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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박데기 영애의 반격을 조심하세요 (60)화 (60/139)

60화

수세에 몰린 후작이 이 상황을 무마하고자 서둘러 입을 열었다.

“참, 에리카. 이건 우리가 준비한 선물이란다. 네가 그렇게 좋아하던 우리 가문의 흑차야.”

후작이 손짓하자, 그 뒤에 시립해 있던 하인이 미리 준비해 둔 선물 상자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나는 대충 기쁜 표정으로 상자 뚜껑을 열어 보고는 활짝 웃었다.

“정말 감사해요. 꼭 먹어 보고 싶었었는데, 세사르에서는 더 이상 납품이 안 된다고 해서 슬펐었거든요…….”

나는 포카를 불러서 선물 상자를 챙기라고 지시했다.

물론 후작과 후작 부인이 아무 생각 없이 이 흑차를 선물로 가져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해수’가 망쳐 놨던 셀루리아의 차 사업은 아직 건재하다는 것을 직접 보여 주기 위해 가져왔겠지.

그 증거로, 그들은 내가 선물을 갈무리하는 동안 아닌 척 세이룬의 기색을 살피고 있었다.

물론 세이룬은 저 흑차에 아무 관심도 없었지만.

‘어쩌면, 정계에 아무 관심도 없는 드레인 가문의 특성상 셀루리아가 흑차를 생산한다는 것조차 모를지도…….’

흠흠. 후작 부부는 엄청난 자의식 과잉이었던 걸로. 그 자신감은 높이 사도록 하죠.

그 뒤로 무의미하게 이어지던 어색한 담화는 얼마 가지 못하고 흐지부지하게 끝났다.

후작과 후작 부인은 세이룬의 냉대에 잔뜩 심기가 상한 채로 돌아갔다.

‘하지만 황실과의 결합을 앞둔 셀루리아가 대공가와의 불화를 다른 곳에서 대놓고 말하고 다니지는 않겠지.’

뭐, 아무래도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어깨를 으쓱이며 셀루리아에 대한 생각을 멀리 떨쳐 낸 나는 빈센트와 체사를 호출했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 * *

한동안 계속 흐리던 날이 개었다.

옅은 푸른색의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며 말발굽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자니, 어느새 티파티가 열리는 베이센 공작가에 도착해 있었다.

‘후우. 나는 상냥하고 연약한 레이디다. 나는 상냥하고 연약한 레이디다…….’

심호흡을 하며 자기 세뇌를 마친 나는 마차가 완전히 멈추자 포카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서 다소곳이 내렸다.

“어서 와요, 에리카. 기다리고 있었어요.”

내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근처에 서 있던 에스로타가 활짝 웃으며 내게로 다가왔다.

‘베이센 공작가는 손님을 맞을 때 보통 주인이 나서서 맞이하나?’

잠시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이내 나는 그 쓸데없는 의문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고는 방긋 웃음 지었다.

“네, 소공작― 아니, 에스로타…….”

조금 수줍은 듯이 말끝을 흐리며 슬쩍 에스로타를 흘끗거리자, 에스로타가 여동생을 귀여워하는 언니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네에, 그렇게 이름을 불러 주세요, 에리카. 그런데 뒤에 있는 그 상자들은 다 뭔가요?”

에스로타가 의아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나는 배시시 웃으며 미리 준비해 왔던 대답을 꺼냈다.

“제가 티파티에 초대받았다고 대공 전하께 자랑했거든요……. 그래서 대공 전하께서 처음 사귀는 친우들에게 선물하라고 마련해 주셨어요.”

은근슬쩍 나는 드레인 대공과 사이가 좋다는 떡밥을 흘렸다.

그래서, 지난번 세사르에서 보여 줬던 그 이상한 태도는 대공가 때문이 아님을 못 박을 수 있도록.

내 대답을 들은 에스로타는 의중을 알 수 없는 눈동자를 한차례 깊이 감았다 떴다.

에스로타가 나를 보며 다시금 웃었다.

“대공 전하께서는 참으로 사려가 깊은 분이시네요.”

