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박데기 영애의 반격을 조심하세요 (63)화 (63/139)

63화

“빚이라면…….”

문지기가 제 동료와 눈빛을 교환했다.

이윽고, 내 앞을 가로막고 있던 창이 거둬졌다.

“안에 연락을 취하고 올 테니,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 주십시오.”

“알겠네.”

문지기 한 명이 서둘러 저택 내부로 달려갔다.

잠시 뒤, 저택에서 나온 것은 문지기와 하인으로 보이는 한 여성이었다.

거의 뛰다시피 달려온 하인이 내게 고개를 숙였다.

“손님께서는 저를 따라오십시오. 응접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자, 하인이 몸을 돌려 저택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세네카 공작저의 저택은 놀라울 정도로 신아의 취향과 흡사했다. 나는 눈을 흐리게 뜨며 눈동자를 슬쩍 굴려서 저택 내부를 훑었다.

‘본인 취향의 남자를 본인 취향의 저택에서 살게 하는 변태력이라니…….’

이신아가 괜히 과목 하나를 똑바로 공부하겠답시고 소설 쓸 생각을 했던 게 아니었다. 자신이 보고 싶은 이야기가 없어서 직접 창작한다는 이유도 아니고, 무려 학과 공부의 이해를 높이기 위해서라니. 정말이지 소름 돋을 정도로 변태 같은 생각이지 않은가?

하긴, 유독 우리 학교가 미친놈들이 모여드는 학교로 유명하긴 했다. 나는 반쯤 체념한 채로 내가 아는 동기들을 떠올려 봤다.

……참담했다.

“소공작님께 고할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반쯤 해탈한 채로 하인의 뒤만 졸졸 따르는 사이, 어느새 응접실 앞에 도착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인이 고했다.

“소공작님, 손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모시도록.”

아름다우면서도 단정한 목소리가 문 너머로 들려왔다.

나와 세이룬은 하인이 열어 준 문 안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킬리언이 무표정한 얼굴로 나와 세이룬을 맞았다.

긴 은발을 포니테일로 단정히 묶은 킬리언은 정말이지, 봐도 봐도 놀라울 정도로 완벽히 신아의 취향이었다.

이신아, 기뻐해라. 너 성공했어, 짜식…….

“앉으시길.”

킬리언이 정중한 태도로 본인의 반대편 좌석을 가리켰다. 테이블 위에는 내 방문 소식을 전달받았을 때부터 미리 준비했었는지 김이 나는 찻잔 세 개와 간단한 쿠키가 놓여 있었다.

“고마워요.”

나는 싱긋 웃으면서 의자를 향해 또박또박 걸어갔다.

자리에 앉아서 킬리언을 바라보자, 그는 놀란 듯 굳은 얼굴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목소리, 당신 설마―….”

“와, 설마 목소리로 눈치채실 줄은 몰랐는데. 기억력이 좋으시네요, 세네카 소공작.”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후드를 젖혔다.

딱딱하게 얼어붙은 표정으로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킬리언이 천천히 숨을 내뱉으며 내 옆에 자리한 세이룬을 바라봤다.

“……그렇다면, 옆에 계신 분은 드레인 대공 전하이시겠군요.”

세이룬은 말없이 후드를 젖힌 뒤 짧게 고개만 끄덕였다.

잠시 나와 세이룬을 번갈아 보며 침묵하던 킬리언은 다시 내게로 시선을 고정한 뒤 제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연기를, 하셨군요. 그곳에서.”

“그런 셈이죠. 부디 감쪽같았어야 할 텐데.”

“그때 제게 빚을 지운 것도, 일부러 이 상황을 계산하고 하신 겁니까?”

킬리언의 청색 눈동자가 경계의 빛을 띠며 나를 살폈다.

문득, 그때의 감정이 어렴풋이 생각나 옅은 실소가 흘러나왔다. 나는 느릿한 손동작으로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올렸다.

