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이토록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답답하고 불쾌한 감각을 느낀 건 몇 안 되는데.
‘감정 주체해, 에리카. 앞에 세이룬 있으니까.’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미소 지으면서 앞에 놓인 스테이크를 마저 한 입 먹었다.
그냥 내가 혼자서 이상한 생각을 하고 기분이 상한 건데 그걸 티 내서 세이룬의 기분까지 상하게 하고 싶진 않았다.
“……에리카가 해수가 아니었더라면, 제가 에리카의 앞에 나타나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나를 가만히 지켜보던 세이룬이 이내 이를 악물며 말했다.
나는 입가로 가져가던 샐러드 조각을 움칫 멈췄다.
“……뭐?”
그 말이, 마치 세이룬은 나를 만나기 전부터 내가 해수였다는 걸 알고 있었다는 소리로 들린다면…… 그건 착각일까.
“저는 에리카가 억만장자라서 청혼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 점은 꼭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그리고 저 때문에 불편하게 식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식사를 모두 마쳤으니, 에리카는 천천히 편하게 드세요.”
반도 다 먹지 않은 음식을 그대로 남겨 둔 채, 세이룬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대로 식당을 나가 버렸다.
나는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포크를 내려놓았다.
“……들켰네.”
대공가의 수석 요리사 베렌이 만든 음식은 언제나 맛있어서 웬만하면 다 먹는 편이지만, 지금은 도저히 먹을 기분이 아니었다.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혀서 답답했다. 다시금 흘러나오려는 한숨을 삼킨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을 나왔다.
언제쯤 삐진 세이룬을 달래 주는 것이 좋을까 고민하며 집무실에 들어서니, 빈센트와 포카, 레비나가 바쁘게 물건 더미를 분류하고 있었다.
“아, 비전하. 오셨습니까.”
“응. 이게 내가 지시한 구교파 귀족들에게 줄 선물이야?”
“네, 그렇습니다.”
빈센트가 들고 있던 서류철을 내게 넘겨주었다.
나는 서류철을 꼼꼼히 확인하면서 분류된 선물들을 확인했다.
“어디 보자. 동방에서 공수해 온 부채는 케시타 백작 영애, 북방에서만 나는 백로향으로 만든 향수는 카스텔 후작 영식. 흑진주와 핑크 다이아몬드로 만든 장신구는 베네로사 후작 영애고, 최고급 재료로 만든 화장품은 각각 세피로나 쌍둥이 백작 영애와 영식…….”
천천히 글자를 훑어 내려가던 나는 문득 에스로타의 이름에서 시선을 멈췄다.
에스로타 몫의 선물은 이미 수 세기 전에 멸망한 작은 왕국의 고대 시문을 원문으로 엮어 낸 문집으로, 실재했었다는 기록만이 존재했을 뿐 실물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귀한 책이었다.
이 시문집의 번역본이 현대에 들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원문을 찾아보려는 시도가 많았었는데, 그 누구도 제대로 찾아내지 못했다고 한다.
특히 유독 에스로타가 이 원문 시문집을 지독히도 찾아다녔다고 했더랬지.
‘역시, 돈이 최고긴 최고구나.’
없던 것도 있는 것으로 만드는 기적을 보여 주다니.
나는 흐린 눈을 뜨며 상하지 않도록 완벽하게 포장된 서적을 한 번 흘끗했다.
‘그러고 보니 다른 이들의 것은 다 사치품인데 에스로타만 책이네.’
물론, 들인 돈은 그 책이 가장 많이 들었을 테지만.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선물 목록을 마저 확인한 뒤, 마지막으로 카리에의 몫으로 지시한 선물을 훑어봤다.
우리 새 신부의 건강을 기원하며 특별히 동방에서 공수해 온 산삼꿀.
그리고, 역지사지의 자세로 준비한 최고급 레틸기스 청.
