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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박데기 영애의 반격을 조심하세요 (64)화 (64/139)

64화

아무래도, 어렸을 때부터 바네사를 만나기 전까지 줄곧 구교 교황의 설교 내용을 한 치의 의심 없이 정도라 믿고 받아들이며 따라왔으니, 딱 잘라 그것이 ‘이상하다’라고 부정하기는 어렵겠지.

나는 한숨을 삼키며 킬리언 대신 말을 맺었다.

“경전의 내용을 그들의 실리에 맞게 해석하고 설파했겠죠. 어차피 문턱 높은 이레알 어를 아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을 테니까.”

신을 믿되 경전을 모르는 사람은, 종교에 권위 있는 사람의 말을 마치 경전처럼 맹신하게 된다.

자신이 차마 내뱉지 못했던 말을 듣게 된 킬리언은 차라리 눈을 감아 버렸다.

그 모습을 가만히 응시하던 나는 다시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공작.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세상이 스스로 정도로 향하기를 기다리기만 한다면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세상은 움직이지 않아요. 마찬가지로, 자신이 바라는 무언가 또한 스스로 이뤄지지 않고요.”

정도도, 바라는 무언가도.

“그건, 자신이 직접 이뤄 나가야 하는 거예요.”

그동안 오만한 구교파의 권위주의 아래 고통받던 사람들이 신교를 만들어 내고 구교에 대항하기 시작한 것처럼 말이다.

내 말을 끝으로, 응접실에는 꽤 오랫동안 침묵이 흘렀다.

나는 인내심 있게 킬리언의 결정을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추후, 대공저에 서신을 보내 날짜를 잡겠습니다. 그때 세부적인 사항을 논의하도록 하죠.”

온전한 결정을 내린 킬리언이 한결 또렷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성공이다. 만족스럽게 미소 지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하지만 서신은 신교의 교황 성하께 전달해 주세요. 카리에의 성혼 이후부터 저는 후원자로서 아이들을 만나러 신교 성전에 방문할 예정이거든요.”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내 입에서 나온 ‘카리에의 성혼’이란 말에, 잠시 안타까운 눈길로 나를 바라본 킬리언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후드를 뒤집어쓴 나는 그동안 먼지만 맞고 있던 가여운 쿠키를 두 개 집어 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서신 기다리고 있을게요.”

오독, 쿠키를 한 입 베어 물며 인사한 나는 세이룬과 함께 세네카 공작저를 나왔다.

정문을 지나쳐서 인적이 드문 곳으로 향하던 도중, 돌연 세이룬이 입을 열었다.

“에리카,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응? 뭔데?”

나는 그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내 입가에 묻은 쿠키 부스러기를 덜어 주며 물었다.

“혹여 세네카 소공작이 제안을 거절했더라면, 어떻게 했을 겁니까?”

그리 물으며 나를 공주님 안듯 번쩍 안아 든 세이룬에게, 나는 쿠키 하나를 물려 준 뒤 말갛게 웃음 지었다.

“소공작의 힘을 얻지 못한다는 건 곧 신교 교황의 힘도 빌리지 못한다는 뜻이니까, 명분이 조금 부족해졌겠지?”

세이룬이 천천히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며 생각했다.

신교는 민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고, 그런 신교의 힘을 빌리는 것은 민중이란 명분을 얻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그 명분을 얻지 못한다면…….

“그랬다면 세이룬이 말했던 것처럼 그냥 과격하게 황위를 교체해 버리고 셀루리아에 복수했을 거야. 어쨌거나 내 목적은 셀루리아에 대한 복수니까.”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하는 반역은 홀로 떨어져 나온 눈송이처럼 금방 사그라들고 만다.

그러니, 반역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그 외로운 눈송이가 녹아 사라지기 전에 모든 일을 끝내야 했다.

‘뭐, 명분이야 갖다 붙이면 되는 거고.’

구밀복검하고 있는 사피엔 황자가 명분 하나 그럴듯하게 꾸며 내지 못할 리도 없을뿐더러, 명분은 힘과 만나 비로소 완전해지는 것이니 받아들여지지 못할 거라는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란 말씀.’

그러니까 내가 그동안 셀루리아에서 학대를 당하며 살아온 것이 아니겠는가.

‘이 방법은 그냥 뭐…… 옆 나라에서 시비 걸려오고, 정세가 불안정해져서 신경을 더 바짝 써야 하고, 치워야 할 똥은 더 많아져서 골치 아프고, 그런 거지.’

슬쩍 흐린 눈을 뜬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아쉽네.”

불현듯 머리맡에서 서리처럼 싸늘한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응, 으응?”

놀란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세이룬을 올려다보자, 세이룬은 자신이 언제 그런 목소리를 냈었냐는 것처럼 부드럽게 웃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으, 으응…….”

나는 얼떨떨하게 답하며 슬쩍 시선을 피했다.

‘방금 목소리와 표정, 진짜로 차가웠어.’

세이룬은 보통 저런 모습으로 타인을 대하는 건가. 왠지, 주위 사람들이 왜 세이룬을 귀여워하는 나를 이상하게 보는지 대충 알 것 같기도 했다.

저렇게 차가운 목소리와 싸늘한 표정으로 나를 보는 세이룬이라.

‘으아아…….’

생각만 해도 오싹해져서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자, 세이룬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추우십니까?”

그렇게 물어 오는 목소리에는 명백한 온기가 스며들어 있었다.

그 온기가 귓가를 타고 스며든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아니, 하나도 안 추워.”

네가 해인을 사용해서 이렇게나 꼼꼼히 바람을 막아 주고 있는데, 추울 리가.