“소공작께서는 ‘에리카 르 셀루리아’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신가요?”

“…….”

“에리카 르 셀루리아는 구교파의 중심 귀족인 셀루리아 후작의 조카딸이죠. 드레인 가문에 시집간 지금은 드레인 대공비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드레인 대공비가 해수라니, 정말 모순적이지 않나요? 심지어 해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셀루리아의 금전줄을 틀어막은 장본인인데.”

“하시고 싶은 말씀이 무엇입니까.”

킬리언이 조용히 물었다.

나는 찻잔을 기울여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에리카 르 셀루리아는 펠리페 르 셀루리아 후작의 조카딸이자, 학대 대상이었어요.”

“……예?”

“제 몸이 약하다는 핑계로 사교계에서 고립시키고, 그 후에는 레틸기스 즙을 이용해서 자아마저 빼앗으려고 했죠. 저는 그 학대를 당해 주는 척하면서 해수라는 가명으로 금전을 굴린 거고요. 도망갈 구멍이 필요했으니까.”

“…….”

킬리언의 눈동자가 충격을 받기라도 한 듯 가늘게 흔들렸다.

하긴, 그동안 정치적으로 비교적 가깝게 교류하며 지냈던 가문에서 ‘학대’라니. 올곧은 정도만을 걸어온 그에게는 다소 충격적인 얘기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찻잔을 내려놓은 뒤,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이어 말했다.

“저는 셀루리아 후작 가문에 복수를 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 복수에 소공작께서 힘을 보태 주시길 원해요.”

“지난번 지워 둔 빚을 빌미로, 저를 협박하실 생각입니까.”

“협박은 이런 게 아니죠. 이런 게 협박이지.”

내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나는 비밀을 속삭일 사람처럼 천천히 상체를 기울인 다음, 경계의 빛이 가득한 킬리언의 얼굴에 대고 한 글자 한 글자씩 또박또박 말했다.

“저는 당신이 신교의 교황 성하와 연인 관계라는 것을 알고 있답니다.”

“……!”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방금까지 보여 줬던 것들은 동요가 아니었던 것처럼 킬리언이 동요했다.

파문이 일듯 거칠게 일렁이던 푸른 눈동자가 이내 적개심을 담고 나를 노려보았다.

살의마저 묻어나는 그 생생한 적의에 반응한 세이룬이 살기를 드러내려고 하자, 나는 얼른 손을 뻗어 세이룬을 다독였다.

“이제 협박이 성립되었네요. 저는 소공작의 힘을 원해요. 정확히 말하자면, 소공작과 바네사 교황 성하의 힘을 원한다고 할 수 있겠죠.”

“……비전하.”

턱에 잔뜩 힘을 준 킬리언이 이를 악물며 나를 불렀다.

나는 입가에 걸친 웃음기를 전부 없앤 다음, 진지한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티파티는 구교파의 실세들이 모인 사교 모임이었죠. 그런 중요한 곳에서 소공작께서는 그들과 적극적으로 친목을 도모하지 않으셨고요.”

“…….”

“구교파에 애착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약점이 잡혀 있는 것도 아닐 테고. 오히려 구교파의 중심축 중 하나를 기울여 구교파를 느슨하게 만드는 것이 성하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여러모로 도움이 될 텐데요.”

불현듯, 킬리언의 적의가 반쯤 사그라들었다.

잠시 침묵하던 그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셀루리아 후작가는 이미 위험한 곳과 깊숙이 얽혀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곳을 건드는 것은 자칫 잘못하면 신의 섭리를 거스르는 것이라 여겨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그리 여겨지지만 않으면 되죠.”

“……정말로, 황가에 반할 생각입니까.”

킬리언이 머리가 아픈 것처럼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심신이 지친 듯한 그 모습이 왠지 오늘 티파티 때의 모습보다 배는 더 수척해 보여서 조금 양심이 찔렸다.

