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에스로타는 아름다운 녹금안에 매끄러운 연보랏빛 머리칼을 가진 미인이었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맞았다.
“안녕하세요, 소공작님……! 여, 여기 앉으세요!”
“하하, 이리 열렬히 환영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에스로타는 부드럽게 웃으며 내가 두 손으로 가리킨 자리에 앉았다.
“비전하께서는 에이리트가 정말 오랜만이시죠? 외숙부님과는 회포를 푸셨나요?”
그녀가 의례적인 안부를 묻듯 내게 물었다.
그 질문을 듣는 순간, 내 웃음에 찰나 금이 갔다.
그러고 보니, ‘착하고 유약한 조카’는 에이리트에 방문하면 가장 먼저 친정을 찾을 거라는 걸 깜빡하고 있었다.
‘그 엿 같은 면상들을 이렇게나 빨리 마주해야 한다니.’
안 그래도 성혼식 때 질리도록 볼 텐데 말이지.
당장이라도 썩어 들어가려는 표정을 애써 수습한 나는 소심과 기대가 반반 섞인 얼굴로 에스로타를 바라봤다.
“그분들이…… 저를 반가워하실까요?”
“……네?”
“제가 그분들을 뵙는 게, 그분들에게 실례가 아닐지 걱정돼서요…….”
나는 자신이 없는 것처럼 머뭇머뭇 물었다.
에스로타는 잠시 말문이 막힌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저, 소공작님?”
한참이 지나도 그녀가 말이 없자, 나는 의아한 얼굴로 에스로타를 불렀다.
“……아, 잠시 실례했습니다.”
내 부름에, 흠칫 정신을 차린 에스로타는 다시 그린 듯한 미소를 입가에 지었다.
“비전하께서는 후작 각하와 후작 부인의 하나뿐인 조카시잖아요. 어떻게 비전하의 방문이 실례겠어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너무 기뻐요.”
그런 말은 처음 듣는다는 것처럼, 나는 주춤거리면서도 배시시 미소 지었다.
그런 나를 가만히 응시하던 에스로타가 저도 모르게 문득 미간을 찌푸렸을 때였다.
마침 세사르의 직원이 에스로타 몫의 화차를 가져왔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에스로타의 화차를 바라봤다.
“와, 소공작께서도 저와 같은 차를 주문하셨네요? 화차를 좋아하시나 봐요!”
들뜬 듯한 내 목소리에, 에스로타는 두어 번 눈을 깜박이다가 이내 다시금 미소 지었다.
“정말 비전하께서도 같은 차를 드시고 계시네요. 저는 화차를 좋아한답니다. 녹차에 더해지는 은은한 재스민 향기가 마음에 들어서요. 비전하께서는 왜 화차를 좋아하시나요?”
“음, 예뻐서요…….”
“예뻐서요?”
단순하면서도 명료한 대답에 놀라기라도 한 듯, 에스로타가 눈가를 좁혔다.
나는 쑥스러운 듯 배시시 웃으며 내 찻잔을 에스로타 앞으로 조심스럽게 가져갔다.
“보세요. 하얀 꽃잎과 함께 동동 떠 있던 이파리가 마치 낙엽처럼 하나둘씩 밑으로 떨어져 내리는 게 예쁘지 않나요?”
“……정말로 예쁘네요.”
“이 푸른 잎이 하얀색이었으면, 꼭 찻잔 안에 눈이 내리는 것 같았을 거예요.”
나는 다시 찻잔을 내 앞으로 가져갔다.
내가 찻물을 조심스럽게 한 모금 입에 머금는 동안, 나를 가만히 응시하던 에스로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비전하, 제가 비전하게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아, 얼마든지 여쭤보세요!”
나는 질문을 받는 상황이 감격스럽기라도 한 것처럼 활짝 웃으며 그녀를 봤다.
에스로타는 잠시 묘한 눈길로 나를 보다가 이어 말했다.
“비전하께서는 구교파의 중심 귀족 가문인 셀루리아 후작 가문의 영애이셨잖아요.”
“맞아요.”
“그런데 왜 신교에 계속 후원을 하고 계시나요?”
“네?”
나는 당황스러운 질문을 들은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 반응을 본 에스로타가 얼른 덧붙였다.
“물론 비전하께서는 안타까운 마음에 아이들을 후원한 거라는 얘기는 이미 들었어요. 제가 묻고 싶은 것은, 후원을 그만해 달라는 카리에 영애의 요청도 거절하고 신교에 대한 후원을 계속 지속할 만큼 그 일이 가치 있냐는 거랍니다.”
“네……? 카리에가 제게 요청했었다고요?”
나는 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입술을 파르르 떨며 고개를 숙였다.
“저, 저는…… 저는 그저 잘 먹지도 못하고 몸도 성치 못한 아이들이 불쌍해서…… 너무 눈에 밟혀서…….”
“…….”
“카, 카리에가 제게 후원하지 말라고 했을 줄은 정말 몰랐어요……. 아, 왜 몰랐지?”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숙인 채 재빨리 하품을 했다.
몇 번 그렇게 하자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고개를 틀어서 눈물을 슬쩍 내보이자, 에스로타가 당황해서 손수건을 꺼내 내게 건넸다.
“비전하, 울지 마세요. 저는 비전하를 탓한 게 아니랍니다. 다만 정말로 궁금해서 여쭤본 것이었어요.”
“하지만…… 제 자신이 너무 한심해요. 카리에가 내게 서신을 보낸 것도 모르고, 이미 5년간 후원을 지속하겠다는 약속을 해 버렸어요……. 그러면 안 되는데…….”
“괜찮아요, 비전하. 깜박하고 잊을 수도 있잖아요.”