나는 어리광을 피우는 것처럼 세이룬을 더욱 꼭 끌어안았다. 낮게 목을 울려 웃은 세이룬도 나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그래. 세이룬이 다른 사람들에게 안 귀여운 게 뭐.’

나한테만 귀여우면 된 거 아닌가.

다시금 웃음이 실실 새어 나왔다.

빠른 속도로 도곤거리는 세이룬의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나는 눈을 감았다.

* * *

티파티가 파한 후, 후작저에 도착한 카리에는 제 방으로 올라가자마자 당장 에리카의 선물을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쨍그랑하는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고급스럽게 포장된 꿀과 과일청이 사방으로 튀었다.

단정했던 방 안은 순식간에 엉망진창으로 변해 버렸다.

“감히…… 감히……!”

카리에는 씨근덕거리는 숨을 몰아쉬며 사방으로 튄 에리카의 선물을 노려봤다.

황급히 뒤따라 들어온 에밀리가 제 주인이 깨진 유리 조각을 밟기라도 할까 봐 전전긍긍하며 카리에의 주변을 서성였다.

“아가씨…….”

“감히…… 네까짓 게 나를 우롱해?”

분노에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카리에는 바들거리는 손으로 치맛자락을 꾹 움켜쥐었다.

어렸을 적, 숨 쉬듯이 느꼈던 열패감이 가슴속 깊은 곳부터 끓어올랐다.

“너 따위, 반쪽짜리인 너 따위가 감히 나한테 선물을 해……?!”

치밀어 오르는 분을 이기지 못한 카리에는 제 앞에 있는 테이블마저 엎어 버렸다.

사방으로 울려 퍼지는 굉음에 에밀리가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감히, 나보다 천한 것이 내게 뭔가를 베풀려고 하다니…… 감히……!”

카리에는 화가 나 어쩔 줄을 몰랐다.

분명 그 멍청한 애는, 자신이 저 ‘선물’을 받고 그저 고마워하길 바라는 시혜적인 마음으로 준비했겠지.

저 산삼꿀도, 멍청해서 이게 어디에 사용되는지 모를 게 분명한 레틸기스 청도.

“카리에, 이거 줄게.”

“그러니까 울지 마.”

꼭, 그때처럼 말이다.

“……짜증 나.”

손바닥이 새빨갛게 패일 정도로 꽉 주먹을 쥐고 바닥을 엉망으로 만든 에리카의 선물을 노려보며, 카리에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냥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그랬으면, 지금 이렇게 답답함을 느끼지도 않았을 텐데.

불현듯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져 내렸다.

너무 짜증이 나고 화가 나면 눈물이 나오기도 한다는 것을, 카리에는 오늘 처음 깨달았다.

“……난 네가 정말 싫어.”

그래, 이 감정은 ‘싫다’는 것이다.

“나는, 에리카 네가 정말로 싫어…….”

오늘도, 반쪽짜리 에리카는 응당 온전한 귀족인 자신이 가져야 하는 것을 모조리 빼앗아 갔다.

사람들의 선망 어린 시선, 그들이 내비치는 호의,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칭찬…….

그리고, 자신을 어느 순간부터 ‘카리에 영애’가 아닌 ‘셀루리아 후작 영애’라 지칭하기 시작한 에스로타 르 베이센 소공작과의 친분까지.

“하― 이름으로 부르기로 했다고.”

옛날부터 그 천한 것만 목이 빠지게 찾아다니더니, 결국엔 친해져서 서로 이름까지 허락했나 보지.

“아가씨…….”

에밀리가 울먹이며 카리에를 불렀다.

그 부름에, 카리에의 은청안이 천천히 에밀리에게 닿았다.

“너, 나를 동정해?”

아무 감정 없는 얼굴로 카리에가 물었다.

흠칫 몸을 떤 에밀리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재빨리 땅에 엎드렸다.

“저, 절대 아닙니다! 어떻게 감히 저같이 천한 것이 셀루리아의 고귀하신 아가씨를 동정하겠습니까!”

“그래, 그렇겠지.”

무심하게 중얼거린 카리에가 다시 시선을 돌렸다.

이 일련의 문답에서는, 그 어떤 동요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게 당연한 거지.”

감히, 어떻게 천한 존재가 그보다 훨씬 더 고귀한 존재를 ‘동정’할 수 있겠어.

잠시 물끄러미 엉망이 된 방을 응시하던 카리에가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에밀리.”

“네, 네!”

“에리카 그것을 도와준 하인 찾는 건. 아직이야?”

“……송구합니다.”

에밀리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하며 푹 고개를 숙였다.

카리에의 눈빛에 일순 잔혹함이 스쳐 지나갔다.

“오늘 심문은 내가 직접 하겠어.”

“예……?”

“두 번 말해야 할까?”

카리에가 스륵 에밀리를 돌아봤다.

그 시린 시선에 소름이 돋은 에밀리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 제가 심문할 준비를 해 오겠습니다!”

발에 사기 조각과 유리 조각이 박히는 것도 모른 채, 에밀리는 온통 엉망인 방을 가로질러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곧이어 주춤거리며 들어온 하인 여럿이 카리에의 눈치를 보며 어질러진 방을 치우기 시작했다.

카리에는 에밀리가 오기 전까지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에리카의 선물이 치워지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 * *

황궁에서 티타임 초대장이 날아든 것은, 티파티 다음 날이었다.

보낸 이는 황후였고, 초대장에 적힌 바에 따르면 황후는 내가 바로 내일 황궁으로 올 것을 명령, 아니 희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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