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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박데기 영애의 반격을 조심하세요 (65)화 (65/139)

65화

‘에스로타의 티파티에서 보여 줬던 내 어리바리한 모습이 황후의 귀에 들어갔나 보군.’

아무리 셀루리아 출신이라 할지라도 이미 드레인의 일원이 되어 버린 대공비를, 티파티가 파하자마자 이렇게 부리나케 불러들이다니 말이지.

황족의 전령은 본인이 직접 맞이해야 했기에, 전령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저택의 정문까지 달려간 나는 감동한 얼굴로 당장이라도 갈 수 있다며 두 손을 맞잡고 기뻐하는 척을 했다.

내 반응을 꼼꼼하게 눈에 담은 전령은 ‘그래도 내일까지 기다려 주십시오’하고 당부한 후 돌아갔다.

‘내가 진짜로 당장 출발할 것처럼 생각 없어 보였나…….’

원했던 반응이긴 한데, 어쩐지 자존심이 상했다.

그렇게 다음 날, 나는 황궁에 발을 디뎠다.

“드레인 대공비, 에리카 르 드레인이 이렌텔의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황후 전용 응접실에 나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물건을 품평하는 눈빛으로 나를 밑에서부터 스윽 훑어본 황후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온화하게 웃으며 맞은편을 가리켰다.

“어서 오게. 기다리고 있었네.”

황실 짬밥 몇십 년이라고, 눈빛 교체 스킬이 보통이 아니었다.

나는 불쾌감에 절로 찡그려지려는 얼굴을 애써 활짝 펴며 웃음을 유지했다.

“최근에 황궁으로 특별한 차가 들어와서 준비했는데. 어떠한가?”

내가 자리에 앉자, 황후가 내 앞에 있는 찻잔을 눈짓했다.

나는 황후의 눈짓에 따라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익숙한 갈색 찻물을 보아하니, 딱 봐도 레틸기스 즙을 섞은 차임이 분명했다.

‘와, 황실의 인성이 여기서 나오네.’

거나한 욕을 랩처럼 쏟아 내고 있는 속과는 달리, 나는 얼굴 가득 환하게 웃으며 찻잔을 쥐었다.

“와아, 정말 맛있어 보여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좋아해 주니 다행이군.”

내가 찻잔을 입가로 가져가는 모습을 집요하게 응시하던 황후는 내가 차를 한 모금 마신 후에야 내게서 시선을 거뒀다.

내가 먹는 걸 끝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시선을 치우다니, 지독한 인간 같으니라고.

당장이라도 비틀어지려는 입가를 애써 주체한 나는 이윽고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찻잔을 아래로 내렸다.

“저어, 폐하. 실은 제가 폐하께 드리고자 선물을 준비했는데, 너무나도 귀한 것이라 공수해 오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해서 가지고 오지 못했어요. 선물은 공수해 오면 꼭 드릴게요. 죄송합니다…….”

나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 황후의 눈치를 봤다. 황후는 예상치 못했다는 듯 분홍색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대공비가 준비한 선물이라니, 기대되는군. 선물이 빨리 도착하지 않은 것은 그대의 잘못이 아니니 너무 자책하지 말게. 나는 선물을 준비했다는 그 마음만으로도 고마우니까.”

“그리 말씀해 주셔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내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처럼 우물쭈물하자, 황후가 차를 마시며 진정하라는 듯 내게 찻잔을 눈짓했다.

나는 황후의 권유에 따라 찻잔을 집어 들고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나저나, 나한테 레틸기스 즙을 먹인다는 것은 셀루리아가 내게 이걸 계속 먹여 왔다는 걸 안다는 뜻인가?’

아니면, 황가 측에서 대공비를 직접 수중에 넣고 움직이려고 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래도 일국의 대공비인데 레틸기스 즙이라니, 진짜 미친 자식들.’

나는 황후가 완전히 안심하게끔 레틸기스가 들어간 차를 계속 홀짝거렸다. 확실히 내가 차를 마시면 마실수록 황후의 기색은 점점 더 누그러졌다.

