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나는 어음을 지세나의 손에 쥐여 주었다.
안절부절못하며 휘르셀의 눈치를 살피던 지세나는 휘르셀이 고개를 끄덕이자 조심스럽게 내게 고개를 숙였다.
“가, 감사합니다, 대공비 전하…….”
“아니야. 나야말로 이렇게 좋은 의상을 디자인해 줘서 고마워. 다른 디자인도 기대하고 있을게.”
내가 방긋 미소 짓자, 지세나의 검은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녀를 다독여서 돌려보낸 휘르셀이 내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저희 아이를 좋게 봐 주셔서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좋으니까 좋게 본 건데, 뭐. 휘르셀도 항상 에인시아를 잘 운영해 줘서 고마워.”
나는 가방에서 다른 어음을 꺼내 휘르셀에게 내밀었다.
괜찮다며 몇 번 손사래를 치던 휘르셀은 이내 내게 감사의 뜻으로 깊이 고개를 숙인 뒤 어음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비전하. 성심을 다해 에인시아를 운영하겠습니다.”
나는 다시금 웃었다. 예상치 못한 성과금은 동기 부여가 되는 법이다.
나는 내 몫의 홍차를 마저 마신 뒤, 과거 대공성에서 쟀던 치수를 휘르셀에게 넘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슬슬 가 봐야 할 것 같아.”
“배웅해 드리겠습니다.”
내가 걸음을 옮기자 휘르셀이 따랐다.
나는 에인시아를 나서기 전에 휘르셀을 돌아봤다.
주위에 아닌 척 나를 흘끔거리고 있는 귀족들이 꽤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 나는 비밀을 말하는 사람처럼 소곤소곤 입을 열었다.
“나…… 이런 데 처음 와 봐.”
“…….”
“오늘 친절하게 대해 줘서 고마웠어.”
그렇게 중얼거린 나는 수줍은 듯 배시시 웃음 지었다.
잠시 충격 받은 사람처럼 나를 멍하니 바라보던 휘르셀은 다급히 표정을 갈무리하며 내게 고개를 숙였다.
“……당연, 당연한 일입니다.”
“아니야, 그건 고마운 거야.”
나는 순수한 얼굴로 그렇게 말한 다음, 티 나지 않도록 슬쩍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 말을 들었을 것이 분명한 귀족들이 저마다 모여서 수군거리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씨익 웃음 지었다.
내가 이곳에서 할 일은 끝났다.
이제 남은 것은, ‘친절하게 대해 준 것’에 대해 ‘고맙다’고 인사하는 대공비를 목격한 귀족들이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였다.
‘둘 중 하나겠지. 내가 너무나도 마음 여리고 착해서 뭐든지 고맙게 여긴다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저런 당연한 친절이 고맙게 느껴질 만큼 내가 그동안 ‘친절’한 대접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거나.
나는 그렇게 남겨진 사람들에게 사소한 의구심 하나를 던져 준 채로, 대공가의 마차에 올라탔다.
* * *
다음으로 내가 향한 곳은 에이리트의 번화가에 위치한 세사르였다.
살롱의 기능을 주로 담당하고 있는 세사르 역시 에인시아처럼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 주었는데, 그 규모가 어찌나 큰지, 한 층에 80평 정도는 할 것 같은 저 3층짜리 건물이 통째로 세사르라고 했다.
‘주인 빼고 모두가 알고 있었던 세사르의 위엄…….’
나는 허허롭게 웃으면서 역시 나를 마중 나온 세사르의 지배인을 바라봤다.
페르네 르 리센.
신교파의 대표적인 귀족 가문 중 하나인 리센 백작가의 차녀로, 소백작의 지위를 받은 장남 대신 세사르를 물려받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사교계의 중심지를 신교파에서 갖고 있는 걸 아니꼽게 여긴 구교파가 백작가의 재정에 장난을 치면서 세사르를 잃어버릴 뻔했지.’
