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박데기 영애의 반격을 조심하세요 (54)화 (54/139)

54화

“……해서 지금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노래는…….”

세이룬이 풀 죽은 목소리로 내게 뭐라 말을 했지만, 하나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세이룬이 방 밖으로 나가고 난 뒤, 나는 허물어지듯 뒤로 몸을 쓰러뜨렸다.

“……너무 피곤해서, 헛생각을 한 거야…….”

그래. 그냥 너무 피곤해서 그런 것이다.

심란함으로 떨리는 마음을 애써 외면한 나는 침대에 파묻혀서 눈을 감았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 * *

하지만 그날 이후로도 심란한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요 이틀간 나는 아닌 척 세이룬을 최대한 피해 다녔다. 세이룬을 보면 나도 모르게 샤샤가 떠올라서 표정 관리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하아…….”

오늘치 결재안을 뒤적거리던 나는 이내 한숨을 내쉬며 깃펜을 내려놓았다.

한 글자도 눈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 벌써 이틀째 이렇게 실속 없이 시간만 낭비하고 있을 수는 없어.”

아예 그냥 대놓고 세이룬과 샤샤를 비교해 보는 게 차라리 나을 것 같았다.

나는 의자 위에서 책상다리를 하고 앉은 채 팔짱을 꼈다. 에인시아에서 바지 일상복을 생각보다 빨리 보내 줬기 때문에 한결 더 수월하게 책상다리를 할 수 있었다.

자, 생각해 보자.

우선 겉모습만 봤을 때는 특별히 크게 같은 존재라고 느껴질 만한 계기는 없었다.

‘기껏해야, 세이룬은 검은 머리칼이고 샤샤도 검은 뱀이라는 것 정도?’

하지만 고작 그걸로는 둘이 같은 존재라고 단정 짓기는 어려웠다.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세이룬의 눈을 볼 수 있었더라면 좀 더 확실하게 알 수 있을 텐데…….’

샤샤의 금빛 은빛 오드 아이 눈은 흔한 조합이 아니었으니까.

일단 세이룬의 맨 얼굴은 이제 2주 정도가 지나면 볼 수 있을 테니 외적인 요소에 대한 비교는 그때 가서 해도 충분했다.

그렇다면 언행은 어떠한가.

그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았다.

먼저, 샤샤는 부끄러울 때 고개를 숙이는 버릇이 있었다. 그리고 그건 세이룬도 그랬다.

그것 말고도, 세이룬과 샤샤는 잘 삐지는 것도 닮았고, 자신이 더 쓸모 있으니 다른 이의 도움을 받지 말라고 요구한 것도 닮았다.

또, 세이룬은 나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를 좋아한다며 잘 대해 줬다. 그건 분명 초면인 상대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깊이의 애정으로부터 비롯된 행동이었다.

그리고 샤샤가 죽은 뒤로 본 적 없던 꽃 문양도 대공성에서 다시 나타나지 않았던가.

‘무엇보다도, 그 누가 내 기분을 나아지게 하려고 제 뺨을 내게 비비겠냐고.’

위로를 해 주거나 소고기를 사 주는 것도 아니고, 세상에 남의 기분을 나아지게 하려고 제 뺨을 비비는 사람이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리고 놀랍게도, 천백 번 양보해서 이 모든 것들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더라도, 절대로 넘어갈 수 없는 게 존재했다.

바로, 세이룬은 내가 비 오는 날 아프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

대공성에 있을 때는 비가 온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나는 이에 대해서 아무에게도 말한 적이 없으니, 이는 나 말고는 아무도 몰라야 했다. 그게 맞았다.

그런데 그걸 대체 어떻게, 세이룬이 알고 있는 걸까.

“……정말로, 세이룬이 샤샤인 걸까……?”

나도 모르게 홀린 듯이 그렇게 중얼거렸을 때였다.

“비전하, 집사 타한입니다.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아, 응, 들어와!”

