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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박데기 영애의 반격을 조심하세요 (58)화 (58/139)

58화

“네, 고객님. 어떤 것으로 드릴까요?”

“아니, 맞춤 주문.”

산뜻한 내 목소리에, 직원이 흠칫 굳었다가 얼른 다시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사이즈 맞춤 주문은 추가금이 붙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아, 내가 말을 헷갈리게 했나 보네.”

나는 직원을 돌아보며 사르르 웃었다.

“비단 사이즈뿐만 아니라, 반지 전체를 맞춤 주문하고 싶은데. 두 개 정도.”

“……헉.”

직원이 숨을 들이 삼켰다. 잠시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래그래, 많이 놀랐겠지. 그냥 장신구 하나만으로도 하급 귀족의 반년 치 수입인데, 아예 반지 자체를 맞춤형으로 주문하다니 이게 뭔 미친 손님인가 싶겠지.

‘하지만, 나는 돈이 진짜로 썩어 넘칠 정도로 많다고.’

게다가 드레인 대공가의 자산도 실로 어마어마하단 말이야…….

해수의 돈만 해도 평생을 펑펑 써도 다 못 쓰고 죽을 판국인데, 웬만한 내 생활비는 가문의 예산으로 충당된다.

이럴 때 안 쓰면 어느 세월에 돈을 쓰겠니.

“다시 말해 줘야 하나?”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빳빳하게 굳어 있던 직원이 과한 동작으로 차렷 자세를 하며 외쳤다.

“지, 지금 당장 지배인님을 불러오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직원은 당장이라도 다리가 풀려 넘어질 것처럼 위태롭게 휘청거리면서 달려갔다.

‘보는 내가 다 심장이 벌렁거리네.’

나는 차마 직원의 뒷모습을 더 지켜보지 못하고 다시 진열대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렇게 얼마나 구경을 하고 있었을까.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저는 메이르위안 에이리트 1호점의 지배인, 세르반 아르센입니다. 반지 전체를 맞춤 제작하고 싶으시다고 들었습니다만.”

머리를 깔끔하게 뒤로 넘긴 40대 중반의 남자가 내게 깍듯이 인사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반지 한 쌍을 주문할 예정이네. 두 개 다 전체적으로 무겁거나 화려한 게 아니라, 단아하면서도 우아한 느낌이었으면 좋겠어. 음, 물결 같은 디자인이었으면 해. 그리고 링은 금이 아닌 백금이었으면 좋겠는데…… 백금을 모르는 모양이지…….”

나는 ‘백금’이라는 단어에 의아한 얼굴로 고민에 빠진 지배인을 보면서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바로크, 참 알다가도 모를 시대다.

금반지는 취향상 별론데……. 잠시 고민하던 나는 찔러나 보자는 식으로 기대 없이 입을 열었다.

“혹시, 은처럼 광택이 나면서도 은과는 달리 색이 변하지 않는 귀금속을 아나?”

“귀금속 중에서는 잘 모르겠지만…… 그 비슷한 금속은 알고 있습니다. 저희와 제휴를 맺은 광산에서 꽤 많은 양이 출토되어 현재 연구 중에 있습니다만…….”

“뭐?”

생각지도 못했던 답변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역시, 이래서 확인 사살이 필요한 거다.

나는 편안해진 얼굴로 웃으면서 말했다.

“링은 금이 아닌 그 금속으로 만들어 주게.”

“저, 고객님. 죄송하지만, 금이 아닌 금속으로 반지를 만드는 것은…… 아무래도 처음인지라…….”

지배인이 쩔쩔매면서 내 눈치를 봤다.

뭐, 그럴 줄 알았어. 나는 태연히 포카에게서 파우치를 건네받아 그 안에서 어음 한 장을 꺼냈다.

“전체 금액의 1할이네. 나는 메이르위안의 기술을 믿어.”