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곱게 포장된 산삼꿀과 레틸기스로 만든 청을 바라봤다.
이 역설적인 선물 앞에서 카리에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생각해 보니, 복수할 수 있는 패를 모두 쥐고 난 후로 카리에를 보는 건 처음이네.’
아무리 샤샤가 그때 정말로 죽은 게 아니었다 하더라도, 나는 셀루리아를 향한 복수를 멈출 생각이 전혀 없었다.
샤샤가 용이 아닌 그냥 뱀이었다면, 그 애는 지금 이렇게 살아 있지 못했을 테니까.
그날 샤샤의 죽음으로 인해 내 안의 둑은 이미 터져 버렸고, 한 번 터져 버린 둑은 다시는 돌이킬 수 없었다.
‘그때처럼 말이지.’
그래서 그토록, 내가 정한 선을 넘지 않기를 바랐던 건데.
차갑게 비소한 나는 다시 티파티로 생각을 돌렸다.
‘티파티 개최일이 정확히 엿새 후던가?’
시간아 빨리 흘러가라 하고 고사 지낼 때는 죽어도 안 가더니, 이럴 때는 정말 빠르네. 나는 절로 흐리게 떠지려는 눈을 가다듬으며 빈센트에게 다시 서류철을 돌려줬다.
“빈센트, 정말 수고했어. 구하기 까다로운 물건들도 많았을 텐데 모두 잘 구해 줘서 고마워.”
빙긋 웃으면서 칭찬해 주자, 살짝 상기된 얼굴로 미소 지은 빈센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비전하. 응당 제가 해야 하는 일인걸요.”
“그래도 고마운 거는 고마운 거니 빼지 말고 받아 둬.”
“……감사합니다.”
빈센트가 자그맣게 말했다. 대체 뭐가 감사하다는 건지는 잘 몰랐지만,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빈센트가 나간 후, 옆에서 눈을 반짝이는 포카와 레비나도 칭찬해 준 나는 집무실 한쪽에 가지런히 정리된 선물들을 응시하며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 나, 세이룬한테 뭔가를 선물한 적이 있던가?’
없었다. 한 번도 없었다.
나는 창백해진 얼굴로 이마를 짚었다.
아내가 초대박 억만장자인데 남편에게 선물 하나 준 적이 없다니, 이 무슨 말이요 해수 양반!
“비전하, 무슨 일 있으신가요?”
옆에서 포카와 레비나가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포카, 레비나.”
“네, 비전하. 말씀하세요.”
“지금 당장 외출할 거니까 준비해 줘.”
“외출이요?”
포카와 레비나가 눈이 댕그래진 채 되물었지만, 나는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적어도, 내 첫 선물을 세이룬이 아닌 다른 이한테 주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 * *
채비는 단출하게 했다.
지난번 에인시아와 세사르를 방문했을 때처럼 내가 대공비라는 것을 굳이 광고하고 다닐 필요는 없었으니까.
길게 내려오는 클록을 꼼꼼히 두른 나는 가문의 문장이 그려지지 않은 조그만 마차에 올라타며 말했다.
“에이리트의 중심가에 있는 메이르위안으로 가고 싶어.”
“메이르위안이요?”
포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메이르위안’은 이렌텔의 귀족이라면 누구나 다 알 만큼 유명한 보석 회사 중 하나였다.
쟁쟁한 보석 회사 중에서 왜 하필 메이르위안에 가냐고 묻는다면, 내가 그곳의 대주주이기 때문이라고 답하겠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포카와 레비나가 안절부절못하며 내 기색을 살폈다.
“비전하, 혹시 지금 가지고 계시는 장신구가 부족하신가요……?”
“뭐? 절대 아니야!”
나는 기겁을 하며 서둘러 두 손을 내저었다.
지금 있는 그 어마무시한 양의 보석만 하더라도 하루에 하나씩 착용해도 죽을 때까지 다 못 할 것 같은데 무슨 소리야!
