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박데기 영애의 반격을 조심하세요 (50)화 (50/139)

50화

귓가에서 소곤거리는 그의 다정한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사면초가처럼 사방을 가득 에워싼 세이룬의 향기에 갇혀서 소리 없이 절규했다.

아아, 이번에도 망했어요.

잠시 침묵하던 나는, 이윽고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세이룬.”

“네?”

“부처님도 부인이 있고 아들이 있었어요.”

“……네?”

“부처님조차 고자가 아니란 말이에요.”

“……?”

“하물며 저는 신체 건강한 평범한 사람이랍니다?”

나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말했지만, 알아들을 리 없는 세이룬은 그저 한없이 말간 얼굴로 고개만 갸웃거릴 뿐이었다.

“부처……? 부처가 무엇입니까?”

“……하하.”

울고 싶다.

나는 그저 해탈한 얼굴로 세이룬의 품을 빠져나온 뒤, 한없이 담백하고 정결한 손동작으로 세이룬의 복근이 보이지 않도록 가운을 정리해 줬다.

“이건 부디 넣어 두란 말이었어요.”

“…….”

“자, 이제 세이룬은 어서 자요. 착한 미자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하는 법이에요.”

침대에서 베개를 주워 든 나는 아무런 타격을 입지 않은 척, 초연한 척 웃으며 애꿎은 베개만 터질 듯이 꽉 끌어안았다.

다리가 로봇처럼 뻣뻣하게 나갔지만, 애써 무시했다.

“잘 자요, 세이룬.”

나는 협탁 위에 있는 등롱불을 끈 뒤 침대 위에 경건한 자세로 누웠다.

문득 옆에서 ‘이것도 아닌가……’ 하는 중얼거림이 들린 것도 같았지만, 나는 머릿속을 꽉 채운 세이룬의 탄탄하면서도 늘씬한 몸과 싸우느라 그 중얼거림에 신경을 쓸 수 없었다.

하하. 오늘도 별수 없이 시험에 들고 마는구나. 재밌네.

“…….”

실은 전혀 재밌지 않았다.

* * *

다음 날, 나는 온몸을 가득 짓누르는 피곤함을 애써 억누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밤에 잠을 잘 자지 못했더니 온몸이 천근만근처럼 무거웠다.

‘내가 이렇게 음란마귀였을 줄이야…….’

나는 눈을 퀭하게 뜨며 레비나가 가져온 세숫물로 세수를 했다.

안 그래도 오늘 에인시아에 가서 의상도 맞추고 세사르에 들러서 대공 부부가 수도에 왔노라 알리고 해야 하는데 이렇게 피곤하다니, 역시 사람은 죄짓고는 못 산다.

어떻게 아침 식사를 하고 준비를 마쳤는지도 모르겠다.

정말 밖에 나가도 괜찮겠느냐는 세이룬의 걱정스러운 시선을 뒤로한 채 얼레벌레 대공저를 나선 나는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전하. 비전하?”

“으응…… 어?”

꿈속을 허우적거리며 웅얼거리던 나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

번쩍 눈을 뜨고 고개를 치켜들자, 내 눈앞에서 레비나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살폈다.

“비전하, 많이 힘드세요……?”

“아니흐아암…… 아니, 괜찮아.”

나는 늘어지게 하품을 한 뒤, 두 손으로 짝 뺨을 쳤다.

“꺅! 비전하……!”

내 딴에는 정신을 차리려고 한 행동이었는데, 레비나한테는 정신이상자의 행동으로 보인 모양이었다.

“비전하, 옥체를 소중히 다루셔야죠……!”

레비나가 붉은 눈동자 가득 눈물을 글썽이며 내 뺨을 조심스럽게 문질렀다.

그 손짓이 정말이지 아기의 뺨을 만지는 것처럼 섬세해서, 나는 괜히 낯간지러운 마음에 고개를 비틀어 레비나의 손을 뗐다.

“레비나, 나 괜찮아. 예전에도 정신 차릴 때 종종 하던 짓인걸.”

“하지만 전하, 앞으로는 절대로 그러지 마세요. 소중한 뺨에 상처가 날까 봐 무서운걸요…….”

