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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박데기 영애의 반격을 조심하세요 (61)화 (61/139)

61화

“별말씀을요. 하지만, 에리카가 직접 움직이지 않아도 돼요. 이런 건 하인들이 할 일이니까요. 그들의 일을 빼앗지 말아요.”

내가 당장이라도 선물 더미 쪽으로 가려고 엉덩이를 들썩거리자, 에스로타가 재빨리 내 팔을 잡아채며 말했다.

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내 눈짓을 받은 포카와 레비나가 각 선물을 주인에게로 가져다주었다.

“저어……, 처음으로 사귀게 된 친우분들에 대한 저의 작은 성의예요. 부디 받아 주세요.”

모두에게로 선물이 돌아간 것을 확인한 내가 수줍게 말했다.

내 말에, 다소 경계하는 기색이던 영애와 영식들이 선물을 확인하고는 저마다 상기된 얼굴로 앞다투어 입을 열었다.

“어머, 이 귀한 것을…… 정말 감사히 잘 받을게요.”

“선물 감사히 받겠습니다, 비전하. 혹시 필요한 것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힘써 도와드리겠습니다.”

“상냥하신 비전하께서는 배려심도 많으시지. 언제 한번 제 저택에 방문해 주시겠어요? 최고의 예우로 대접하고 싶습니다.”

“아…… 모두들 그렇게 말해 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나는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배시시 웃었다. 볼 위로 떠오른 옅은 홍조가 웃음의 순수함을 더욱 극대화했을 것이다.

이후, 티파티는 카리에를 제외하고 편안하고 다정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새로운 인물의 등장에 경직되어 있었던 초반의 공기는 선물이 불러온 훈풍에 실려 모조리 사라진 지 오래였다.

역시, 초반에 사람의 환심을 사는 데에는 선물만 한 것이 없다.

‘그나저나, 한 사람도 해수가 셀루리아를 공격한 것에 대해 말을 꺼내지 않네.’

그것이 나를 몰아세우기 위해서는 가장 효과적인 공격 카드일 텐데 말이다.

뭐, 그런 말은 카리에에 대한 공격으로도 작용할 수 있는 말이니 카리에의 눈치를 보느라 꺼내지 않았을 가능성도 농후했다.

하지만, 온전히 카리에의 눈치만 본다기에는 떠도는 공기처럼 따뜻한 분위기만 넘실거리는 티파티에서는 ‘해수가 신교에 후원을 한다’는 등의 가시 섞인 경계조차 등장하지 않았다.

‘뭐…… 어쨌거나 좋은 게 좋은 거지.’

이만하면 내게 ‘여린 사람 프레임’은 잘 씌워졌을 터.

나는 속으로 음험하게 웃었다.

* * *

티파티가 파했다.

다소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카리에를 선두로 사람들이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무척이나 즐거웠어요, 여러분. 다음 티파티도 부디 참석해 주시기를 바랄게요.”

같이 자리에서 일어난 에스로타가 영애와 영식들을 향해 인사했다.

인사는 ‘부디 참석해 달라’는 부탁의 어조를 담고 있었지만, 실상은 다시 초대해 달라고 빌어도 시원찮다는 것을 여기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흡사 대학 측에서 면접을 보는 학생들한테 ‘좋은 결과 있기를 바랄게요’하는 급이랄까.

‘잔인한 경쟁의 세계…….’

내가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을 때였다.

“소공작님.”

공작가의 집사가 조심스럽게 에스로타에게 다가왔다.

“빈객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빈객?”

의아한 듯 되물은 에스로타가 곧이어 허락의 뜻으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온실의 문이 열리고, 곧이어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하나로 높이 올려 묶은 검은빛 머리카락에 일자로 굳게 다물린 붉은빛 입술, 그리고 얼굴의 절반을 가린 순백의 하얀 반가면.

그럼에도, 그 본연의 아름다움이 모두 가려지지 않는 사람.

“……세이룬?”

