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아니, 진짜야. 네가 너무 예뻐서 방금 심호흡까지 한 거 너도 봤잖아.”
“제 기분 좋게 해 주시려고 구태여 연기까지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에리카가 제 곁에 이렇게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니까요.”
아이의 귀여운 재롱을 보는 할아버지 얼굴로 세이룬이 나를 바라봤다.
억울해진 나는 인상을 쓰며 항의했다.
“빈말 아니야. 진짜라니까?”
“네네.”
“저기요, 저 진짜 완전 진심이거든요…….”
“네, 에리카. 믿을게요.”
세이룬은 전혀 납득하지 않은 얼굴로 사르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봐 봐, 지금 내가 자기 예뻐서 눈도 제대로 못 떴다는 데도 저렇게 예쁘게 웃고 있잖아.’
저게 어디서 내 말을 믿는 행동이냐고.
나는 다시금 눈을 감으며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러고 보니, 샤샤는 종족이 뭐야? 역시 뱀이려나?”
화제를 돌리기 위해 머리를 굴리다가, 문득 떠오른 궁금증에 곧장 세이룬에게 물었다.
일순 멈칫한 세이룬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그만 목소리로 대답했다.
“용족입니다.”
“……용족? 용? 혹시 내가 알고 있는 그 용이야? 여의주 물고 있는!”
나는 관자놀이를 누르던 손도 뗀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세이룬을 쳐다봤다.
그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혹시라도 내가 싫어하지는 않을지 내 눈치를 봤지만, 그건 정말 필요치 않은 행동이었다.
“와, 나 용 완전 좋아해!”
나는 활짝 웃으며 손뼉을 쳤다.
용은 내가 중학교 1학년 무렵부터 무척 좋아하게 된 동물이었다.
용을 좋아하게 된 정확한 계기가 기억나는 건 아니지만, 그 당시에는 산타 할아버지를 믿는 것처럼 용이 진짜 있는 줄 알고 용과 같이 사는 게 꿈이기도 했었다.
물론, 도서관에 틀어박혀서 용에 대해 찾아보다가 얼마 가지 않아 용은 실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 버렸지만.
‘그때 엄청 슬펐었는데.’
나는 잠시 과거를 회상하다가 다시 세이룬을 바라봤다.
세이룬이 수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용을 좋아하십니까?”
“응, 정말 좋아해. 그래서 나 용과 관련된 책이나 영화, 만화는 거의 다 봤을걸.”
내가 최애를 좋아하게 된 이유도 영화에서 맡은 용 배역을 무척이나 잘 소화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긍정하자, 수줍게 시선을 조금 내리깐 세이룬이 조그맣게 말했다.
“저, 용인데…….”
“응, 알고 있어.”
“에리카는 용을 좋아하시지요.”
“응, 좋아하지?”
“음, 저 용인데…….”
세이룬이 뭔가 바라는 것처럼 나를 흘끔흘끔 쳐다봤다.
그 시선이 뭘 의미하는지 몰라서 고개를 갸웃거리던 나는 이내 그 의미를 알아차리고는 까르르 웃으며 세이룬을 끌어안았다.
갑작스레 내 품에 안기게 된 세이룬이 뻣뻣하게 굳었다.
나는 그의 등을 토닥토닥 도닥이며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당연히 좋아하지.”
“…….”
“세이룬, 내 샤샤. 나 너 정말 좋아해.”
마침내 원하는 말을 들은 세이룬이 천천히 내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정말?”
“그럼, 정말이지. 나 너한테는 거짓말 같은 거 안 해.”
흠흠, 물론 선의의 거짓말은 제외될 수도 있고……. 나는 뒷말은 삼킨 채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생긋 웃었다.
내 말을 듣고 내 옷자락을 더욱 꼭 움켜쥔 세이룬이 어리광부리듯 말했다.
“정말이라면, 한 번 더…… 말씀해 주세요.”
“우리 샤샤, 내가 정말 좋아해.”
“다시, 한 번 더요…….”
“좋아했다. 좋아한다. 좋아하고 있다. 좋아하는 중이다. 좋아할 것이다. 앞으로도 좋아할 예정이다.”
조금은 장난기를 섞어서 말했지만, 세이룬은 그것조차 좋다는 듯 배시시 웃음 지었다.
“저도 좋아해요.”
그가 나직이 속삭이며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그의 눈동자와 내 눈동자가 마주쳤다.
나를 담은 그의 눈동자가 고운 반달처럼 접혔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정말 좋아해요, 해수.”
그 말을 듣는 순간, 불현듯 온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해수’란 이름으로 고백을 들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20년 넘게 ‘해수’란 이름으로 살아온 기억 탓일까. 고백이 심장에 직접 토해진 것처럼, 심장께가 간질거리기 시작했다.
몹시 생소한 감각에 흠칫 놀란 나는 나도 모르게 뒤로 주춤거렸다.
내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자 덩달아 세이룬의 얼굴에서도 웃음이 사라졌다.
나 때문에 세이룬이 다시금 침울해졌다는 생각에 당황한 나는 서둘러 머리를 쥐어짜 화제를 돌렸다.
“호, 혹시 말이야, 우리 샤샤 하늘도 날 수 있어?”
“본체로 변하면 가능합니다.”
다행히 세이룬은 내 화제에 맞춰 따라와 주었다.
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뒤로 주춤거렸던 것도 잊은 채 활짝 웃으며 그를 향해 상체를 기울였다.
“본체면, 너랑 처음 만났을 때 봤던 그 귀여운 샤샤 모습?”
나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다시 그 귀염뽀짝한 샤샤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잔뜩 기대에 차서 세이룬을 바라봤지만, 세이룬은 곤란한 얼굴로 내 시선을 피했다.
“……그건, 곤란합니다.”
