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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박데기 영애의 반격을 조심하세요 (59)화 (59/139)

59화

“……!”

나는 베개를 학대하던 손을 당장 멈췄다.

숨마저 멈춘 채로 잠시 문을 뚫어져라 응시하던 나는,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고 나서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 아뇨. 큼. 아직 안 자요.”

그렇게 대답했다가, 문 너머로 들려오는 세이룬의 낮은 웃음소리를 듣고 나는 내가 존댓말을 썼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다면,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세이룬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물어왔다.

나는 해탈한 얼굴로 대답했다.

“응, 들어와…….”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문이 열렸다.

방 안으로 들어온 세이룬은 역시나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그것도 두 손으로 다소곳하게,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소중한 것을 들고 있는 것처럼.

‘와, 꽃을 든 남자네.’

한쪽으로 가볍게 묶어 내린 검은빛 머리카락과 살포시 내리뜬 금빛 은빛 눈동자, 그리고 입가에 배시시 지어진 귀여운 미소.

눈이 아플 만큼 수려한 미인이 다소곳이 꽃을 든 채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눈을 안 가린 건 다른 사람들이 없어서 그런가. 행복하다…….’

“에리카?”

그 황홀한 모습에 멍하니 세이룬을 바라보던 나는 가까이 다가온 세이룬이 의아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고 나서야 흠칫 정신을 차렸다.

“아, 음, 응, 샤샤. 여기 앉아.”

나는 얼른 내 옆자리를 탁탁 두드렸다.

내 옆자리에 조심스럽게 앉는 세이룬을 보면서, 문득 나는 오늘 아침에 있었던 사소한 마찰 이후로 지금 그와 처음 마주하는 거라는 것을 다시금 자각했다.

꽉 쥐어진 주먹으로 식은땀이 맺혔다.

“이 꽃다발, 직접 만드신 겁니까.”

“어? 어……, 만들었어. 직접.”

“정말 어여쁩니다.”

그렇게 칭찬한 세이룬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조금 숙여 내 뺨에 작게 키스했다.

촉.

“……감사합니다.”

조그맣게 중얼거린 그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재빨리 방 밖으로 도망치듯 나갔다.

졸지에 홀로 덩그러니 남겨진 나는 멀거니 눈을 깜박이다가 천천히 손을 들어 뺨을 매만졌다.

“……?”

이성이고 감각이고 모든 게 붕 떠 버려서 제대로 된 사고가 쉽지 않았다.

그런 내가 정신을 차린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키스.”

키스. 그래. 볼에 입술이 닿았다. 입술이 닿았어. 쪽, 하는 작은 소리도 났다. 그래. 감각도, 음, 부드럽고 말캉하면서도 촉촉한 감각이, 볼에. 응, 그래. 입술이 닿았다. 입술이…….

‘……으아아악!’

용광로를 지어도 될 정도로, 얼굴이 터질 것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나는 안고 있던 베개를 마구잡이로 두들겨 패면서 소리 없이 비명을 질렀다.

심장이, 이렇게 미치도록 뛰고 있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어!

그렇게 시작된 한 사람의 발광은 밤이 깊어 가도록 멈추지 않았다.

* * *

귀한 저택에 누추한 손님이 방문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침입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초대하지도 않았는데 무작정 들이닥친 거니까, 주거 침입이 맞았다. 굳이 덧붙여 주자면, 미필적 고의에 의한 주거 침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에리카, 내 하나뿐인 조카. 정말 오랜만이구나.”

이렇게 불쑥 찾아오면 대놓고 쫓아내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한 게 분명한 셀루리아 후작이 내게 다정한 척 웃어 보였다.

속으로 우웩을 4번 반복한 나는 안절부절못하는 티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기어들어 가듯 답했다.

“네, 후작님…….”

“그동안 연락 한번 없어서 얼마나 속상했는지 모른단다. 그동안 잘 지냈니?”

이번에는 그 옆에 있는 후작 부인이 상냥한 척 내게 물어왔다. 이번에도 나는 우웩거리며 겉으로는 우물쭈물 아무것도 모르는 척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여, 연락…… 하셨나요?”