왜 그가 이곳에 와 있는 거지?

나는 들어온 사람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옆에서 들려오는 미모에 대한 감탄 소리와 뜬금없는 가면의 등장에 대한 의아한 소리에 문득 정신을 차리고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내 목소리에 반응하듯 곧장 나를 응시한 세이룬이 빙긋 미소 지으며 내게로 다가왔다.

“부인님.”

몇 발자국 걷지도 않았는데, 그는 어느 순간 내 앞에 와 있었다.

그가 내 볼을 엄지로 부드럽게 쓰다듬고는 물었다.

“친우분들은 잘 만나셨습니까?”

세이룬의 시선이 주위의 귀족들을 느릿하게 훑었다. 시선을 받은 귀족들이 흠칫 어깨를 떨며 시선을 피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천진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모두들 친절하게 잘 대해 주셨어요. 저, 이렇게 많은 친우분들이 생겨서 기분이 좋아요.”

“그러십니까.”

“근데 전하께서는 여기에 무슨 일로 왔나요?”

“부인님을 데리러 왔습니다.”

다시 내게로 시선을 맞춘 세이룬이 입꼬리를 부드럽게 휘어 올렸다.

주위에서 연발하듯 터지는 탄성을 들으며 부끄러운 듯 손가락을 꼼질거리던 나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아!”하며 고개를 반짝 치켜들었다.

“전하, 제 사촌인 카리에를 소개해 드릴게요.”

나는 활짝 웃으며 세이룬을 끌고 사람들 틈을 지나가 카리에 앞에 섰다.

여전히 하얀 낯의 카리에는 갑자기 제 앞에 선 장신의 남자를 보고 저도 모르게 흠칫 놀랐다.

“카리에와 전하께서는 서로 초면이시죠? 카리에, 여긴 내 남편이신 세이룬 르 드레인 대공 전하셔. 전하, 여기는 제 사촌인 셀루리아의 영애, 카리에예요.”

“……에리카에게 말씀 많이 전해 들었습니다. 셀루리아 후작 가문의 카리에가 드레인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카리에가 애써 웃음 지으며 세이룬에게 인사했다. 하지만 세이룬은 그저 나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 카리에의 인사에는 일언반구도 답하지 않았다.

“부인님,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너무 오래 밖에 나와 계신 것은 아닌지 걱정되는데…….”

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살폈다.

길고 단단한 손가락이 내 이마를 스쳤다가 뺨을 어루만졌다.

졸지에 무시당한 카리에는 손마디가 하얘질 정도로 옷자락을 꾹 쥐었다가 애써 표정을 수습했다. 주위에서는 귀족들이 감히 입을 열지는 못하고 눈짓으로 의사를 주고받고 있었다.

뒤에서 이 상황을 잠자코 지켜보던 에스로타가 생긋 웃으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베이센 소공작, 에스로타가 드레인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그대가 이 티파티의 개최자로군.”

에스로타에게로 천천히 시선을 돌린 세이룬이 무감정한 목소리로 인사에 답했다.

에스로타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금 웃었다.

“그렇습니다. 조촐한 제 티파티에 에리카가 참석해 주셔서 정말 감사히 생각하고 있어요.”

“……에리카?”

불현듯 세이룬의 미간이 슬쩍 좁혀졌다.

나는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와 에스로타는 서로 이름을 부르기로 했어요.”

“……아아.”

그렇게 중얼거린 세이룬이 돌연 화사하게 웃었다.

그 웃음이 흡사 독을 머금은 장미처럼 위험해 보여서, 나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그가 내 머리카락을 한 줌 가져가 그 위에 입술을 대며 속삭였다.

“제 부인님은 이름마저도 공공재로군요.”

“…….”

“그 이름은 저만을 위한 이름이길 바랐는데.”

아쉬움을 담은 진득한 손길이 천천히 머리카락을 놓아주고 나서야, 나는 정신을 차리고 다시 숨을 쉴 수 있었다.