“왜? 왜 곤란해?”
나는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울상을 지으며 물었다.
내 얼굴을 보고 움찔한 세이룬이 허둥거리며 대답했다.
“그 모습은 제 힘을 극한까지 봉인했기에 가능한 모습입니다. 가사에서 깨어난 지금은 온전히 각성한 상태이기에 힘을 봉인하는 것이 불가능해요.”
“…….”
“자세한 설명은 추후에 해 드리겠습니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읽은 세이룬이 얼른 덧붙였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이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나저나 하늘을 날 수 있다니, 이런 엄청나게 좋은 정보는 미리미리 말해 줬어야지! 나, 네 본모습 보고 싶어. 엄청 귀엽고 예쁠 것 같아.”
아무래도 샤샤의 모습이 본모습의 축소판인 듯하니 본판도 얼마나 귀여울지 안 봐도 알 것 같았다.
수줍은지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배시시 웃은 세이룬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구름이 개고 날이 맑아지면 그때 보여 드리겠습니다.”
그러다가, 슬쩍 한마디를 덧붙였다.
“원하신다면 에리카를 태우고 날 수도 있습니다.”
“정말?! 아, 어떡해. 나 너무 기뻐서 현기증 나…….”
용을 타고 하늘을 난다니. 그건 정말로 멋지고, 환상적이고, 또 머리가 아득해질 정도로 행복한 일일 것이다.
나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가, 감정을 절제하려고 노력하며 그를 불렀다.
“세이룬.”
“네?”
“용족이어서 고마워.”
“…….”
내 말에, 그가 돌연 입을 다물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그에게, 나는 이어 말했다.
“그리고, 나한테 청혼해 줘서 고마워.”
말을 마친 다음에는 배시시 웃음도 지었다.
한참을 그렇게 입을 다물고는 나를 바라보고만 있던 세이룬이, 이내 느릿하게 입을 열어 “네”하는 한 음절을 겨우 쥐어짜 냈다.
느지막이,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촛불의 불빛에 비친 그의 눈가가 유난히 붉었다.
* * *
샤샤가 내 곁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마자 나는 당장 오른 손목에 감아 놨던 붕대를 풀어 버렸다.
물론 성인이 될 때까지 세이룬의 아름다운 금빛 은빛 눈동자를 보지 못한다는 건 변함없었지만, 대신 그의 옆에 있을 때마다 손목에 피어나는 앙증맞은 은백색 꽃은 정말이지 보는 사람을 행복하게 했다.
“참, 세이룬. 근데 손목에 그려진 이 꽃문양은 뭐야?”
아침 식사를 하던 도중, 나는 세이룬을 향해 꽃문양을 내보이며 물었다.
우아하게 칼을 들고 스테이크를 썰던 세이룬은 내 오른 손목에 피어난 은빛 꽃송이를 보고 움찔 어깨를 떨었다.
잔뜩 붉어진 얼굴을 가리듯 고개를 돌린 그가 웅얼거리듯 답했다.
“……입니다.”
“응?”
너무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린 터라 제대로 듣지 못했다.
세이룬을 향해 상체를 기울이며 다시 묻자, 아까보다 더 얼굴을 붉게 물들인 세이룬이 다시 대답했다.
“이 사람은 저의 반려라는…… 용족의 표식입니다.”
“…….”
그 대답을 듣는 순간, 불현듯 형용할 수 없는 간질거림이 심장 언저리부터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서, 나는 서둘러 포크와 나이프를 잡고 있던 손을 놓고 손등으로 뺨을 식혔다.
나는 잠시 눈동자를 굴리다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그, 너 샤샤 때부터 나랑 결혼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그렇게 생각하니 뭔가 앞뒤가 딱딱 맞는 느낌이었다.
중앙에는 얼굴 한 번 비추는 법이 없던 세뤼아와 자네한이 갑자기 황실 무도회에 참석해서 하필이면 나에게만 ‘잘 부탁한다’는 등의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기고 떠난 데에는 다 이런 이유가 있었던 거지.
‘잘 부탁한다는 말이 설마 아들내미 잘 부탁한다는 말이었을 줄이야.’
그것도 지금 이렇게 생각해 보니 굉장히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마치 아들 장가보내는 어머니가 며느리에게 건네는 인사 같지 않은가.
내 물음에, 기어코 손등으로 제 입가를 가린 세이룬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속삭임을 닮은 조그만 대답이 돌아왔다.
괜히 낯간지러운 기분에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던 나는 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다시 포크와 나이프를 집어 들었다.
“세이룬도 참. 네가 이 문양을 새겼을 때 너 내가 해수라는 거 모르고 있었잖아. 쭉정이한테 이런 거 새기면 어떡해.”
“……저는 에리카가 억만장자라서 청혼을 한 것이 아닙니다.”
어쩐지 차가워진 목소리로 세이룬이 대꾸했다.
그가 입을 꾹 다문 채 나를 응시했다. 다른 이의 시선도 있기에 착용한 눈가리개 너머에는, 그의 눈동자가 날이 선 채 나를 노려보고 있을 것 같았다.
왠지 그 시선을 더 마주 볼 수가 없어서, 나는 먼저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내가 해수가 아니었으면, 드레인 대공가는 엄청난 짐 덩어리를 얻게 되었을 거야.”
세이룬과 결혼한 것이 내가 아닌 원작의 에리카였다면, 에리카는 분명 셀루리아 가문의 마리오네트가 되어서 원치 않게 대공가의 약점이나 예산을 셀루리아로 빼돌렸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문득 배알이 뒤틀리는 감각에 속이 얹힌 듯 더부룩해졌다.
내가 에리카의 몸에 빙의하지 않았더라면 세이룬은 원작 에리카와 결혼했을 거라고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