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비전하께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나를 부른 사람은 타한이었다.
우리가 쉽게 눈치챌 수 있도록 일부러 인기척을 크게 내며 다가온 타한은 유독 세이룬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내게 서신만 전달하고는 곧장 자리를 떴다.
나는 흐린 눈으로 멀어져 가는 타한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우리 집사님, 꼭 도망치는 것 같네…….’
왠지 그 이유를 알 것도 같아서, 나는 허허롭게 웃으며 서신의 겉봉을 뜯었다.
“……무슨 서신입니까?”
찻잔을 꽉 움켜쥔 세이룬이 내 손에 들린 서신을 노려보며 물었다.
서신을 대강 훑어 내린 나는 피식 웃으며 세이룬이 볼 수 있도록 그에게로 종이를 넘겨줬다.
“제 사촌 동생이 반년 뒤에 결혼을 한다고 하네요. 셀루리아에서 보내왔어요.”
“사촌 동생이라면…….”
세이룬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그의 손에 들린 찻잔이 파삭 소리를 내며 금이 갔다.
“그자는 감히 당신의 동생일 자격이 없습니다.”
세이룬이 씹어뱉듯 말했다.
그가 내 앞에서 이렇게까지 화를 낸 것은 처음이라 순간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이내 그 분노가 나를 위한 감정이라는 것을 깨닫자 문득 웃음이 나왔다.
“화내는 와중에 죄송한데, 저 지금 기뻐요.”
나는 옆에 자리한 종을 들어 올리며 이어 말했다.
“나를 위해서 이렇게 화를 내 준 사람은 몇 없었거든요.”
기껏해야 신아나 샤샤 정도일까.
나는 계속 실실 웃으며 종을 울렸다. 멀찍이서 대기하고 있던 포카와 레비나가 다가와 세이룬의 찻잔을 바꾸고는 다시 물러났다.
그동안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던 세이룬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고작 이런 걸로 기뻐하지 마세요.”
그리 중얼거린 세이룬은 다시금 주먹을 꽉 쥐었다.
이런, 저러다 찻잔 하나 더 깨겠는데. 나는 걱정되는 마음에 슬쩍 손을 뻗어서 푸르게 핏줄이 돋아난 세이룬의 손을 도닥도닥 두드렸다.
“쉬이, 착하죠? 힘 풀어요.”
“……이곳에는, 에리카를 위해 화를 낼 사람들이 많습니다.”
왠지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세이룬이 말했다. 나를 위로해 주려는 듯한 그의 말에,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잘 알고 있어요.”
“그러니 앞으로는 이런 것으로 기뻐하지 마세요. 너무도 당연해서 기뻐할 이유가 하등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세이룬이 나를 위해서 화를 내 주는 건 왠지 기쁘게 느껴지는걸요?”
나는 빙긋 웃으면서 세이룬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턱을 괴며 싱긋 웃자, 불현듯 귓가를 붉힌 세이룬이 손등으로 입가를 가리며 슬쩍 시선을 피했다.
“……그럼, 저한테만 기뻐해 주세요.”
그가 고개를 숙이며 속삭였다. 흑단빛 고운 머리카락이 어깨 아래로 흘러내려 붉게 물든 뺨을 가렸다.
나는 키득키득 웃으며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알았어요. 앞으로 세이룬한테만 기뻐할게요.”
그가 한결 밝아진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나는 잘 익은 복숭아 빛으로 물든 그의 뺨을 한번 찔러 보고 싶다는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 다시금 입을 열었다.
“아무튼, 동생이 결혼을 한다는데 착하고 여린 언니라면 응당 축하해 주러 가야겠죠?”
“……꼭 그래야 합니까.”
수줍음이 엷게 번져 있던 세이룬의 얼굴이 금세 불퉁해졌다.
나는 피식 웃으면서 삐죽 튀어나온 세이룬의 입술을 검지로 꾹 눌렀다.
“그래서 말인데, 올해가 가기 전에 수도 에이리트로 올라가는 게 어떨까 해요.”
그가 제 입술에 닿은 내 손을 가져가 손등에 입술을 대었다.
나는 심장께가 간질거리는 감각을 애써 무시하며 이어 말했다.
“안 그래도 슬슬 수도로 가서 복수의 밑 작업을 진행해야 했는데, 마침 적격인 명분이 생겼…… 아.”
돌연 그가 이를 세워 내 손등을 물었다. 따끔거리는 감각에 놀란 나는 파드득 그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세이룬이 꽉 잡고 놓아주지 않아서 그럴 수 없었다.
병 주고 약 주듯, 이로 가볍게 문 곳 위에 부드럽게 입술을 갖다 댄 세이룬이 그 상태로 중얼거렸다.
“저는 그자가 싫습니다.”
“…….”
“그러니, 제게 그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도 갖추길 기대하진 마세요.”
그의 새침한 말에 나는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기분이 놀랄 만큼 좋아졌다.
정말이지, 안 귀여운 구석이 없는 사람이었다.
“괜찮아요. 어차피 이젠 셀루리아와 드레인의 사이가 나쁘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나는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한 뒤, 찻잔을 들어 올렸다.
복수는 상대에게 나의 고통을 되갚아 주는 것과 동시에, 내 마음도 공허와 피폐로 붕괴시키는 행위였다. ‘김해수’의 마지막 삶을 복수로 끝낸 내가,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그래서 셀루리아에서 구박받던 시절엔 복수 같은 건 생각하지 않았다. 그딴 걸로 시간을 낭비하기에는, 내 시간과 내 마음이 너무 소중했으니까.
하지만 샤샤가 죽고, 그에 대한 복수를 결심했을 때. 나는 내 마음이 온전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버렸다.
아무리 스스로 괜찮다고 이건 정당한 거라고 세뇌시켜 봤자, 좀먹어 가는 무의식을 회복시킬 수는 없을 테니까.
‘그런데, 정말로 이상하지.’
나는 지금 누군가를 철저히 증오하고 있었다. 증오해 마지않는 그들의 삶을 나락으로 빠트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걸 진행하는 정신이 절대로 멀쩡할 리 없는데. 세이룬이 내 곁에서 내 아군으로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놀랄 만큼 아무렇지 않았다.
“세이룬.”
“네?”
“고마워요.”
그에 대한 고마움이 불쑥 솟아나서 건넨 인사였다.
“아…….”
뜬금없는 감사 인사에, 잠시 뻣뻣하게 굳었던 세이룬이 이내 귓가를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가득한 그 모습이 귀여워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웃으며 세이룬에게서 시선을 돌리던 내 시야에 문득 엉망으로 구겨진 셀루리아의 서신이 들어왔다.
“……반년 뒤라.”
나는 느른하게 눈을 접어 웃었다.
내년은, 정말이지 바쁜 한 해가 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