“여러 일을 도맡느라 많이 바쁠 터인데, 그럼에도 내 초대를 수락해 주어 고맙네.”

황후가 가볍게 운을 뗐다.

저 말은 분명 내가 ‘해수’로서의 일을 직접 맡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미끼일 터. 나는 멋쩍은 듯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아니에요. 저는 하나도 바쁘지 않은걸요. 그냥 대공 전하께서 서류를 주시면, 거기에 제 이름만 적을 뿐이에요.”

나는 내가 직접 해수의 일을 맡지는 않지만, 최종 결재는 나를 거쳐서 진행된다는 것을 피력했다. 다행히 잘 먹혔는지, 나를 응시하던 황후의 눈꼬리가 길게 접혔다.

황태자의 모후시니 황후의 외모는 말할 것도 없이 미중년 그 자체였지만, 그래도 그 아름다운 얼굴에 서린 미소는 감탄보다는 소름을 돋아나게 했다.

저게 바로 황궁의 몇십 년 짬밥이라는 거지……. 역시 황궁은 싫다.

“베이센 소공작에게 듣기로, 티파티가 파할 즈음에 대공이 직접 그대를 데리러 왔다지? 대공 부부의 금슬이 무척 좋다더니, 실로 그러하군. 그대를 생각하는 대공의 마음이 이리도 명징하니 참으로 기쁘겠어.”

“감사합니다…….”

나는 부끄러운 것처럼 두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배시시 웃었다.

그런 나를 냉철한 눈으로 관찰한 황후가 다시금 미소 지으며 본인 몫의 흑차를 한 모금 마셨다.

“대공비는 셀루리아 후작의 질녀이고 곧 황태자비가 될 카리에 영애와는 사촌지간이니, 사사롭게는 나와 사돈지간이라 할 수 있겠군.”

“여, 영광이에요, 폐하.”

“나 역시 그대처럼 착하고 상냥한 사돈을 두어 참으로 기쁘네. 그래서 말인데, 대공비.”

들고 있던 찻잔을 천천히 내려놓은 황후가 흘끗, 분홍빛 눈동자를 내려 내 찻잔을 확인했다. 내 몫의 차는 이제 절반이 채 남아 있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은 듯, 다시 내게로 시선을 들어 올린 황후가 생긋 웃으며 이어 말했다.

“혹여나 이 사돈에게 힘든 일이 생겨 그대에게 도움을 청한다면, 부디 외면치 말고 이 사돈을 도와주시게. 그대는 ‘착하고 상냥한’ 내 사돈이니까.”

아하, 이래서 내게 레틸기스 즙이 들어간 차를 먹인 거구나. ‘착하고 상냥한’ 나는 자신을 반드시 도와야 한다고 세뇌시키기 위해서 말이지.

나는 당연히 괜찮다는 듯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폐하! 쓸모가 많지 않은 저지만, 폐하께서 필요하시다면 언제든지 도와드릴게요.”

“……약속해 줄 수 있나?”

“네, 그럼요. 약속해요.”

내가 배시시 웃으며 확언하자, 황후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져 갔다.

나는 다시금 손을 뻗어서 미지근해진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누군가 그랬다.

새끼손가락만큼이나 쉽게 꺾이는 것이 약속이라고.

* * *

황후와의 티타임이 파한 다음, 황후는 내게 곧장 대공저로 돌아가기보다는 황궁의 중앙 정원인 리사벨 화원에 들러서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한 수선화를 구경하고 가기를 권했다.

어차피 황궁 안에서 할 일도 남아 있던 터라, 나는 흔쾌히 그러겠노라고 답했다.

“수선화가 겨울에 피는 꽃이었구나…….”

리사벨 화원에 도착한 나는 멍하니 중얼거리면서 곳곳에 피어난 수선화를 둘러봤다. 솜을 잔뜩 넣어 만든 따뜻한 드레스를 입고 털이 잔뜩 달린 방한용 버전 클록을 두르니 추위는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올해가 전부 저물기까지도 얼마 남지 않았다. 고작 일주일 정도 남았던가?

