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 * *
어제 수도에 도착했을 때 무척이나 새하얗던 하늘은, 세사르를 나오자 어제의 맑은 하늘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어둑한 빛을 띠고 있었다.
‘어쩐지 겨울 공기 사이로 물내음이 맡아지는 것 같기도 하고.’
비가 오려나. 나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다가 마차가 대기해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방금 전까지 맞지도 않는 연기를 하면서 까다로운 사람을 상대한 까닭인지 아니면 꿀꿀한 날씨가 불러낸 꿀꿀한 기분 때문인지, 온몸이 녹초가 된 듯 무거웠다.
머릿속에는 온통 어서 마차 안으로 들어가서 쉬고 싶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집에 도착한 뒤에는 커다란 욕조에 따끈한 물을 한가득 받아 놓고 목욕을 해야지. 그러고 나서는 그냥 바로 퍼질러 자야겠다. 멍하니 그런 생각들을 하며 마차 안에 발을 한 발짝 들여놓았을 때였다.
“이제 오십니까?”
사근사근하면서도 달콤한 저음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이곳에서 들릴 리가 없는 목소리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내 놀란 시선에 대한 답례로 부드럽게 웃어 준 세이룬이 팔을 뻗어 나를 제 곁으로 끌어당겼다.
“보고 싶었습니다.”
그가 내게로 고개를 숙이며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당황한 나는 멍하니 눈만 깜박이다가 이내 느리게 입을 열어 상대의 이름을 불렀다.
“……세이룬?”
“네, 에리카.”
고개를 들어 나와 얼굴을 마주한 그가 눈이 부시도록 환하게 웃었다.
그 아름다운 웃음을 보는 순간, 나는 가슴 언저리에서 꾸물거리던 불쾌한 기분이 서서히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신기한 사람.”
“네?”
“세이룬이 와서 기쁘다고요.”
비싯 웃음 지은 나는 어리광 부리듯 세이룬을 껴안으며 그의 가슴에 얼굴을 비볐다.
잠시 그대로 딱딱하게 굳어 있던 세이룬이 나무토막처럼 뻣뻣한 손동작으로 내 어깨를 작게 도닥였다.
별로 느껴지지도 않는 그 도닥임이 하찮고 귀여워서 키득키득 웃다가, 나는 다시금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좋네요.”
“…….”
“다들 이런 맛에 결혼을 하는 건가.”
우리 엄마도, 이런 포근함을 느끼고 싶어서 결혼을 했던 걸까.
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이며 생각했다. 맞닿은 옷자락 너머로, 조금은 빠른 듯한 고동 소리가 사랑스럽게 들려왔다.
“정말로 좋아…….”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에리카, 하고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알지 못하는 사이 찾아온 깊은 수마가 나를 서서히 잠식해 갔다.
* * *
어제 세사르를 나서면서 예상했던 대로, 아침에 눈을 떴을 때는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복부가 서서히 욱신거리기 시작해서, 나는 천천히 몸을 둥글게 말았다.
꼭 이런 날이었다.
그 새끼의 숨을 끊고, 내 숨도 끊긴 날.
본래 내 기상 시간에 맞춰서 찾아왔던 포카와 레비나는 바로 돌려보냈다. 나는 누구의 방문도 받지 않고 촛불도 밝히지 않은 채 어둑한 실내에 그저 있었다.
표정 관리가 되지 않는 까닭에, 밖으로 나가면 괜찮냐는 질문만 천백 개를 받을 것이 분명했으니까.
‘지금은, 그냥 혼자 있고 싶어…….’
나는 느리게 눈을 깜박이다가 이내 완전히 감았다.
커튼을 치지 못한 창문에서 토독토독 빗물 떨어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가만히 그 소리를 듣다가 어느 순간 잠이 든 듯했다.
문득, 이마에 시원한 것이 느껴져서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쪽으로 이마를 가져가 비볐다.