구교파의 손으로 넘어가 버릴 뻔한 걸 해수인 내가 홀랑 사 버린 거고 말이다.
그렇게 보면, 나는 페르네에게 일종의 은인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찌 됐든 세사르에 페르네와 신교의 영향력을 계속 뻗칠 수 있도록 해 준 건 나였으니까.
“세사르의 지배인, 페르네 르 리센이 세사르의 주인이신 드레인 대공비 전하를 뵙습니다.”
페르네의 정중한 인사에, 뒤에 시립해 있던 세사르의 직원들이 내게 절을 하듯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세사르의 주인이신 드레인 대공비 전하를 뵙습니다.”
헉, 왜 다들 맨바닥에 무릎을 꿇는 건데! 누가 그딴 거 시켰어!
나는 진심으로 당황해서 허둥지둥 두 손을 저었다.
“다, 다들 어서 일어나! 무릎 아플 텐데 왜 무릎을 꿇고 있어!”
내 기색에서 난색을 알아차린 페르네가 직원들에게 눈짓하자 직원들은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진짜 왜 무릎을 꿇은 건데. 설마 ‘누가누가 해수 님의 총애를 더 가져가나’ 이런 거로 에인시아와 경쟁하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와 씨, 원래 세계였으면 얄짤없이 갑질이라고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떴다.
나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달래면서 페르네에게 입을 열었다.
“페르네, 나는 이런 과도한 예의치레는 좋아하지 않아. 오늘 인사는 이왕 한 거니 받겠지만, 다음부터는 이러지 않았으면 해.”
“예, 비전하. 명심하겠습니다.”
나는 그 뒤로도 몇 번이나 더 이러지 않겠노라는 다짐을 받고서야 안으로 들어갔다.
나 갑질 진짜로 혐오하는데, 이번엔 진짜로 심장이 벌렁거렸다.
내부에는 꽤 많은 귀족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직접 손님을 안내하지 않기로 유명한 페르네가 손님으로 보이는 누군가를 안내하는 모습에 제 눈을 의심했다.
그렇게 온갖 사람들의 이목을 모으면서 나를 3층의 제일 고급스러운 다실로 안내한 페르네는 다시 한번 더 내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해수 님, 감사 인사가 너무 늦었습니다. 세사르를 구교파에 뺏기지 않게 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나는 그냥 세사르의 주인이 된 것일 뿐인데, 감사라니. 과분한 말이야.”
나는 얼른 손사래를 쳤다.
그런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페르네는 이내 부드럽게 웃으면서 굽혔던 허리를 폈다.
“은인께서 인사를 부담스러워하시니 감사 인사는 여기서 끊어 내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진심으로 해수 님께 감사하고 있으니, 혹 제가 도울 일이 있다면 무엇이든 말씀해 주세요. 힘이 닿는 데까지 돕겠습니다.”
“그렇게 말해 주니 오히려 내가 고마워, 페르네.”
나는 무해하게 웃어 보이며 그렇게 말했다.
페르네는 단순히 지금 내가 ‘해수’이기에 저런 말을 한 것일까, 아니면 나를 정말로 ‘해수’라고 생각해서 저런 말을 한 것일까.
‘아니면 내 근처에 있을지도 모를 진짜 해수에게 전하는 말일 수도 있고, 내가 진짜 해수가 맞는지 떠보는 걸 수도 있지.’
지금 내 컨셉은 ‘해수이기는 하되, 대공비가 되면서 해수가 된 순진한 영애’였으니, 일단은 그에 맞는 대답을 하는 게 좋았다.
“……고마우시다니, 당치도 않습니다. 아, 혹시 도움이 될까 말씀드리자면, 세사르의 모든 다실이 그렇지만, 특히 이 다실은 방음과 보안에 최적으로 맞춰져 있으니 혹시라도 말이 새어 나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응, 알았어.”