‘예전에는 그토록 바랐던 성인이 되기까지 고작 일주일밖에 안 남았다니…….’

뭔가 느낌이 묘했다.

나는 수선화의 옅은 노란색 꽃잎을 만지작거리다가 생각을 돌렸다.

‘카리에와 황태자가 결혼하기까지도 이제 3주 정도 남았네.’

그 후로는 셀루리아 앞엔 비탈길밖에 남지 않았네. 가시밭을 곁들인 비탈길 말이지.

나는 태평하게 생각하며 수선화를 향해 굽혔던 허리를 천천히 폈다. 그와 동시에 포카와 레비나가 내게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보고했다.

“비전하를 감시하던 시선은 잠재웠습니다.”

“자연스럽게 수면향을 썼으니 이상한 점은 못 느낄 거예요……!”

“좋아, 잘했어.”

나는 두 사람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어차피, 갑자기 잠든 걸 이상하게 생각하더라도, 감히 상사에게 업무 도중 잠들었다고 보고할 수는 없을 것이다. 특히나, 그 연약하고 멍청할 정도로 순수하기 그지없는 대공비를 감시하던 도중에 잠들었다고는 말이지.

‘더구나 나는 레틸기스 즙이 들어간 차까지 마셨는데, 내가 하인을 시켜 잠재웠으리라는 생각은 더더욱 못 하지.’

그건 그냥 근무 태만으로 쫓겨날 일인 것이다.

“그럼 이제 가 보도록 할까?”

나는 생긋 웃으며 포카에게 두 팔을 뻗었다.

수줍게 두 볼을 붉힌 포카가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로부터 1시간 뒤, 리사벨 정원에서 대공비를 감시하던 황후의 하수는 대공비가 귀택했노라고 보고했다.

* * *

사피엔 황자의 별궁은 황궁의 구석 중에서도 제일 구석탱이에 처박혀 있었다.

다 쓰러져 가는 것을 증명하듯 담 곳곳에는 풀이 돋아나 시들어 있었고, 사람의 손길이 거의 닿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듯 별궁의 벽에는 온갖 넝쿨들이 지저분하게 자라나 있었다. 심지어 어떤 유리창에는 금이 가 깨진 흔적이 있었는데, 그걸 그냥 대충 옷을 돌돌 감아 쑤셔 넣은 것으로 처리해 놨다.

“실화냐…….”

구박데기였던 나조차도 이렇게 누추하게 살지는 않았는데.

‘그래서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구석에 자리한 건가.’

나는 관리하지 않아서 기다랗게 돋아난 잡초를 헤치며 별궁 입구에 도착했다.

‘그래도 누군가의 집인데 막무가내로 들어가는 건 예의가 아니겠지.’

어차피 허락 없이 담을 넘은 것 자체가 예의가 아니었지만, 그건 살포시 무시해 주기로 했다.

나는 문 앞으로 걸어가 똑똑 두드렸다.

“계세요?”

“…….”

“…….”

당연하겠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음, 그냥 열고 들어가야겠지?

“비전하, 저희가 문을 열어 드리겠습니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게 분명한 포카가 내게 말했다. 내가 허락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포카와 레비나가 별궁의 현관문을 열었다.

끼익. 문은 경첩이 닳은 지 오래인 듯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나는 천천히 별궁 안으로 들어서며 내부를 느리게 훑었다.

정말이지, 아무리 그래도 황제의 자식인데 어떻게 이렇게 대접할 수 있지?

‘황자가 황태자를 죽이려는 것도 이해 간다…….’

이런 곳에 갇혀서 친구도 없이 간간이 황태자 칼릭스의 욕이나 들으면서 살아왔을 텐데 오죽하겠냐. 특히나 이렇게 더럽고 누추하면 벌레도 장난 아닐 거 아니야.

가여워라.

가볍게 혀를 차며 사피엔을 찾아 2층으로 올라가려 막 계단으로 발을 내디딜 때였다.

“누구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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