“최선을 다해 고객님의 기대에 부응하도록 하겠습니다.”

어음에 적힌 금액을 본 지배인의 눈빛이 달라졌다.

나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마저 주문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중앙 보석은 총 네 개를 썼으면 해. 반지 하나에는 진한 군청색 사파이어 두 개를 넣고, 다른 하나에는 노란색 사파이어 하나와 같은 크기의 다이아몬드 하나를 넣었으면 좋겠어. 나머지는 재량껏 제작해 줬으면 좋겠군.”

“알겠습니다, 고객님.”

“참, 그리고 기한은 최대한 빨랐으면 하는데.”

넌지시 던진 내 말에, 지배인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잠시 끙끙거리던 지배인은 이내 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적어도, 열흘은 걸릴 것입니다. 아무래도 부인께서 원하시는 금속은 처음인지라…….”

역시 5일 내로는 무리겠지.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그럼 올해의 마지막 날에 이 아이를 이곳으로 보내도록 하지. 잔금은 그때 가서 마저 치르겠네.”

내가 포카를 눈짓하자, 포카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와 지배인에게 작게 목례했다.

“알겠습니다. 그때까지 만족하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지배인이 한층 밝아진 얼굴로 내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끄덕여서 지배인의 인사를 받아 준 나는 배웅하겠다는 지배인을 만류한 뒤 메이르위안 밖으로 나왔다.

‘원래는 티파티에 가기 전에 세이룬에게 반지를 선물할 생각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백금이 방해를 하는 바람에 그 계획은 무참히 실패했다.

이 예상치 못한 사태를 어떻게 수습할까 골똘히 고민하던 내 눈에 문득 길가의 꽃집이 눈에 들어왔다.

겨울이라 생화는 없고, 말린 꽃들을 다발로 만들거나 예쁜 바구니에 담아 파는 모양이었다.

저거다.

눈을 빛낸 나는 포카와 레비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꽃집에 잠깐 들렀다 가자.”

* * *

“어서 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가니, 경쾌한 종소리와 함께 발랄한 인사가 들려왔다.

꽃집의 주인으로 보이는 중년 여성이 활짝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나는 내 얼굴을 가려 주는 후드를 조금 더 끌어당기며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꽃다발을 하나 만들고 싶어서 왔거든요.”

“꽃다발이라, 애인한테 선물하실 건가요?”

주인이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물어왔다.

왠지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려서, 나는 슬쩍 시선을 피하곤 턱을 긁적거렸다.

“네, 애인…… 맞죠, 애인…….”

“호호, 애인분은 정말 좋으시겠네요. 꽃다발도 선물 받고.”

붙임성 좋게 웃음 지은 주인이 이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지금은 겨울이라, 꽃다발은 생화가 아닌 말린 꽃으로만 만들 수 있는데 괜찮으세요?”

“네, 괜찮아요.”

“그럼 꽃다발에 넣을 꽃 준비해 드릴게요. 어떤 꽃 원하세요?”

주인이 창고 문을 열며 물었다.

생각해 둔 꽃이 없어서 잠시 고민하던 내 머릿속으로 문득 대공성에 처음 갔을 때 받았던 꽃다발이 떠올랐다.

이제 나는 그 꽃다발을 선물한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다.

피식 웃음이 피어올라서, 나는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혹시 쪽동백꽃과 별꽃 있나요?”

“아…… 쪽동백꽃은 있는데, 별꽃은 없어요.”

잡초라서 찾는 사람들이 거의 없거든요. 멋쩍게 덧붙인 주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조그만 꽃을 찾으시는 거라면 안개꽃은 어떠세요? 안개꽃으로 장식해도 무척 예쁘거든요.”

“그럼 쪽동백꽃과 안개꽃으로 할게요.”

“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발랄하게 대답하며 창고 안으로 들어간 주인은 잠시 뒤 곱게 정리해서 말린 쪽동백꽃 가지 두어 개와 안개꽃 한 다발을 가져왔다.

