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봄비 머금은 강가는
푸른빛이 참 고와요
그곳에서 나는 나는
슬픈 노래 불러요
노랫가락을 듣는 순간, 예고도 없이 밀려 들어오는 터질 듯한 감정에 머리가 새하얘졌다.
나는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일렁이는 감정을 애써 꾹 내리누르며, 침대의 이불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한없이 고요한 밤의 공간 사이로, 세이룬의 나지막한 노랫소리가 이어 부드럽게 들려왔다.
방울방울 봄비는요
무지개 너머로 인사하고
우리우리 사랑님은요
푸른 강 너머로 인사해요
“…….”
안녕안녕 내 님 안녕
내 사랑 부디 안녕……
끝에 다다른 노랫소리가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나는 가만히, 숨 쉬는 것조차 잊고서 그저 가만히, 눈앞의 세이룬을 바라봤다.
“……에리카?”
내가 아무 반응도 없자, 세이룬이 불안한 기색으로 나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그가 천천히 손을 뻗어 내 눈가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에리카, 제가 너무 못 불렀나요?”
세이룬이 침울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머리가 반사적으로 그렇게 답했지만, 커다란 감정을 잔뜩 머금은 입술은 그저 떨리기만 할 뿐 어떠한 어떤 말도 내뱉지 못했다.
“에리카, 말씀해 주세요.”
다시금 들려오는 목소리가 참으로 다정했다. 불현듯, 당장이라도 눈물이 왈칵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미칠 것 같은 감정이 속을 한바탕 헤집고 지나갔다.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샤샤는, 바로 내 앞에서 저리도 맹목적으로 나를 부르고 있었다.
“에리카.”
나는 입술을 꾹 깨물며 감정을 삭였다가, 이윽고 느리게 입을 열었다.
“……이제야 찾았어.”
겨우 뱉어 낸 목소리는, 지독히도 잠겨 있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나, 너한테 해 주고 싶은 게 정말 많아.”
“……에리카?”
“정말정말 많아서…… 셀 수가 없을 정돈데.”
시야가 뿌옇게 이지러졌다.
당황해서 내 눈가로 손을 뻗는 세이룬의 모습이 일그러져 보였다.
“에리카, 눈가에 눈물이―….”
“근데 왜 말을 안 했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세이룬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내 눈물을 닦아 내는 사이, 나는 예고도 없이 그의 코앞으로 불쑥 다가갔다.
숨결이 섞일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에, 에리카―?”
당장이라도 코끝이 스칠 만한 거리에 그가 딱딱하게 굳었을 때였다.
나는 곧장 뒤로 손을 뻗어 그의 눈가리개를 그대로 풀어 버렸다.
사락.
부드러운 비단 자락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느슨하게 풀어진 가리개가 아래로 하늘하늘 떨어져 내렸다.
나는, 결혼 후 처음으로 마주하는 남편의 두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속삭였다.
“보고 싶었어, 샤샤.”
* * *
한때 저 금빛 은빛 눈동자를 보며, 별빛을 담아 낸 것 같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눈동자는 지금, 초의 불빛만이 아른거리는 어둠 속에서 정말 별님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렇게 빛나고 있었다.
충격받은 듯 거칠게 일렁이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던 세이룬이 멍하니 입술을 달싹였다.
“……어, 떻게……?”
혼란스러운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리던 그는 퍼뜩 정신이 든 것처럼 황급히 떨어진 가리개를 찾아 쥐었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까닭인지, 세이룬은 서둘러 가리개를 묶으려 했지만 헛손질만 할 뿐 번번이 실패했다.
나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허둥거리는 그를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서 창백해진 그의 손을 감싸 쥐었다.
“예쁜 눈이잖아.”
“…….”
“왜 가리려고 해.”
“……어떻, 어떻게…… 아셨습니까.”
세이룬이 더듬더듬 물었다.