‘신아야, 미안.’

내가 네 남주를 피곤하게 만들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황가에 반하다니, 그런 거 아니에요. 음, 그냥 살짝 비트는 정도?”

“……비트는?”

“황가에 후계자가 하나인 건 아니잖아요.”

킬리언은 잠시 침묵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미 후계자는 신의 명에 따라 현 황태자 전하로 정해졌습니다. ……한낱 인간으로서 감히 신이 내리신 권한을 거스를 수는 없습니다.”

“소공작께서는 신교가 왜 등장했다고 생각하세요?”

내가 나직이 물었다.

대답을 찾는 듯 잠시 입술을 달싹거렸던 킬리언은 다시 도로 입을 다물었다.

그런 그를 보며 나는 다시 말을 이었다.

“위에서부터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구교가 멀쩡히 존재하고 있는데도 신교가 등장했다는 건, 구교에 문제점을 느낀 사람이 많다는 걸 반증하죠. 그리고 신교는 등장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민중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고요.”

“…….”

“이 일에 대해, 신께서는 과연 아무런 개입도 하지 않았을까요?”

“…….”

“실은 의심하고 있잖아요. 구교의 정당성에 대해.”

한순간 정곡을 찔린 킬리언이 주춤거렸다.

그가 입술을 깨물며 주먹을 꽉 쥐었다. 혼란스러워하는 그의 속마음이 투명하게 드러났다.

신아가 설정한 킬리언은 고지식할 정도로 융통성 없이 정도만을 고집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단지 사랑이란 감정만으로 신교의 교황인 바네사와 비밀 연애를 하는 것일까?

‘절대로, 아니.’

킬리언은 바네사의 정의와 신념에 온전히 교감하고 있기에 바네사와의 관계를 지속해 나가고 있는 것이었다.

만약 킬리언이 바네사의 신념을 이해하지 못했더라면, 그는 신교를 철저히 탄압한 뒤 바네사를 고립시켜 제 공간 깊숙한 곳에 가두려 했을 것이다.

그 누구도 바네사를 해하지 못하고, 바네사 또한 그릇된 길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그것이 킬리언이 생각하는 ‘정의를 수호하는 방법’이었다. 왜냐면, 그게 신아의 취향이니까.

“……비전하께서는, 이레알 교의 경전을 읽어 보셨습니까.”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세게 깨물고 있던 킬리언이 이내 나직이 물었다.

내가 고개를 젓자, 그가 힘없이 미소 지었다.

“이레알 교의 경전은 오로지 경전을 적고 읽기 위해 고안된 문어(文語)인 ‘이레알 어’로만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레알 어는 단어가 어렵고 문법이 복잡할 뿐만 아니라 어형 변화까지 심히 불규칙하여 적어도 일 년은 온전히 이레알 어에만 몰두해야 겨우 경전을 독해할 수 있죠.”

아닌데. 신아는 아무리 언어에 소질이 뛰어난 사람이라 해도 5년은 족히 이레알 어에만 매달려야 겨우 경전을 독해할 수준이 된다고 설정했는데.

‘……그런데, 왠지 말이 조금 묘하다?’

마치 저걸 꼭 경험해 본 사람처럼…….

“그렇게 이레알 어를 공부하여 직접 읽게 된 경전은, 구교의 교황 성하께서 설파하시는 설교의 내용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돌았.”

“예?”

“아, 아니요. 저 아무 말도 안 했어요. 계속 말씀하세요.”

나는 서둘러 두 손을 내저으며 무해하게 웃어 보였다.

잠시 미심쩍은 눈빛으로 내 기색을 살피던 킬리언은 다시 천천히 말을 이어 갔다.

“신의 말씀으로 이루어진 경전은 그 자체로 모호하나, 의도적으로 곡해하지 않는 한 다르게 해석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구교의 교황 성하의 설교는…….”

차마 말을 이을 수 없던 킬리언이 말끝을 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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