내 행동에 순간 멈칫하던 그 시원한 것은 이내 조심스레 내 머리칼을 쓸어 넘겨 주었다.
그 감각이 좋아서 배시시 웃다가,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언제 들어온 건지, 내 머리맡에 세이룬이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여긴, 어쩐 일이에요?”
잠시 세이룬을 바라보다가 멍하니 물었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인지 목소리가 버석하게 갈라졌다.
세이룬은 말없이 손의 위치를 바꿔서 내 뺨을 손등으로 한 번 쓸어 주다가 입을 열었다.
“비가 와서요.”
“…….”
“혼자서 이렇게 아파하고 있을까 봐.”
나직한 대답에 불현듯 웃음이 났다.
나는 피식 웃으며 세이룬의 손을 부드럽게 밀어냈다.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요.”
“…….”
“나 조금 더 잘 거니까, 세이룬은 걱정하지 말고 나가 봐요.”
할 일 많잖아요. 작게 덧붙이며 나는 더 이상 대화하지 않겠다는 뜻을 담아 몸을 반대로 돌려 누웠다.
하지만 세이룬은 방 밖으로 나가는 대신 아예 내 쪽으로 바투 다가왔다.
“실례하겠습니다.”
그러고는 덧붙이는 말에, 나는 의아한 눈으로 세이룬을 돌아봤다.
아니, 돌아보려 했다.
‘……?!’
세이룬의 뺨이, 내 뺨에 닿기 전까지는.
부드럽고 말랑한 온기가 뺨에 느껴지는 순간, 나는 그대로 숨을 멈춘 채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세이룬은 내 뺨에 제 뺨을 부드럽게 두어 번 비비다가 다시 천천히 상체를 바로 세웠다.
온기의 근원은 손쉽게 떨어져 나갈 수 있었어도, 한 번 나간 정신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한동안 그대로 눈만 깜박이고 있다가, 이내 얼굴을 화르륵 붉히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뭐…… 뭐예요, 그거?”
“네?”
“바, 방금, 그거, 그……!”
마치 키스하듯이 맞댄 뺨 말이다!
입맞춤으로부터 파생된 단어인 ‘뺨맞춤’이 머릿속을 뱅글뱅글 맴돌아서, 나는 도저히 제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나는 발광하듯 이불을 발로 차며 새빨갛게 물들었을 게 분명한 얼굴을 필사적으로 가렸다.
그런 내 반응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던 세이룬은 이내 빙긋 웃으며 흐트러진 밀 빛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 넘겨 주었다.
“에리카는 뺨을 비비면 기분이 나아지지 않습니까.”
“……내가요?”
본인인 나는 완전 금시초문인데요!
나는 끄응 하고 다 죽어 가는 소리를 흘리며 이불을 끌어다 내 얼굴을 덮어 버렸다.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에 머리가 다 어지러웠다.
잠시 그렇게 숨을 고르면서 애써 차분해지려고 노력하는데, 문득 이불 밖에서 세이룬의 침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중하다고 해 주지는 않으십니까.”
그 말에, 나는 슬쩍 이불을 내리고 세이룬을 바라봤다.
세이룬은 귓가를 발그랗게 물들인 채 침울한 기색으로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었다.
‘지금, 뺨 비비는 건 안 부끄러우면서 저 말 하는 건 부끄러운 거야?’
정말이지, 세이룬의 부끄러움 기준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나도 모르게 풋 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복부에서 느껴지던 욱신거리는 감각은 어느 순간부터 사라지고 없었다.
“세이룬.”
나는 상체를 일으켜 앉은 뒤, 두 팔을 뻗어서 세이룬을 꼭 껴안았다.
내 품에 가득 안기게 된 세이룬은 당황한 듯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당황한 두 팔이 나를 마주 안아 오지도, 도망가지도 못한 채 어쩔 줄 모르고 허공을 배회했다.
“에리카……?”
“고마워요. 덕분에 많이 나아졌어요.”
나는 진심을 담아 속삭였다.
