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흐린 눈을 뜬 나는 슬슬 몸을 뒤로 물렸다. 왠지 아쉬워하는 듯한 시선이 나를 좇았다.
그런 시선 같은 건 전혀 눈치채지 못한 나는 문득 잊고 있었던 계획을 떠올리고 짝 손뼉을 치며 세이룬을 바라봤다.
“아, 맞다. 세이룬, 나 세네카 소공작에게 볼일이 있는데, 다른 사람들이 눈치 못 챘으면 좋겠거든.”
“……세네카 소공작이라면, 그때 그 빚 때문에 만나시려는 겁니까.”
세이룬이 볼을 불퉁하게 부풀렸다.
그 심통 난 아이 같은 모습에, 불현듯 지난번 내가 킬리언에게 빚을 달아 뒀을 때 샤샤가 울상을 지으며 ‘쟤, 빚, 싫어’라고 투정 부렸던 게 떠올랐다.
나는 키득키득 웃으면서 세이룬을 바라봤다.
“왜, 우리 샤샤 또 질투하는 거야?”
“……그냥 제가 황가를 쓸어 버리고 빈 황좌에 사피엔 황자를 앉히면 안 됩니까?”
저 잘할 수 있습니다. 세이룬이 허락을 구하는 것처럼 나를 빤히 응시했다.
나는 여전히 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두 손을 뻗어 세이룬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렇게 게 눈 감추듯 부족한 명분으로 황좌의 주인을 바꿔 버리면 안 돼. 분명 타국에서 반정의 명분을 빌미로 시비를 걸어올 거고, 정세도 더 불안정해질 거야.”
그러면 치워야 할 똥이 더 많아지게 돼. 나는 토라진 아이를 달래듯 조곤조곤 말했다.
여전히 불퉁한 얼굴로 내 말을 듣고 있던 세이룬은 이내 알겠다는 듯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이들의 이목을 피하고 싶다 하셨지요.”
“응응. 그래서 시간대는 아무래도 밤이 가장 좋을 것 같은데.”
한숨이 더 커졌다.
“오늘 밤, 아무도 모르게 세네카 공작저로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응! 고마워, 샤샤!”
나는 활짝 웃으면서 세이룬을 와락 껴안았다.
세이룬이 슬쩍 고개를 돌리면서 “네……”하고 중얼거렸다.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귀가 발갛게 달아올랐다.
* * *
“소공작님, 온실의 자리 모두 정리가 완료되었습니다.”
하인이 고했다.
티파티가 파한 뒤 집무실로 돌아와 서류를 보고 있던 에스로타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이만 나가 봐.”
“예, 소공작님.”
정중한 대답을 끝으로 문이 닫혔다.
마저 보던 서류에 서명을 마친 에스로타는 다음 장을 넘기려다가 문득 손을 멈췄다.
잠시 머뭇거리던 녹금빛 시선이 책상 한편에 올려져 있는 선물 상자로 향했다.
선뜻 열어 볼 엄두가 나지 않아 아직도 처음 포장된 상태 그대로 놓아둔 에리카의 선물이었다.
‘열어 볼 용기도 없으면서 신경은 계속 쓰고 있지…….’
선물을 빤히 바라보던 에스로타는 결국 손을 뻗어 상자를 앞으로 가져왔다.
무의식적으로 상자의 모서리를 쓰다듬던 그녀는 이내 천천히 뚜껑을 열었다.
“……하.”
그리고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안에는,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고 멜리아 왕국의 원문 시문집이 들어있었다.
“……내가 이 시문집의 원문을 찾고 있었다는 건, 대체 어떻게 안 거야.”
그동안 한 번도, 내 초대에는 응해 주지 않았으면서.
묘한 서러움 덩어리가 맺히기라도 한 듯 가슴이 답답했다. 어렸을 때나 느꼈던 것을 이제 와서 느끼다니, 참 우습기도 하지.
에스로타는 책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린 뒤 느리게 책장을 한 장 넘겨 보았다.
정말로, 멜리아 왕국의 원문으로 적힌 시문집이었다.
에스로타는 가슴 속에서부터 벅차오르는 감정을 삭이기 위해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시문을 좋아했다.