아직도 충격이 가시지 않았는지 잘게 떨리는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나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방금 전 네가 불러 줬던 그 노래.”
“…….”
“그거, 이 세상에서 단 한 존재만이 알고 있는 노래거든.”
세이룬의 눈동자가 물결치듯 더욱 깊게 일렁였다.
나는 잠시 말없이 그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왜…… 왜 말 안 했어.”
“…….”
“내가 너를 얼마나 찾았는지, 너 알고 있었잖아.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슬퍼했었는지, 너 다 알고 있었잖아.”
“…….”
“그런데…… 왜 말 안 했어?”
불현듯, 눈에서 눈물이 다시금 떨어져 내렸다.
반사적으로 내 눈가를 향해 손을 뻗던 세이룬은, 이내 입술을 꾹 깨물며 그 손을 뒤로 물렸다.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습니다.”
“뭐?”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세이룬을 바라봤다.
세이룬은 서글픈 눈으로 나를 한 번 바라봤다가 이내 고개를 푹 수그렸다.
“그래서, 버림받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가 서러움에 젖어 든 목소리로 말했다.
세이룬의 말이 잠시 이해가 되지 않았던 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이다가, 이내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왜 너한테 실망하고 왜 너를 버려?”
“예전에…… 에리카가 제게 말씀하셨잖아요. 사람이 살아가면서 한 번도 실망을 안 시키고 살아갈 수는 없다고. 상대방한테 실망할 만한 점을 발견하면, 그걸 고쳐 달라고 하면 된다고. 맞지 않는 건 살아가면서 맞춰 나가는 거라고.”
“응, 그랬어.”
“에리카가 원한다면, 저는 제 모든 것을 그대에게 맞춰서 바꿀 수 있습니다. 제 버릇도, 제 외관도, 하다못해 제 가문까지. 에리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모두 에리카의 마음에 드는 대로 고치고 맞출 수 있습니다.”
세이룬이 담담히 속삭였다.
그 웃음기 없는 기색에, 나도 ‘나는 지금 이대로의 세이룬이 좋은걸’ 따위의 말 없이 잠자코 그의 말을 경청했다.
“그런데…… 제 종족은 제가 노력해서 에리카에게 맞출 수 있는 게 아니니까.”
“…….”
“제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 제게 실망한 당신이 저를 버리고 떠나실지도 몰라서.”
“…….”
“……그게 두려웠습니다.”
불현듯, 그의 아름다운 눈동자에서 눈물이 툭 떨어져 내렸다.
당황한 나는 얼른 손을 뻗어 하얀 뺨을 가로지른 눈물을 닦아 냈다.
“샤샤, 왜 울어. 응?”
“에리카.”
눈물을 닦아 내던 내 손을 두 손으로 꼭 쥐고는 제 앞으로 가져간 세이룬이 서럽게 눈물을 흘리면서 나를 바라봤다.
“실망하셨습니까? 제가 인간이 아니라서, 싫어지셨습니까……?”
“샤샤.”
“그래도 절 버리지 마세요. 제가 노력하겠습니다. 바꿀 수 있는 제 모든 것을 그대에게 맞춰서 바꾸겠습니다. 그러니―….”
“샤샤, 내 말 좀 들어 봐.”
이대로 두면 세이룬 혼자서 삽 들고 지구 내핵…… 아무튼 그 비스무리한 깊은 곳까지 파고 들어갈까 봐 조금 세게 말했더니, 저를 혼내는 줄 알고 움찔한 세이룬이 금세 풀 죽어서 고개를 떨궜다.
나는 세이룬의 손에서 내 손을 빼낸 뒤,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들어 나와 시선을 맞추게 했다.
그러고는 또박또박 말했다.
“나, 너한테 하나도 실망하지 않았어.”
그의 눈동자가 화들짝 놀라서 댕그래진 채 나를 바라봤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는 엄지로 그의 뺨에 묻은 눈물을 부드럽게 닦아 내며 이어 말했다.