“……맞아요. 엄청 상냥하시고, 자상한 분이세요.”

나는 부끄러운 듯 볼을 붉히며 손가락을 꼼실거렸다.

그런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에스로타가 내게 한 손을 내밀었다.

“그럼, 이제 친우들을 만나러 같이 갈까요?”

“네, 좋아요.”

나는 배시시 웃으며 에스로타의 손을 맞잡았다.

에스로타의 안내에 따라 도착한 곳은 무척이나 고풍스럽게 꾸며져 있는 화원의 온실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늦게 온 것인지, 티파티에 맞춰 세팅된 자리에는 세 자리를 제외한 모든 자리가 채워져 있었다.

저마다 소소하게 수다를 떨던 사람들이 나와 에스로타의 등장에 딱 입을 다물었다. 나는 에스로타의 다정한 에스코트를 받으며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티파티에 참석한 모두의 시선이 나와 에스로타에게 쏠렸다. 내 뒤쪽으로 선물 상자들이 바쁘게 날라지고 있는데도 전혀 궁금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자리에 앉은 나는 누군가를 찾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에스로타의 옆자리 하나가 비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다급히 에스로타에게 물었다.

“에스로타, 카리에는 안 왔나요? 언제 오나요? 분명, 분명 온다고 들었는데……!”

“침착해요, 에리카. 셀루리아 영애는 잠시 황실에 일이 생겨서 조금 늦을 거라고 연락이 왔어요. 곧 오실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부들부들 떨고 있는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에스로타가 부드럽게 나를 다독였다.

테이블 위를 슥 훑어보던 그녀가 수많은 디저트 중에서 딱 봐도 가장 맛있어 보이는 것들을 골라 내 앞에 가져다주었다.

“에리카가 오신다고 하셔서 저희 주방장이 힘을 써 만든 것들이랍니다. 맛있을 테니, 다과를 들며 같이 셀루리아 후작 영애를 기다려 봐요.”

구교파의 쟁쟁한 영애, 영식들이 모두 모여 있는 이 자리에서 왜 내게 대놓고 이런 호의를 베푸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일단 해맑게 웃으며 디저트를 받았다.

“와, 감사합니다……!”

자고로 맛있는 것은 항상 옳다. 나는 포크를 들고 쇼트케이크를 한 입 떠먹으며 슬쩍 티파티의 구성원을 살폈다.

‘체사 씨가 알려 준 대로 역시 우리의 남주 씨도 와 있네.’

마치 독야청청하는 것처럼, ‘신.로.줄’의 남주 킬리언은 저 홀로 동떨어져 속세를 벗어난 듯한 분위기를 풍기며 차를 마시고 있었다.

내가 속으로 남몰래 음흉한 미소를 지었을 때였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갑작스레 일이 생겨 조금 늦은 것에 양해 부탁드려요.”

카리에가 공작가 집사의 안내를 받으며 온실에 들어섰다. 우아하게 자리에 착석한 카리에가 생긋 미소 지었다.

괜찮다고, 당연히 이해한다는 목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그 목소리들을 즐기며 천천히 사람들을 둘러보던 카리에의 시선이 마침내 내게 닿았다.

푸르른 청공을 닮은 은청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에리카, 내 사촌. 정말 오랜만이네.”

“……카리에.”

나는 조금 들뜬 듯하면서도 불안한 기색으로 카리에의 눈치를 살폈다.

그래도 카리에가 여전히 상냥하게 웃고 있자, 나는 그제야 안심한 것처럼 환하게 웃었다.

“카리에, 나 너에게 주려고 선물 가져왔어.”

“……선물?”

찰나, 카리에의 미간에 금이 갔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나는 무해하게 웃으면서 직접 자리에서 일어나 뒤편에 쌓아 놓은 선물더미 쪽으로 갔다.

“비전하, 이런 허드렛일은 저희가…….”

미리 맞춘 대로, 포카와 레비나가 쩔쩔매는 척을 하며 내게 카리에 몫의 선물 상자 두 개를 건넸다.