처음에는 몽글몽글하고 예쁜 단어들을 나열하면 더 예쁜 뜻을 가진 문장이 돼서 좋았다. 좀 더 배우고 나서는 문장이 모여 하나의 이야기를 지어낸다는 것이 신기해서 좋았고, 더 자라서는 이야기를 이루는 단어 하나하나에 담긴 함축적 의미가 모여 결국 커다란 반전을 이뤄 내는 것에 매력을 느꼈다.
에스로타가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에리카에게 호감을 가지게 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공녀님, 제가 예전에 예술계의 난제라고 보여 드렸던 시 ‘하늘, 별, 바람, 꽃’을 기억하십니까?”
“네, 물론 기억해요. 그 안에 적용된 알레고리가 무척이나 난해하다고 설명해 주셨잖아요.”
“네, 그랬었죠. 그런데 지난번 셀루리아 후작가의 에리카 영애께서 수업 시간에 그 시의 알레고리를 새롭게 해석하신 걸 보고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9살에 그런 획기적인 발상이라니, 천재란 그분을 두고 이르는 말이 아닐까요.”
칭찬이 박하기로 유명한 셀레타 박사에게 ‘천재’라는 칭찬을 들은 사람이 무려 자신 또래의 영애라니. 그것도 자신이 좋아하는 시문학 분야에서 말이다.
사소한 호기심으로 시작했던 마음은, 에리카의 알레고리 해석을 듣는 순간 호감으로 바뀌어 버렸다.
호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에리카와 시문에 대해 토론하고 싶다는 생각만으로도 에스로타는 이미 설렜다.
“어머니, 셀루리아 후작가의 에리카 영애에게도 초대장을 보냈나요?”
그 뒤로, 에스로타는 베이센 공작 부인이 사교 모임을 개최할 때마다 어머니에게 매달려 에리카에게 초대장을 보냈는지 물었다.
공작 부인은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친구가 오기를 기대하는 딸이 귀여워서 웃으며 초대했다고 대답해 주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에리카가 베이센 공작가의 초대에 응하는 일은 없었다.
“카리에 영애, 다음에는 꼭 에리카 영애와 함께 와 주시길 부탁드려요.”
그렇게나, 간곡하게 부탁했는데도.
늘.
셀루리아 후작 부부는 에리카의 불참 이유에 대해 아이가 아프다는, 늘 판에 박힌 말만 되풀이했다. 그리고 카리에 영애는 어느 날, 상심해 있는 자신에게 조심스레 다가와 커다란 비밀을 알려 주는 것처럼 부드럽게 속삭였다.
에리카가 안 오는 진짜 이유는, 이런 곳에 오기 싫어서였노라고.
“……이미 지나간 일인데.”
에스로타는 무감한 시선으로 에리카의 선물을 내려다봤다.
“실은, 저 그동안 정말로 에스로타의 티파티에 꼭 한번 초대받고 싶었어요. 저에게 과분한 일이지만, 저는 예전부터 에스로타와 친하게 지내고 싶었었거든요…….”
이제 와 아무 의미도 없어졌지만, 분명 지난번 세사르에서 만난 에리카는 자신의 티파티에 초대받고 싶었노라고, 예전부터 자신과 친하게 지내고 싶었었노라고 말했다.
마치, 그동안 한 번도 초대를 받아 보지 못했던 것처럼.
“그분들이…… 저를 반가워하실까요?”
“저는 이런 귀한 것을 받을 자격이 없어요. 카리에의 서신이 온 줄도 모르다니…….”
“원래…… 저는 그래야 해요.”
“제가 티파티에 초대받았다고 대공 전하께 자랑했거든요……. 그래서 대공 전하께서 처음 사귀는 친우들에게 선물하라고 마련해 주셨어요.”
에스로타는 지난번 에리카와 만났을 때 들었던 말들을 천천히 곱씹었다.
어쩌면.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어쩌면.
잠시 고민하던 에스로타는 이내 손을 뻗어 책상 위 한구석에 올려져 있는 종을 울렸다.