“혹시 드시고 싶은 차와 간식이 있으십니까?”
드디어 주문서를 꺼낸 페르네가 내게 물어 왔다.
나는 일부러 기대하는 것처럼 눈을 반짝이면서 말했다.
“내 친정 가문인 셀루리아 후작가의 흑차가 그렇게 유명하다고 들었어. 따뜻한 흑차 한 잔과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오이 샌드위치를 가져와 줘.”
“셀루리아 가문의 흑차…… 말씀입니까?”
내 주문을 들은 페르네의 주황색 눈동자에 당황과 곤란이 반반 섞인 기색이 어렸다.
“말씀드리기 죄송하지만, 셀루리아의 흑차는 세사르에 더 이상 납품되지 않습니다.”
“뭐……? 왜? 무슨 일 있어?”
나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은 것처럼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페르네는 입술을 깨물며 내 눈치를 살피다가, 이윽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전에…… 셀루리아 가문과 마찰이 좀 있었습니다. 저는 해수 님께서 당연히 알고 계실 거라 생각했습니다만…….”
“전혀 몰랐어…….”
몰랐기는 개뿔이. 그걸 지시한 게 난데.
진실이 어쨌건, 나는 울상을 지은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내 기색을 살피며 내 반응이 진심인지를 가늠하던 페르네는 이내 내게 고개를 숙였다.
“하여 송구하지만, 셀루리아의 흑차는 주문이 불가능합니다. ……다른 흑차를 내올까요?”
“아니, 그럼 흑차는 됐어……. 재스민을 섞은 화차가 있으면 그걸로 내줘. 찻잎은 세작이 좋아.”
“알겠습니다, 비전하. 그럼 편히 기다려 주세요.”
나를 지칭하는 호칭이 바뀌었다.
여전히 정중한 태도로 내게 인사한 페르네는 주문서를 갈무리한 뒤 다실 밖으로 나갔다.
달칵. 문이 닫힌 뒤, 나는 그때까지 짓고 있던 순수한 표정을 풀고 연기하느라 굳은 안면근육을 풀었다.
‘페르네는 셀루리아 영애였을 시절부터 내가 해수였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거네.’
하지만 그 생각도 이제는 바뀌었을 것이다. 마지막에 나를 ‘해수 님’이 아닌 ‘비전하’로 지칭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주문한 음식은 빠르게 나왔다.
아까 내게서 주문을 직접 받아 간 것처럼 음식도 직접 가져다준 페르네가 음식 세팅을 마친 뒤에 내게 입을 열었다.
“비전하, 베이센 소공작께서 합석을 청하시는데 어떻게 답변드릴까요?”
“베이센 소공작께서?”
나는 뜻밖이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베이센 소공작은 이렌텔의 3대 공작 가문 중 하나인 베이센 공작 가문의 후계자로, ‘사교계의 별’이라는 호칭을 가졌을 정도로 사교계에서의 영향력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물론, 공작가의 후계이니만큼 철저한 구교파 사람이기도 하고.
‘특히나 체사 씨에게 듣기로는, 얼마 전 쓰러진 베이센 공작의 건강이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황태자의 성혼 이후 에스로타가 공작위를 물려받을 예정이라 했는데.’
안 그래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사람이 왜 세사르까지 와서 나와의 합석을 요청했을까. 요청의 수락 여부로 대공비의 성향을 떠보려는 의미이려나.
“나는 좋아! 어서 안내해 드려.”
요청의 이유가 뭐든 간에, 나로서는 소공작의 합석 요청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기대된다는 듯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리고 소공작께서 원하는 차도 이곳으로 보내 줘. 값은 내가 낼게.”
구교파를 반가워하는 ‘해수’의 반응에도 동요하지 않은 페르네는 내게 “알겠습니다”하고 답한 뒤 예의 바른 태도로 다실을 나섰다.
잠시 후, 에스로타 르 베이센 소공작이 다실 안으로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비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