“그냥, 세이룬한테 선물 좀 주고 싶어서 그래.”
“아…….”
순식간에 얼굴을 발갛게 물들인 포카와 레비나는 이내 저들이 더 신이 나서 출발을 재촉했다.
대공저에서 메이르위안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나는 마차를 메이르위안 옆 골목에 세우도록 지시한 뒤, 레비나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나는 클록에 달린 후드를 좀 더 아래로 끌어당기고는 메이르위안의 장대한 건물을 올려다봤다.
“내가 진짜 네 덕분에 벼락부자 됐다…….”
해수로서 활동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한창 성장하고 있던 메이르위안 소유의 다이아몬드 광산 하나가 무너지는 사건이 일어났었다.
그 광산은 메이르위안의 거의 모든 것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런 곳이 무너졌으니 당연히 회사는 휘청했고 주가는 급속도로 폭락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적적으로, 그 광산이 무너지면서 새로 발견된 더 큰 광산 덕분에 메이르위안은 기사회생할 수 있었지.’
오히려 이전보다 더 큰 규모로 발전한 건 당연했고.
그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던 나는 메이르위안의 주가가 한창 저점을 찍고 있었을 때 켈타카 은행에서 대출받은 돈으로 주식을 대량 매입했다.
그 뒤는 뭐……, 불 보듯 뻔한 것 아니겠습니까.
‘역시 인생은 타이밍이야.’
나는 왠지 아련해진 기분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며 메이르위안 안으로 들어갔다.
“환영합니다, 고객님. 어서 오십시오.”
매우 정중하게 인사하는 직원들에게 고개만 살짝 까딱인 나는 조금 질린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에인시아? 세사르?
귀여운 수준이다.
치가 떨릴 정도인 화려함의 극치가 바로 이곳에 존재했다.
나는 저절로 주춤거리려는 어깨를 쫙 펴면서 직원의 안내에 따라 진열대 가까이 다가갔다.
진열대 안에는 보석 상점이 으레 그렇듯 온갖 금은보화의 향연이 펼쳐져 있었다.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아가들의 반짝반짝한 모습에, 나는 그만 눈이 넹글 돌아갈 뻔했다.
‘까마귀 본능을 제때 통제하지 않았으면 허생전 매점매석 ‘신.로.줄.’ 버전 찍을 뻔.’
그래도 안 될 건 없지만, 쓸데없이 빈센트의 일을 늘리는 건 못 할 짓이지. 슬쩍 고개를 저은 나는 고개를 돌려 직원에게 말했다.
“반지류를 보고 싶은데.”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반지류는 건물의 2층 전체에 걸쳐 진열되어 있었다. 보아하니, 층마다 진열된 장신구의 종류가 다른 모양이었다.
‘진짜 어마어마하네.’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두르면서 매의 눈으로 반지들을 하나하나 살펴봤다.
물론 나는 매의 눈으로 살피고 싶었지만, 하나를 볼 때마다 감탄이 절로 터져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니, 저 가는 링에 섬세하게 박힌 꽃을 봐. 저 조그만 거 커팅하는 데도 엄청 정교하게 했네.’
이제 와서 새삼 놀라기에는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그래도 섬세하게 세공된 보석들을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바로크 시대에 이미 이 정도의 커팅 기술이 있었는지, 아니면 이 세계관 자체의 특성으로 이렇게 빨리 발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곳의 보석 세공 기술은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살다 온 나조차도 놀랄 만큼 굉장히 엄청났다.
‘내가 아는 바로크는 흔들리지 않는 조성과 화성의 등장과 그에 지배된 대위법밖에 없었는데…….’
수포자인 내게 수학의 악몽을 떠올리게 만들었던 문제의 화성학이 등장한 시대란 말이지.
눈을 흐리게 뜬 나는 얼른 생각을 전환하기 위해 직원을 불렀다.
“주문을 하고 싶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