“그냥 좀 서운했을 뿐이지. 왜 더 일찍 말해 주지 않았나, 하고.”
“……서운, 하셨습니까.”
그렇게 중얼거린 그가 입을 다물고는 사붓이 눈을 내리깔았다.
그의 검은 속눈썹에 엉겨 붙은 눈물마저 모두 닦아 낸 나는 다시금 그의 얼굴을 들어 올리고 나와 눈을 마주 보게 했다.
“그리고 내가 그때도 말했던 것 같은데.”
“……?”
“지금 너한테 실망하지도 않았지만, 혹여나 내가 너에게 실망하게 되더라도 단지 실망했다는 이유만으로 너를 버릴 일은 결단코 없어.”
“…….”
“네가 너한테 실망해서 너를 버릴 마음가짐이었으면, 애초에 네 청혼을 수락하지도 않았겠지.”
멍한 얼굴로 내 이야기를 듣던 그가 이내 수줍은 듯 눈을 피하며 배시시 웃음 지었다.
‘겨우 한숨 돌렸네.’
안도한 마음으로 피식 웃던 내 입가에서 불현듯 서서히 웃음이 가셨다. 이제야 세이룬의 아름다운 용모가 시신경에 제대로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던 까닭이다.
‘……돌았.’
저게 뭐야. 나 방금까지 무슨 자신감으로 감히 저 미모를 그냥 마주하고 있었던 건데.
‘무슨 사람이 저렇게 예쁠 수 있어!’
나는 속으로 발악하듯 외치며 곧장 눈을 감았다.
하지만 이미 시신경과 대뇌에 치명적으로 작용한 세이룬의 미모는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고 계속해서 치명적인 일격을 날리고 있었다.
나는 우선 미쳐 날뛰는 심장을 다독이기 위해서 가부좌를 틀고 심호흡을 시작했다.
‘진정해, 에리카. 세이룬은 샤샤고, 샤샤는 뱀이니까 사람이 아니야. 즉, 세이룬은 사람이 아니니까 저렇게 예쁜 것도 무리는 아니란 말씀이지. 근데 그래 봤자 예쁜 건 똑같으니까 달라지는 건 없어.’
……가부좌와 심호흡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에리카?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잠시만. 이러다 부정맥으로 죽을 것 같아서 진정 좀 할게.”
그러고 보니, 저번에 세이룬이 가리개 벗었을 때를 대비해서 묫자리라도 미리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지 않았던가?
그건 정말이지 탁월한 예측이었다.
‘진짜 어떻게 저런 미모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거지?’
그리고 그런 미모를 가진 존재가 어떻게 내 남편일 수 있는 거지.
나는 슬쩍 실눈을 뜨고 세이룬을 봤다가 도로 눈을 감았다.
“……미치겠네.”
저건 귀염귀염 열매를 먹은 게 아니라 경국지색절세가인경성지미 열매를 먹은 거잖아. 세상에 견줄 만한 것 없이 북방에 홀로 서 있을 것 같은 아름다움인데.
‘한 번 돌아보면 성이 기울고 두 번 돌아보면 나라가 기우는 그런 아름다움 말이지.’
게다가, 그토록 아름다운 사람이 불그스름한 초의 불빛에 물든 모습으로 나만을 오롯이 바라보고 있었다.
없던 심장 질환도 생길 판이라, 나는 슬쩍 심장을 부여잡았다.
“샤샤, 누가 너한테 이렇게 예쁘라고 했어.”
“……네?”
“네가 너무 예뻐서 눈도 제대로 못 뜨겠잖아.”
나는 눈을 부릅뜨고 세이룬의 얼굴을 마주 보면서 말했다.
세이룬은 잠시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눈을 어벙하게 깜박이더니, 이내 풋 웃음을 터뜨렸다.
“에리카는 가끔 과장되는 말을 귀엽게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