“그럼, 당연하지. 하나뿐인 조카가 먼 곳에 가 있는데, 안부가 궁금하지 않을 외숙부와 외숙모가 어디 있겠니?”

여기 있잖아요, 여기.

나는 순간적으로 차게 식은 표정을 지을 뻔하다 말고 재빨리 고개를 푹 수그렸다. 와, 방금 좀 위험할 뻔했다.

지금 후작과 후작 부인은 나와 함께 대공저 1층의 응접실에 있었는데, 지금 저 소름 끼치는 친한 척은 내 뒤에 포카와 레비나가 시립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원래는 세이룬도 나와 같이 응접실에 가기로 했었지만, 마저 급하게 처리해야 할 서류가 있어서 나중에 오기로 했다.

“오늘, 카리에도 같이 오고 싶었지만 황태자 전하와 약속이 있어 못 왔단다. 너무 서운해하지 말렴.”

“네…….”

“그나저나, 선대공 전하와 선대공랑 전하께서는 같이 올라오지 않으셨니?”

후작 부인이 제 몫으로 나온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물었다.

나는 계속 후작 부인과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두 분께서는 세계 유람을 떠나셨거든요.”

집안에 어른이 부재하다는 사실도 슬쩍 흘렸다.

내 말에, 후작 부인이 찻잔을 달칵 내려놓았다.

“흠, 그렇구나. 혹시라도 가문의 운영과 관련해서 우리의 도움이 필요해지면 꼭 부르렴. 너는 내 딸과도 같으니, 도움 줄 수 있는 부분이 있으면 도와주고 싶구나.”

“그래, 에리카. 델레미아의 말이 맞다. 도움이 필요하면 주저하지 말고 셀루리아에 연락을 넣거라.”

후작 부인의 말에 후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그 말에 나는 썩어 들려는 표정을 가까스로 간수하며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그렇게 콕 집어서 ‘가문의 운영과 관련한 도움’이라는 단서를 붙이다니, 이미 세작들도 꾸준히 잠입시키고 있는 마당에 시커먼 속내가 너무나도 훤히 드러나지 않는가. 물론 그 세작들은 타한이 적당히 처리하고 있었다.

‘도움은 무슨, 그 핑계로 애송이 둘이 굴리는 가문을 슬쩍 찔러 보고 싶은 거겠지.’

그러다가 휘저어서 엉망으로 만들 수 있으면 금상첨화일 테고. 나는 속으로 이죽거리며 자그마한 목소리로 “네……”하고 대답했다.

그 이후로는 소소하면서도 아무 의미 없는 덕담이 오갔다.

나는 조금은 긴장이 풀리기라도 한 것처럼 배시시 웃으면서 후작 부부의 말에 적당히 추임새를 끼워 넣었다. 물론 속에는 미쳐서 날뛰는 대공비 한 마리가 존재했다.

‘세이룬…… 세이룬 언제 와……. 나 미칠 것 같아…….’

진짜 어쩜 저렇게 뻔뻔하게 덕담을 건넬 수가 있는지, 오히려 내 낯이 다 뜨거워질 것 같았다.

그렇게 반쯤 정신을 놓은 채로 세이룬을 간절하게 찾고 있을 때였다.

똑똑, 간결한 노크 소리와 함께 타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전하, 대공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살았다!

나는 순간 벌떡 일어나서 훌라춤을 출 뻔했다. 물론 어떻게 추는지 모른다.

“어서 들어오시라고 해!”

나는 활짝 웃으면서 문을 돌아봤다.

문이 열리고, 머리를 단정하게 하나로 높이 묶은 세이룬이 안으로 들어왔다.

“부인님.”

응접실로 들어온 세이룬은 후작과 후작 부인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곧장 나를 향해 걸어왔다.

그가 두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 쥐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더 일찍 오고 싶었는데, 부득이하게 늦어졌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전 전하께서 이렇게 와 주신 것만으로도 기쁜걸요.”