“안 돼요. 전 그러면 안 돼요. 안 되는데…….”
나는 고장 난 것처럼 계속 같은 말을 중얼거리며 에스로타의 손수건을 거절했다.
“저는 이런 귀한 것을 받을 자격이 없어요. 카리에의 서신이 온 줄도 모르다니…….”
“……비전하. 외람되지만, 카리에 영애의 서신이 온 줄 모르면 왜 안 되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잠시 침묵하던 에스로타가 최대한 감정이 절제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나는 맨손으로 눈가를 박박 문지르면서 대답했다.
“저는, 저는…… 원래 그래요.”
“원래요?”
“네. 원래…… 저는 그래야 해요.”
“그런가요.”
나를 빤한 눈으로 바라보던 에스로타가 내 쪽을 향해 상체를 숙이고는 들고 있던 손수건으로 내 눈가를 부드럽게 닦아 주었다.
나는 놀란 눈으로 에스로타를 바라봤다.
“저는…… 잘한 게 없는데…… 이런 거 받을 수 없는데…….”
“이런 게 뭔가요.”
“이런…… 이런 다정한 거요.”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화들짝 놀라서 두 손을 저었다.
“아, 아니에요! 방금 그건 못 들은 걸로 해 주세요.”
“……그것이 비전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바라면, 그리할게요.”
에스로타가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답했다.
나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방금 건 못 들은 것으로 해 달라’는 요청에, 에스로타는 ‘내가 진정으로 원한다면’ 그리하겠노라 답했다.
즉, 에스로타는 못 들은 걸로 해 달라는 내 요청이 내가 진정으로 원해서 하는 요청이 아니라는 것을 꿰뚫어 본 것이다.
‘이대로 셀루리아를 대하는 에리카의 태도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고 주의 깊게 봐 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소공작님.”
“그나저나 ‘소공작님’이라니, 비전하께 듣기에는 너무 과분한 호칭인걸요. 그냥 소공작이라 불러주세요. 물론 이름으로 불러 주시면 더 좋지만요.”
분위기를 전환하려는 듯, 에스로타가 밝게 웃으면서 화제를 돌렸다.
“이, 이름이요……? 정말 그래도 되나요?”
“그럼요. 단, 비전하께서도 제게 이름을 허락해 주셔야 해요.”
“저야 영광이에요!”
내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에스로타도 눈꼬리를 접어 미소 지었다.
“그러면 저는 앞으로 비전하를 에리카라고 부를게요. 에리카도 편하게 저를 에스로타라 불러주세요.”
“……네, 에스로타.”
내가 배시시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은 그녀가 이어 말했다.
“참, 그리고 저 다음 주쯤에 티파티를 열 계획이에요. 에리카가 와 주신다면 무척 기쁠 것 같은데, 혹시 가능하시다면 와 주실 수 있으신가요?”
“티파티요?”
뜻밖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뜬 나는 기쁜 것처럼 이내 환하게 웃었다.
당장이라도 고개를 끄덕일 것처럼 활짝 웃던 나는 순간 멈칫하며 침울하게 고개를 푹 숙였다.
“말씀은 정말 감사하지만…… 제가 카리에의 초대보다 에스로타의 초대를 먼저 수락하면 카리에가 화를 낼 거예요. 외숙부님이나 외숙모님도 저를 혼내실걸요…….”
“제 티파티에 카리에 영애도 참석하실 예정인데, 괜찮지 않을까요?”
나는 순간적으로 혹한 것처럼 반짝 빛나는 눈으로 에스로타를 바라봤다가, 이내 다시 기운 없이 시선을 미끄러뜨렸다.
“정말 죄송하지만, 그래도 전 카리에의 초대를 먼저 수락해야 해요. 에스로타의 초대는 그 이후에 가도록 할게요.”
“…….”
“……나중에도, 저…… 초대해 주실 거죠?”
나는 기대 어린 얼굴로 에스로타를 바라봤다.
에스로타는 내 행동에서 위화감을 느낀 사람처럼 나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이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에리카가 제 티파티에 오신다면 오히려 제가 기뻐해야 할 일인걸요.”
“……그렇게 행복한 말은 처음 들어요…….”
나는 양 뺨을 부여잡고 배시시 웃었다.
그런 내 반응을 하나도 빠짐없이 눈에 담으며, 에스로타가 은근한 어조로 다시 물었다.
“혹시 이번 티파티에도, 카리에 영애께서 화를 내지 않으신다면 에리카는 제 초대에 응해 주실 수 있으신 건가요?”
“그럼요……!”
나는 생각만 해도 신이 난다는 듯 활짝 웃었다.
“실은, 저 그동안 정말로 에스로타의 티파티에 꼭 한번 초대받고 싶었어요. 저에게 과분한 일이지만, 저는 예전부터 에스로타와 친하게 지내고 싶었었거든요…….”
나는 수줍은 듯 소곤소곤 이어 말했다.
“초대해 주신다면, 정말 정말로 영광일 거예요…….”
“……하지만 전.”
내 말에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던 에스로타는 이내 빠르게 표정을 수습하며 빙긋 웃었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에리카. 다음 주의 티파티에 대해서는 제가 셀루리아 후작 영애께 한번 여쭤볼게요.”
“감사합니다, 에스로타.”
나는 마치 아이가 웃듯 환하게 웃었다.
내 웃음을 잠시 눈에 담던 에스로타는 반 이상 남은 제 찻잔을 우아하게 들어 올렸다.
찻잔 속에서 떨어져 내리는 찻잎을 가만히 바라보던 에스로타가 녹금빛 눈동자를 곱게 휘었다.
그녀가 중얼거렸다.
“……왠지, 이 화차가 정말로 좋아질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