나는 “아니야, 내가 직접 주고 싶어서 그래”하고 대답하며 곧장 카리에에게로 뛰듯이 걸어갔다.

“카리에, 이거!”

“……이게 뭐야?”

불쾌감을 삼켜 웃은 카리에가 내게서 선물을 받았다.

나는 배시시 웃으며 카리에 앞에서 직접 상자 뚜껑을 열었다.

“너 곧 있으면 성혼식 올리잖아. 새로운 황태자비 전하의 건강을 기원하며 동방에서 산삼꿀을 공수해 왔어.”

60년근 산삼과 천연 벌꿀로 만든 거라, 특별히 더 몸에 좋을 거야. 아무렇지도 않게 덧붙이자, 사람들 사이에서 경악 어린 웅성거림이 퍼져 나갔다.

“헉. 산삼꿀이요? 유통비만으로도 어마어마해서 웬만한 귀족도 쉽게 엄두 내지 못하는 바로 그……?”

“그것도 60년근 산삼에 자연 채취 벌꿀이라니, 대체 얼마가 들었을지…….”

“비전하께서 바로 그 해수시잖아요……. 그 정도는 샌드위치값도 아니다, 이거겠죠?”

영애와 영식 중 대다수의 시선이 부러움을 담은 채 카리에에게로 향했다.

정작 부러움을 한 몸에 받은 주인공인 카리에는 물끄럼한 시선으로 백자 단지에 담긴 꿀을 응시하다가 뚜껑을 닫았다.

“정말 고마워, 에리카. 잘 받을게.”

“응……! 아 그리고, 선물 하나 더 있어.”

나는 들고 있던 다른 상자도 그 위에 얹으며, 해맑은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내가 셀루리아 저택을 떠나서 드레인 대공령으로 향하기 전에, 외숙모께서 고급 차라고, 혼인으로 심란한 마음을 달래 줄 수 있을 거라고 하시면서 물병에 차를 담아 주셨거든. 그 차가 너무 좋아서 아껴 마시다가, 이렇게 좋은 걸 받기만 하는 건 너무 몰염치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

“마침 나한테 돈도 많이 생겨서, 고급 차라도 셀루리아에게 선물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그래서 상인에게 차에 들어간 걸 구해 달라고 했는데, 과일즙이 들어갔다고 해서…… 그냥 즙만 선물하기에는 좀 밍밍할 것 같아 설탕을 듬뿍 넣은 청으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어.”

순간, 카리에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카리에가 떨리는 손끝을 황급히 아래로 내려 숨겼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더욱 무해하게 웃었다.

“나는 비록 셀루리아에서 나와 먼 타지에서 살게 됐지만, 마지막에 외숙모께서 주신 차를 마시며 그 안에 담긴 셀루리아의 온기를 느낄 수 있었어. 그 다정함이 너무 감사해서 네 편으로 이 청을 선물하려고 해. 그리고 저번에 외숙부와 외숙모께서 오셨을 때 내게 셀루리아의 흑차를 선물해 주신 것에 답례이기도 하고.”

“……응, 돌아가서 부모님께 네 마음에 대해 전해 드릴게. 선물, 고마워.”

카리에가 웃었다.

나는 그 고맙다는 인사가 기뻐 어쩔 줄 모르는 것처럼 우물쭈물하다가, 이내 에스로타의 손길에 따라 내 자리로 돌아왔다.

“에리카, 셀루리아 영애의 선물뿐만 아니라 저희 모두의 선물도 준비해 주셨다고 하지 않았나요?”

에스로타가 슬며시 녹금안을 접어 웃으며 물었다.

에스로타의 입에서 나온 ‘셀루리아 영애’와 ‘에리카’란 호칭에 카리에가 움찔한 사이, 부러운 눈으로 카리에를 바라보며 저들끼리 속닥거리고 있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몫도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들떠서 내게로 시선을 주었다.

나는 그제야 생각난 것처럼 “아!”하며 두 손을 맞잡았다.

“맞아요. 카리에에게 선물을 제일 먼저 줘야 해서 잠시 잊고 있었어요. 말해 줘서 고마워요, 에스로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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