곧, 그녀의 보좌관인 세레스 아케넨 남작이 안으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세레스, 네가 해 줘야 할 일이 있어.”
“말씀하십시오.”
에스로타는 천천히 시선을 내려 다시금 에리카의 선물을 응시했다.
그녀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녹셰에서 셀루리아 영애 시절의 에리카에 대한 정보를 모두 긁어 와. 돈은 얼마가 들어도 좋아.”
“알겠습니다.”
“그리고, 셀루리아에 사람을 심어 놓도록 해. 알아보고 싶은 게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얌전히 복종한 세레스가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혔다.
잠시 무거운 눈으로 시문집을 응시하던 에스로타는 천천히, 다시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 * *
‘아무도 모르게 모셔다드리는’ 건, 대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저번에 샤샤가 내게 만들어 준 빵처럼 뭔가 신이한 능력을 사용해서 순간이동 시켜 주려나? 아니면 그냥 가문 표식 없는 마차를 타고 좀 멀찍한 곳에서 내려서 걸어가나?’
나는 평범함 그 자체인 갈색 커틀 위에 검은색 클록을 걸치며 이런저런 가능성을 떠올렸다.
그리고 실제 방법은, 나로서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방법이었다.
“정말로 그렇게 갈 수 있어? 그것도 나까지 안고?”
모 애니의 인물들처럼 지붕과 담 위를 달려서 간다니.
나는 세이룬의 목에 두 팔을 힘껏 휘감은 채 물었다.
나를 공주님처럼 안아 들고 창틀에 발을 올린 세이룬이 풋 웃음을 터뜨렸다.
저택 안 사람들도 모르게 나가는 거라 눈가리개를 착용하지 않은 그의 눈동자가 곱게 휘어졌다.
“네, 가능합니다. 저는 용족이니까요.”
“아, 맞다. 우리 샤샤는 귀엽고 깜찍한 용이었지 참.”
하도 인간형의 모습만 봐서 그런지 무의식적으로 세이룬을 인간이란 틀에 끼워서 판단한 모양이었다.
“수인족이면 모두 가능한 일입니다.”
그렇게 덧붙인 세이룬이 창에서 뛰어내렸다.
갑자기 몰아닥친 아찔한 부유감을 즐긴 뒤에, 나는 의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수인족?”
“대공령에 있는 모든 이들이 바로 수인족입니다.”
세이룬이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말이 잠시 이해가 가지 않아서 멍하니 눈을 깜박이던 나는 이내 경악한 얼굴로 세이룬을 올려다봤다.
“……타한도?”
“네.”
“포카와 레비나도? 세이룬 친구인 체사 씨도? 전부?”
“네, 그렇습니다.”
“……아하.”
어떻게 로판 소설에서 엑스트라 하인들의 미모가 수준급인가 했었는데, 수인족이라서 그랬던 거였군. 그렇군. 그랬던 거였어.
‘그래서 내가 뭐만 하면 다들 그렇게 내 몸을 걱정했던 거구나.’
내가 한없이 연약하고 가녀린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라서 말이지…….
나는 눈을 흐리게 뜨며 먼 산을 찾았다. 대공령에 있었을 때, 빈센트가 오기 전까지 내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 모두가 인간이 아니었다니. 왠지 기분이 묘했다.
아무튼, 내가 대공령 사람들의 정체에 놀라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사이, 용 고유의 기운(세이룬은 이걸 ‘해인(瀣氤)’이라 부른다고 알려 줬다)을 펼쳐 어둠에 녹아든 세이룬은 단 한 명의 목격자나 흔적도 남기지 않고 무사히 세네카 공작저 근처에 도착했다.
세이룬의 품에서 내려와 바닥에 발을 디딘 나는 후드로 얼굴을 다시 한번 꼼꼼히 가린 뒤 세이룬과 함께 공작저 정문으로 걸어갔다.
“멈춰라. 이곳은 세네카 공작저다. 신원을 밝혀라.”
내 앞을 창으로 가로막은 문지기가 경계하는 눈빛으로 나와 세이룬을 훑었다.
나는 여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세네카 소공작께 말씀드려 주게. ‘에리카’가 빚을 청산하러 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