지레 흠칫한 나는 얼른 다리를 아래로 내리고 자세를 가다듬은 뒤 손에 깃펜을 쥐었다.

내가 열심히 서류를 훑는 척하는 순간, 문이 열리고 타한이 들어왔다.

곧장 내 앞까지 다다른 타한은 내게 서신을 하나 건넸다.

“비전하께 도착한 서신입니다.”

“고마워. 이만 나가 봐도 좋아.”

내게 꾸벅 인사를 한 타한은 곧장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 보니, 에인시아로 심부름을 보낸 포카와 레비나가 좀 늦네.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타한이 가져온 서신을 뜯었다.

서신은 카리에에게서 온 것인데, 대충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 주에 개최되는 베이센 소공작의 티파티에 나도 참석하라는 내용이었다.

“흠, 에스로타가 카리에에게 뭐라 언질한 모양이네.”

그래서 그때 ‘카리에가 화내지 않으면 참석할 수 있느냐’고 물었던 걸까.

어쨌거나 구교파의 티파티에 참석하게 되었으니 나의 ‘천사병’ 이미지를 위해 이 기회를 잘 이용해야 했다.

‘우선, 티파티에 참석하기 위한 준비물로는 티파티 참여자 명단과 그 사람들에게 맞는 맞춤형 선물이 있지.’

원래 비슷한 조건의 사람은 비교적 대등한 입장에서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관계를 맺는 기간이 늘어나면, 어느 순간부터 관계는 자원이 풍부한 사람이 자원이 적은 사람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형태로 점점 변질되어 가기 시작한다.

‘어차피 돈이란 자원이 썩어 넘치는 거, 이왕이면 구교파 귀족들에게 부채감이라도 안겨 주는 쪽이 좋잖아?’

나는 사악하게 웃으면서 빈 종이를 꺼냈다.

체사에게 물어볼 정보와 빈센트에게 지시할 내용을 신들린 듯 작성해 나가던 나는, 불현듯 다시금 떠오른 세이룬과 샤샤 생각에 도로 마음이 심란해졌다.

“……하.”

나는 길게 숨을 내뱉으며 내 오른쪽 손목을 내려다봤다.

문양이 있는지 없는지 더 이상 보지 않기 위해서 지금까지도 일부러 붕대를 감아 놓은 손목이었다.

‘샤샤가 세이룬이 아니면, 나는 또 실망하겠지.’

저번에 그때처럼 말이다.

나는 다시 한숨을 내쉬며 티파티 관련한 종이를 갈무리한 뒤, 쌓여 있는 결재안을 마저 처리하기 시작했다.

서류를 모두 처리한 후에는 체사와 빈센트를 집무실로 불렀다. 체사에게는 티파티의 참여자 명단과 그들의 기호에 관련한 정보를 요청하고, 빈센트에게는 그 정보를 바탕으로 각 귀족들에 맞는 선물을 마련하도록 지시했다.

저녁이 되었을 때는 이번에도 식당에 내려가지 않고 집무실에서 식사를 대강 때웠다.

그 후에는 밤늦은 시각이 될 때까지 집무실에서 시간을 죽이다가 방으로 돌아갔다.

“으아아, 보고 싶다…….”

나는 울적한 얼굴로 중얼거리며 집무실을 나섰다. 고작 이틀 제대로 안 봤다고 보고 싶다는 말이 입에서 절로 나오다니, 나도 정말 중증인 것 같다.

‘하지만 아직도 샤샤와 관련된 일이면 감정 주체가 잘 되지 않는 걸 어떡해…….’

나만 힘들면 되는 문제를 가지고 괜히 세이룬도 심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침울해하며 내 방 쪽으로 코너를 돈 순간이었다.

“……세이룬?”

나는 일순 걸음을 멈췄다.

내 방문 앞에서 얌전히 나를 기다리고 있던 세이룬이 복도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나를 발견하고 생긋 미소 지었다.

“이제 쉬러 가십니까?”

“세…… 이룬이, 여기는 어쩐 일이에요?”