순간 연기고 나발이고 하도 심장이 뛰어 대는 통에 우주를 부실 뻔했다.

“하하, 두 분 전하께서는 정말 금슬이 좋으시네요. 에리카, 좋은 남편을 두셔서 부러워요.”

에스로타가 다정하게 눈을 접어 웃으며 내게 말했다.

문득, 나는 에스로타의 말에서 무언가 위화감을 읽어 냈다.

나는 “감사해요”하고 조그맣게 중얼거리면서 슬쩍 카리에를 곁눈질했다. 카리에는 입술을 꾹 깨물며 에스로타를 노려보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이상하단 말이야.’

나는 오늘 구교파 귀족들에게 몇 가지 떡밥을 던졌다.

카리에에게 내가 묘하게 저자세를 취한다는 것과, ‘해수’라 알려진 내 성정이 유난히 여리고 상냥하다는 것.

게다가 세이룬이 와 준 덕분에 ‘대공 부부는 사이가 좋다’는 것과 ‘대공은 카리에를 대놓고 무시할 만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까지 떡밥으로 던져졌다.

‘그런 와중에, 세이룬을 ‘좋은 남편’이라 말한다고?’

부인의 사촌 동생을 무시하는 남편이 ‘좋은 남편’이라.

이 일련의 떡밥이 가리키는 바는 과연 무엇일까.

눈치챌 만한 사람들은 이미 어렴풋이 눈치채고도 남았을 법한 떡밥이지 않은가.

‘……에스로타는 분명 구교파의 중심 귀족 중 하나인데.’

그런데 왜 나한테 이토록 호의적이지?

“아, 제가 두 분을 너무 붙잡아 두고 있었네요. 다음에 뵐 수 있기를 고대하며, 부디 안녕히 귀택하시길.”

에스로타가 능숙하게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네, 에스로타.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다음에도 꼭 초대해 주세요.”

에스로타에게 환하게 인사한 나는 몸을 돌려 여전히 하얗게 얼어 있는 카리에에게 다가갔다.

“카리에, 음…… 전하께서 아마도 낯을 많이 가리시는 것 같아. 아까의 일은 내가 대신 사과할게. 정말 미안해…….”

“아니야, 에리카. 난 괜찮아. 다음에 정식으로 다시 인사하면 되니까 신경 쓰지 말고 이만 가 봐.”

카리에는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내게 말했다.

나는 그 말을 정말로 믿는 것처럼 활짝 웃으며 “정말 고마워!”하고 인사한 뒤, 세이룬과 함께 그곳을 나왔다.

* * *

세이룬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 안으로 들어간 뒤 문이 닫히고서야, 나는 연기하며 웃느라 잔뜩 굳어 버린 얼굴 근육을 힘차게 풀었다.

“푸르르, 푸하 푸하.”

“……풋.”

맞은편에서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시선을 들어서 맞은편을 바라보자, 세이룬이 웃음을 참는 것처럼 입을 가리며 연신 목을 가다듬고 있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나도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다.

“뭐가 그렇게 웃겨.”

“안 웃, 큼. 안 웃었습니다.”

“방금 또 웃었는데.”

“아닙, 아닙니다.”

“아닌데, 웃었는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세이룬 쪽 좌석에 털썩 앉았다.

그러고는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대고 “응, 응?”하고 묻자, 갑자기 코앞으로 훅 다가온 내 얼굴에 놀란 세이룬이 흡 하고 짧게 숨을 들이켰다.

“나도 같이 웃자. 뭐가 그렇게 재밌어서 웃어.”

“……티파티에서, 에리카가 여린 척을 했을 거라 생각하니 왠지 귀엽게 느껴져서요.”

그가 슬쩍 시선을 피한 채 웅얼거렸다.

“실은, 무척이나 강인하신 분인데.”

“…….”

같이 웃고 싶어서 물어봤더니, 전혀 공감이 안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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