“하하, 알았어. 앞으로는 안 그럴게.”

나는 볼을 긁적이며 시선을 피했다.

왠지 대공비가 된 이후로 사소한 거에도 과보호를 받는 것 같다고 느껴지는 건 착각만이 아닐 것이다.

열심히 레비나를 어르고 달랜 나는 마차에서 내렸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포카가 나를 에스코트해 주었다.

‘여기가 에인시아…….’

나는 묘한 심정으로 에인시아의 건물을 훑었다.

에인시아는 내 소유의 의상실이었지만, 이곳을 두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내가 온다는 것을 미리 연락받은 에인시아의 지배인, 휘르셀이 활짝 웃음 띤 얼굴로 내게 인사를 올렸다.

“에인시아의 주인이자 대공비 전하이신 에리카 르 드레인 전하를 뵙습니다.”

“에인시아의 주인이신 대공비 전하를 뵙습니다.”

휘르셀의 뒤편으로, 에인시아의 직원들이 줄지어 선 채 내게 깍듯이 인사를 올렸다. 에인시아를 방문했던 주위의 귀족들이 저마다 웅성거리며 나를 흘끔거렸다.

‘하하, 대공비가 수도에 왔다고 정말 확실하게 홍보가 되겠네.’

덤으로 쪽도 절찬리에 판매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아까와는 다른 차원의 낯간지러움을 느끼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웃음 지었다.

“네, 반가워요.”

“비전하, 부디 말씀을 낮춰 주세요.”

휘르셀이 황송해하며 허리를 굽혔다. 나는 그 반응에 흠칫 놀라는 척을 하며 허둥지둥 두 손을 저었다.

“아, 알았어. 음, 나 이곳에서 입을 옷을 몇 벌 지으러 왔거든.”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내게 허리를 굽히며 안쪽으로 손짓한 휘르셀이 직원들에게 눈짓했다.

상사의 눈치를 받은 직원들은 눈치 빠르게 조르르 안으로 들어갔다.

‘여러분, 힘내세요…….’

속으로 직원들에게 응원의 한마디를 보낸 나는 입가에 무해한 미소를 지으며 휘르셀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이쯤이면 대공비가 물러 터졌다는 인식이 다들 박혔겠지.

수도 제일의 고급 의상실이라는 타이틀답게, 에인시아의 내부는 눈이 돌아갈 정도로 화려의 정점을 찍었다.

잠시 멍하니 주변 장식을 바라보던 나는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휘르셀을 인지하고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큼큼. 저 부잣집 마나님으로 산 지 얼마 안 됐어요.

“의상 종류는 어떤 것을 찾으십니까, 비전하?”

나를 에인시아 한쪽의 소파로 인도한 휘르셀이 커다랗고 화려한 카탈로그 책자를 내 앞으로 가지고 왔다.

내가 소파에 앉는 동안 직원이 빠르게 테이블 위로 내 몫의 차를 세팅했다.

직원이 내온 홍차를 한 모금 마신 나는 휘르셀이 가져온 책자를 천천히 넘겨 보았다.

어디 보자…….

“우선 외출용 드레스가 10벌 정도 필요해. 연회용 드레스는 7벌이면 될 것 같고……, 일상생활에서 입을 실내용 드레스는 20벌이면 좋겠다. ……헐, 잠깐, 상의와 바지 세트 이런 게 있었어?!”

아무 생각 없이 카탈로그를 휙휙 넘기던 나는 뒤편에 수록되어 있는 바지를 보고 깜짝 놀랐다.

‘분명 대공성을 출발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여성복 중에 바지는 없었는데?’

뭐, 이곳의 남성복은 바로크 남성복이 미관상 취향이 아니라는 신아 때문에 전혀 바로크적이지 않긴 했다.

그래도 어쨌든 문화적 배경은 바로크 시대라 여성복 바지는 정말로 생각지도 못했었는데!

물론 카탈로그에 수록된 의상은 엉덩이 쪽으로 상의가 치마처럼 발끝까지 늘어지는 디자인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분명 바지였다.