나는 멍하니 그를 쳐다보다가, 이윽고 주춤거리며 그가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역시 내 쪽으로 다가온 세이룬이 앞으로 흘러내린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며 대답했다.

“에리카가 요 이틀간 계속 바쁘셔서 얼굴을 볼 수 없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그대가 보고 싶어 직접 찾아왔습니다.”

“…….”

이쯤 되면 세이룬의 부끄러움 기준은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건지 진심으로 궁금해진다.

‘어떻게 보고 싶었다는 말을 당사자에게 하면서 오늘 연어 덮밥이 맛있었다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웃을 수 있는 거지?’

부끄러움도 엄청 타는 사람이 말이다.

나는 괜히 달아오른 볼을 긁적이면서 슬쩍 시선을 피했다.

“……세이룬도 계속 바빴잖아요. 지금 시간도 꽤 늦었는데, 어서 가서 자야 다음 날이 멀쩡하지 않을까요?”

“잠은 아무래도 괜찮습니다. 오히려 에리카의 얼굴을 보아야 다음 날이 멀쩡할 거예요.”

세이룬이 해사하게 웃으며 속삭이듯 덧붙였다.

“실은, 요 이틀간 에리카를 보지 못해서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아…….”

나는 속으로 끙 소리를 흘리며 관자놀이를 눌렀다.

‘아무렇지 않은 척은 이제 한계다.’

애써 그러모으고 있던 감정 주체 HP를 세이룬이 해맑은 얼굴로 다 무력화시켜 버려서 이젠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하지만 그냥 진심을 전하는 사람한테 뭐라고 할 수도 없고.’

일단 최대한 침착하게 “아 그러신가요”하고 막 대답했을 때, 마침 방문 앞에 다다랐다.

이 익숙한 문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피곤해서 빨리 자고 싶다고 한 다음 침대에 다이빙해서 기력을 회복시켜야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마지막 힘을 짜내서 알바를 뛸 때 자주 지었던 접대용 미소를 지으며 세이룬을 돌아봤다.

“저기―”

“지난번에 제게 노래를 불러 달라 부탁하셨지 않습니까.”

하지만 내가 먼저 용건을 꺼내는 것보다 세이룬의 말이 더 빨랐다.

순간 당황해서 입을 다문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이룬이 다시금 눈웃음 지으며 이어 말했다.

“그때 불가피한 사정으로 인해 불러 드리지 못해서 내내 마음에 걸렸었습니다.”

“…….”

“노래를 지금 들려드리고 싶은데, 괜찮으십니까?”

“……좋아요.”

나는 반쯤 해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들려달라고 했는데 이제 와서 ‘됐어요’ 하기에는 너무 몰염치했다.

‘차라리 지금이 어두운 밤이라 다행인지도 몰라. 내 표정이 잘 보이지 않을 테니까.’

내가 듣고 싶은 노래가 아니라서 분명 실망하겠지만, 그 부정적인 표정쯤은 어둠이 알아서 잘 숨겨 주겠지.

나는 삐걱거리는 손으로 문을 연 뒤 세이룬을 안으로 안내했다.

내 시중을 드는 포카와 레비나는 이미 숙소로 돌려보냈기 때문에, 방에 불을 밝히는 것은 순전히 내 몫이었다.

환한 등롱이 걸려 있는 협탁 쪽으로 걸어간 나는 협탁 위에 있는 램프 두어 개에 추가로 불을 밝혔다. 그러고는 근처 침대에 걸터앉아 옆자리를 툭툭 쳤다.

“자, 이리 와요. 불 밝혔어요.”

“……네.”

왜인진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푹 숙인 세이룬이 종종걸음으로 내가 두드린 곳에 살포시 앉았다.

“이제 불러 주세요.”

나는 속으로 심호흡을 한 뒤, 방패용으로 입가에 미소를 둘렀다.

등롱의 주황빛 불빛이 스민 세이룬의 붉은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그리고 내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사라진 것은,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