엔에게 제시했던 거래는 이거였다. 별궁에 갇힌 그에게 바깥 상황에 대한 정보를 원하는 대로 제공할 테니, 차후 대공비의 행보에 협조하라는 것.
하지만 영민한 만큼 경계심도 많은 사피엔은 내 거래를 곧바로 수락하지 않았다. 그가 내 거래를 받아들인 것은, 대공비가 해수였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난 이후였다.
“그때 대공비께서 말씀하신 ‘행보’가, 반역이었던가요?”
차가운 목소리로 물은 사피엔이 고개를 기울였다.
나는 섭섭하다는 듯 과장되게 울상을 지으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어머, 황자 전하. 그렇게 차갑게 선을 그으시면 섭섭해요. 무엇을 바라고 저와의 거래를 수락하셨는지는, 너무나 명약관화이지 않나요?”
그 이후로, 꽤 오랫동안 침묵이 흘렀다.
의중을 알 수 없는 금빛 눈동자가 나를 가만히 직시했다.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마주 보자, 그때 동안 침묵을 지키던 사피엔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토록,”
느리게 말을 잇던 그의 고개가 슬쩍 기울어졌다.
“티가 났나요, 대공비 전하?”
그리 말하며, 그가 배시시 웃었다.
방금까지 그렇게 서늘한 시선으로 나를 응시하던 것은 전부 거짓말이었다는 듯, 사피엔의 만면 가득 지어진 웃음은 꽃향기라도 맡아질 것처럼 무척이나 해사했다.
한순간에 돌변한 분위기에, 나는 문득 소름이 돋았다.
‘분명 웃고 있는데 왜 이렇게 오한이 들지…….’
면전에서 대놓고 레틸기스 즙을 주며 세뇌시키는 사람과, 무슨 경극을 하는 것도 아니고 표정과 분위기를 한순간에 휙휙 바꾸는 사람이라.
‘황실엔 몰양심과 돌아이밖에 없는 건가.’
그래도 뭐, 정치질은 잘할 것 같은 키워드네…….
“앞으로 잘 부탁해요, 황자 전하.”
나는 사피엔에게 마주 웃어 주면서, 속으로 다짐했다.
이놈의 복수를 끝내 버리기만 하면, 곧장 대공령으로 돌아가서 다시는 이딴 황궁 같은 곳과 상종하지 않을 거라고.
과연, 역대 대공 부부가 수도에 걸음 하지 않았던 것은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내 인사에, 사피엔이 손을 뻗어 찻잔을 쥐고 있던 내 손을 부드럽게 잡아 올렸다.
“저도 잘 부탁드려요, 비전하.”
그리 인사하며, 사피엔이 그 위에 입을 맞췄다.
차가운 입맞춤이었다.
* * *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는 진이 다 빠져 있는 상태였다.
정상인으로서 미친 인간 둘을 나란히 상대했으니 진이 빠지지 않은 게 더 이상하긴 했다.
그냥 세이룬의 말대로 확 갈아엎고 끝내 버릴까 하는 유혹이 찰나 들었지만, 나는 이성을 발휘하여 그 유혹을 떨쳐 냈다.
‘정신 차려, 에리카. 지금 하는 선택에 따라 훗날 치워야 하는 똥의 양이 달라진다.’
빠르게 씻고 나온 나는 나를 위로하는 차원에서 잔뜩 사 온 달달한 디저트를 하나씩 먹기 시작했다.
역시, 스트레스를 푸는 데에는 당을 곁들인 탄수화물만 한 게 없다.
그렇게 벌써 몇 번째로 입에 가져가는 것인지도 모를 에그타르트를 한 입 베어 먹는데, 똑똑 하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비전하, 보좌관 빈센트 하르센입니다. 잠시 시간 괜찮으십니까?”
“아, 괜찮아요. 들어와요.”
내 허락이 떨어지자 문이 열리고 빈센트가 들어왔다.
막 방 안으로 들어서려던 그는 테이블 가득 차려져 있는 디저트의 향연에 흠칫했다.
“이건……?”
“아, 갑자기 달콤한 게 당겨서 사 왔어요. 빈센트도 하나 먹을래요?”
“저는 괜찮습니다. 다만 주제넘다고 생각될지 모르나, 단것을 지나치게 많이 먹는 것은 건강에 좋지 않아 우려됩니다.”
빈센트의 그 말이 왠지 오빠의 잔소리처럼 느껴져서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나는 내 맞은편 의자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주제넘긴요, 그냥 걱정해 준 건데. 오늘은 특별한 사정이 있어서 먹는 거고, 다음부터는 빈센트의 걱정대로 이렇게 많이는 안 먹을게요.”
“……감사합니다.”
빈센트가 반쯤 먹먹해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가끔 보면, 그는 그의 행동이 주제넘는 게 아니라고 말해 줄 때마다 놀라는 구석이 있었다.
‘대체 셀루리아 후작 그 자식이 얼마나 우리 빈센트를 주제넘다고 갈궜으면 이러냐고…….’
사람이 걱정할 수도 있지. 그런 걱정이 있어야 피드백도 오고 하는 거라고.
“그나저나, 무슨 일 때문에 찾아온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