내 말에, 세이룬은 조금 더 머뭇거리다가 이윽고 조심스럽게 나를 마주 안아 왔다.
“……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잠시 그렇게 나를 안고 있던 그가 나지막이 고백해 왔다.
“당신의 행복이, 저로 인한 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번에 그는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자신의 진심을 오롯이 전달하는 것처럼, 그렇게 담담하고 솔직하게 고백해 왔다.
그래서 나도 솔직하게 말했다.
“이미 세이룬은 저를 행복하게 해 주고 있는걸요.”
“……이것으로는 부족합니다.”
그가 투정 부리듯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비비적거렸다. 나는 피식 웃으며 세이룬의 머리를 도담도담 도닥였다.
세이룬은 부족하다고 말했지만, 나는 지금 충분히 행복했다.
애초에 ‘김해수’가 죽은 후, 나를 비 오는 날 웃게 한 존재는 샤샤와 세이룬이 전부……
‘……어?’
불현듯, 세이룬을 도닥이던 내 손짓이 멈췄다.
‘비가 와서요.’
‘혼자서 이렇게 아파하고 있을까 봐.’
세이룬은 어떻게 내가 비 오는 날 아프다는 걸 알고 있지?
- 괜찮아?
비 오는 날 내가 아프다는 걸 아는 존재는, 이 세상에서 샤샤밖에 없을 텐데.
‘에리카는 뺨을 비비면 기분이 나아지지 않습니까.’
그리고, 내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내게 제 뺨을 비비는 건, 샤샤의 버릇이었지 않은가?
“……세이룬.”
세이룬의 옷자락 위로 내려앉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당장이라도 오른쪽 손목에 감긴 붕대를 뜯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며, 차분하게 그를 불렀다.
“네, 에리카.”
세이룬이 다소곳하게 대답했다.
나는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가, 천천히 목소리를 꺼냈다.
“나…… 노래 불러 줘요.”
“네?”
“나, 갑자기 노래가 듣고 싶어.”
나는 세이룬을 품에서 떨어뜨리고 다시 한번 더 요구했다.
무슨 정신으로 그런 뜬금없는 요구를 했는지 몰랐다. 그냥, 그냥 갑자기 내가 샤샤에게 불러 줬던 그 노래가 미치도록 듣고 싶었다.
그래서 떼를 쓰듯 어리광을 부렸다.
세이룬이 그 노래를 알고 있을 리가 없는데도.
천백 번 양보해서 만약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노래를 불러 줄 확률은 극히 적은데도.
세이룬은 갑작스러운 내 요구에 당황하다가, 조금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때였다.
“대공 전하, 그리고 비전하. 집사 타한입니다.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똑똑 하는 노크 소리와 함께 타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나는 불현듯 정신을 차렸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샤샤와 세이룬이 동일 인물이라니. 샤샤는 뱀이고 세이룬은 사람인걸.
―그럴 리가 없잖아.
나는 불에 데기라도 한 듯 화들짝 놀라면서 꾹 움켜쥐고 있던 세이룬의 옷자락을 놓았다.
“드, 들어와.”
나는 아쉬운 듯 어깨가 시무룩하게 쳐진 세이룬을 애써 외면하면서 말했다.
잔뜩 체념한 얼굴로 들어온 타한은 세이룬의 시선을 필사적으로 피하면서 입을 열었다.
“지금 아이테 왕국 건으로 급히 올라온 보고가 있습니다.”
“…….”
“전하, 지금 아이테 왕국 건으로 급히 올라온 보고가―…”
“알았으니 그만 나가 보도록.”
세이룬이 한이 가득한 목소리로 타한의 말을 잘랐다.
평소였다면 도망치듯 밖으로 사라지는 타한을 가여운 눈으로 바라봤겠지만, 머리가 엉킨 실타래처럼 헝클어진 지금은 달랐다.
머리가 너무나 복잡해서 당장 이불을 덮고 한숨 푹 자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