“꽃다발은 직접 제작하실 건가요, 아니면 제가 제작해 드릴까요?”

“제가 직접 만들고 싶어요.”

“그럼 만드는 방법을 알려 드릴게요.”

꽃집 주인은 상당히 친절한 선생님이었다.

나는 꽃다발을 만드는 것이 처음임에도 주인의 친절한 지도 아래 꽤 그럴듯한 다발을 만들었다.

“와, 정말 귀엽고 예쁘게 잘 만드셨네요! 오늘 꽃다발을 처음 만드셨다니, 믿기지가 않아요. 애인분께서 보시면 정말 기뻐하실 거예요.”

“하하, 그런가요…….”

나는 빈말 진짜 못하는데, 이분은 진짜 잘하시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애인분께 선물 잘 하세요!”하고 배웅하는 주인에게 마주 인사한 뒤 가게를 나왔다.

조금 머뭇거리는 손으로 꽃다발을 만지작거리자, 주인에게 대금을 치르고 따라붙은 포카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예뻐요, 비전하. 대공 전하께서도 분명 좋아하실 거예요.”

“세이룬이라면 꽃다발이 예쁘지 않아도 좋아해 주겠지.”

나는 조금 삐져나온 것 같은 안개꽃 한 송이를 조심스럽게 안으로 집어넣으며 중얼거렸다.

그래, 세이룬은 내가 빈 종이에 하트 하나만 대충 그려서 줘도 좋아할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니까, 조금이라도 더 좋은 걸 주고 싶은 건데.

마차를 타고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꽃다발을 계속 어루만지던 손은 저택에 도착하고 나서도 멈출 줄 몰랐다.

‘고쳐도 고쳐도 뭔가 고칠 게 계속 나온단 말이지…….’

작곡할 때도 하루면 끝날 걸 사소한 음 하나가 거슬려서 계속 고치다가 일주일이나 걸렸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차피 고친다고 완벽히 내 맘에 들 수 있는 건 아닌데 말이야.’

그러니까 이제 그만 이놈의 미련을 벗어 버려야 할 텐데.

……벗어 버리기는 개뿔이.

나는 늦은 시간까지 아직도 세이룬에게 주지 못한 꽃다발을 들고 그의 방 앞을 서성였다.

머릿속에서 세이룬에게 그냥 얼른 주고 나오라는 이성과 ‘조금만 더’를 외치는 감정이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게다가, 아침에 세이룬이 삐지기까지 했었잖아…….’

그런데 이런 초라한 꽃다발을 준다니. 그렇게 생각하자, 애초부터 얼마 있지도 않던 용기가 더더욱 사그라들었다.

입에서 저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을 때였다.

“……에리카?”

“―헉.”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줄 알았다.

문 안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숨을 급히 들이마신 나는 재빨리 꽃다발을 문 앞에 놓아둔 뒤 내 방으로 부리나케 도망쳤다.

‘으아, 진짜 놀랐어…….’

나는 아직도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침대 위를 굴렀다.

한참을 그러다가, 문득 내가 왜 도망쳤지 하는 의문이 의식 한구석에서 떠올랐다.

“……그러게? 내가 왜 도망쳤지?”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니고 말이다.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밤늦은 시간에 방 앞을 서성거렸으니까 이상하게 생각할 텐데…….”

안 그래도 매번 합방일마다 떳떳하지 못한 생각을 하고 있는 마당에, 이러니까 정말로 변태 새끼가 된 것 같았다.

“그냥 꽃다발 주러 왔다고 말하면 되는 걸 왜 거기서 도망을 쳐서 이 사달을 만들어, 에리카아……!”

나는 베개를 주워다가 마구 찌그러뜨리며 수치심과 분노를 삼켰다.

그때였다.

똑똑, 가벼우면서도 정중한 노크 소리와 함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리카, 주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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