마음 같아서는 왜 이제 왔냐고 찡찡거리고 싶었지만, 후작과 후작 부인 앞이라 ‘착하고 순한 에리카’가 했을 말을 읊었다.

그걸 눈치챈 세이룬의 입가가 움찔거렸다. 웃음을 참기 위해 황급히 입술을 깨물며 고개 숙이는 그가 귀여워서 배시시 웃는데,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서 있던 후작이 “크흠, 큼”하고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셀루리아 후작 가문의 가주, 펠리페 르 셀루리아가 드레인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맞다, 지금 저 인간들 앞이었지. 찰나 흐린 눈을 뜬 내 고개가 후작에게로 돌아갔다.

그 옆에 같이 서 있던 후작 부인도 이어 인사했다.

“셀루리아 후작 가문의 안주인, 델레미아 르 셀루리아가 드레인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아아.”

한순간에 세이룬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내 쪽으로 숙였던 상체를 곧게 편 그가 서늘한 얼굴로 후작과 후작 부인을 돌아보았다.

“그대들이 셀루리아 후작과 후작 부인이로군.”

그들에게로 떨어져 내리는 목소리는 방금 내게 건넸던 걱정스러운 목소리와는 전혀 달랐다.

서리라도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목소리에, 후작과 후작 부인은 저도 모르게 흠칫 몸을 떨었다가 곧 수치심을 느꼈다. 대공 위에 오른 지 고작 일 년도 채 되지 않는 애송이에게 겁을 먹다니. 정계에 오래 몸담고 있던 자신들이 말이다.

“그, 렇습니다, 전하.”

후작이 간신히 웃으며 답했다. 그에게서 시선을 뗀 세이룬은 후작과 후작 부인에게 앉으라는 말도 없이 자리에 앉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세이룬에게서 앉으라는 말이 나오지 않자, 서 있는 두 사람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나는 우물쭈물하는 얼굴로 세이룬의 눈치를 보는 척, 후작과 후작 부인의 서 있는 자세를 충분히 감상한 뒤에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음, 저…… 이제 앉으셔도 돼요.”

내 허락에, 그들은 수치심이 가득한 얼굴로 입꼬리를 부들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세이룬의 노골적인 냉대에 응접실 내의 공기가 급속도로 차가워졌다.

“그나저나, 대공 전하께서는 눈가리개를 착용하셨네요.”

가라앉은 분위기를 전환하려는 듯 후작 부인이 재빨리 화제를 던졌다.

하지만 그녀의 화제 선택은 실수였다. 미간을 찌푸린 세이룬의 고개가 후작 부인에게로 향했다.

“그것이 그대와 무슨 상관이지? 내게 불만이라도 있는 건가?”

“그, 그럴 리가요. 저는 그저…….”

화제를 돌리려다가 본전도 못 찾은 후작 부인이 내게 뭐라고 말 좀 해 보라는 듯 눈치를 줬다.

그걸 눈치챈 나는 세이룬을 달래듯이 말했다.

“전하, 후작 부인께서는 그저 전하의 눈이 혹시 아픈 건 아닌지 걱정되셔서 여쭤보신 거예요. 전하께서 오시기 전에도, 선대공 전하와 선대공랑 전하께서 세계 유람을 떠나셨다는 말을 드렸었는데, 언제든 가문의 운영과 관련해서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도움을 주겠다고 말씀해 주셨는걸요.”

순간, 후작과 후작 부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내가 이렇게 눈치 없이 대놓고 말할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내가 멍청하다, 멍청하다 노래를 불러 대더니, 이런 데에서는 갑자기 똑똑하게 행동할 줄 알았냐.’

멘델의 법칙 제0번. 완두콩을 심으면 완두콩이 난다. 자고로 사람은 뿌린 대로 거두는 법.

내가 속으로 쯧쯧 혀를 차면서 겉으로는 방긋 웃고 있는데, 내 말을 들은 세이룬의 입술이 심기가 상한 것처럼 비틀려 올라갔다.

“그렇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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