‘흠, 어쩌면 진짜 근세 유럽이 아니라서 이런 변화가 발생한 것인지도.’

자본의 영향이 크게 미치는 세계니만큼, 편안한 의상을 바라는 사람들의 수요가 반영됐다고 하면 바지 같은 새로운 여성 패션의 이른 등장을 딱히 특이하게 바라볼 것도 없을 듯했다.

아무튼, 중요한 건 ‘바지가 왜 바로크 배경에서 나와’가 아니었다.

바지를 입을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거지!

“아, 그것은 이번에 저희 젊은 디자이너가 새롭게 선보이는 의상이랍니다.”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뜬 나를 보며 휘르셀이 상냥하게 설명해 줬다.

나는 재빨리 손가락으로 상의와 바지 세트를 탁탁 두드렸다.

“이거 외출용으로 10벌, 일상생활 때 편하게 입을 수 있는 버전으로 20벌.”

나는 흥분해서 빠르게 주문했다. 이제 드디어 서민적인 자세를 맘대로 취할 수 있다는 기쁨에 내 안의 서민이 훌라춤을 춰 댔다.

“네, 알겠습니다. 각 의상의 디자인은 어떻게 할까요?”

하지만 흥분도 잠시, 차분하게 이어진 휘르셀의 목소리에 나는 흥분으로 반쯤 드러난 본성을 자각하고 다시 여리고 상냥한 대공비로 돌아갔다.

“음, 에인시아는 수도 제일의 의상실이잖아. 디자인은 모두 새로 맡길게. 나와 어울리게 디자인해 줄 거라고 믿어. 의복은 종류별로 한 벌씩 먼저 완성해서 저택으로 보내 주면 될 것 같아.”

패션의 ‘패’ 자도 모르는 내가 세세한 주문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나는 홍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차분하게 이어 말했다.

“물론 일상복은 엄청 편하게 만들어 줬으면 좋겠어. 외출복도 소매며 상의며 하의며 다 따로 입는 게 아니라 하나로 입을 수 있게 만들어 주면 더 좋고.”

돈이 썩어 넘치는 해수는 기성복 따위 입지 않아요.

나는 슈퍼에서 라면을 한 봉지 사듯 최고급 의상실에서 주문한 의상 전부를 맞춤복으로 주문했다. 덤으로 바로크를 벗어난 요청까지 서슴지 않았다.

왜? 나는 돈이 많으니까.

어차피 바지로 탈바로크를 경험한 거, 2보 더 전진해도 상관없잖아?

“비전하의 요청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휘르셀이 공손히 답했다.

나는 빙긋 웃다가, 마침 떠오른 생각에 카탈로그에 수록된 바지 의상을 가리켰다.

“아, 그리고…… 이거 디자인한 디자이너는 누구야?”

“지세나라고 하는 디자이너입니다.”

“얼굴 한번 보고 싶은데.”

내 요청에, 휘르셀은 알았다는 듯 내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근처에 서 있던 직원에게 지세나를 불러오라고 지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적갈빛 머리카락과 검은 눈동자를 가진 디자이너가 내 앞에 섰다.

“에인시아의 주인이신 대공비 전하를 뵙습니다. 지세나라고 합니다.”

갑자기 높으신 분에게 불려 온 게 두려웠는지, 지세나는 가엾게도 조금씩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나는 지세나가 더 스트레스받기 전에 얼른 본론을 꺼냈다.

“반가워, 지세나. 네 의상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내가 휘르셀을 졸라서 너를 보고 싶다고 했어.”

“……예?”

“나는 네 이 바지 의상이 너무 마음에 들어. 그래서 너한테 작은 선물을 줄까 하는데.”

나는 포카에게서 내 손가방을 받아 그 안에 든 어음을 한 장 꺼냈다.

그 어음에는 평민 기준으로 네 식구가 1년은 풍족하게 쓰고도 어느 정도 남을 만큼의 금액이 적혀 있었다.

“내 이름으로 된 어음이야. 켈타카 은행에 가서 이걸 내밀면 여기에 적힌 금액으로 바꿔 줄 거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