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레틸기스 즙으로 인해 항시 복종하라 세뇌된 에리카는 주도적으로 행동할 수 없으니 이쪽에 그 사실을 알릴 수 없었고, 이쪽에서 보내는 서신도 대공가가 중간에서 빼돌렸다면 에리카에게서 답장이 오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그토록 폐쇄적이던 대공가가 갑자기 에리카에게 청혼서를 보낸 것이 내심 의아했었는데, 에리카에게 해수의 틀을 씌움으로써 황가와 셀루리아의 반목을 꾀했던 것이군.’
셀루리아 출신인 에리카가 신교에 후원을 하도록 함으로써 셀루리아가 황가의 신임을 잃고, 이후엔 에리카가 해수인 것이 밝혀지면서 황가가 셀루리아를 완전히 저버리도록 말이다.
구교파의 중심 가문 중 하나인 셀루리아를 공격하는 것은, 곧 구교파의 분란을 원한다는 뜻이다.
이는 더 나아가, 구교파의 실질적 수장인 황제의 팔다리를 잘라 놓는 것과 같았다.
반대로 신교파는 구교파와 반목하는 대공가에 모여들겠지.
‘꽤 오랫동안 잠잠하던 대공가가 드디어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하는군.’
이쪽이 본 모습일 터. 델레미아의 붉은 입술이 비죽 올라갔다.
‘어쩐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대공가가 내게 그토록 못마땅하게 굴더니, 적이 될 사람이라 일부러 그런 것이었군.’
자신을 에리카보다 못하게 취급했던 것이 모두 적에게 보내는 선전 포고였다고 생각하자, 델레미아는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절대로 대공가의 뜻대로 흘러가게 두지는 않을 것이야.’
셀루리아가 에리카를 소중히 여기는 줄 알고 수틀리면 그 애를 인질로 잡으려 대공비에 앉힌 모양인데, 틀렸다.
에리카는 그저 셀루리아의 하는 마리오네트일 뿐이니까.
* * *
황제는 생각보다 빨리 알현을 허했다.
알현 허가가 떨어지자마자 곧바로 입궁한 펠리페는 평소처럼 미사여구 가득한 서론을 길게 잡는 대신 곧장 본론을 꺼냈다.
“해수와 드레인 대공가가 동일 세력인 것 같습니다.”
“동일 세력?”
평소와 다른 펠리페의 언행에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황제가 이해가 가지 않는 듯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펠리페는 서둘러 챙겨 온 녹셰의 서신을 황제 쪽으로 내밀었다.
“녹셰에서 받은 정보입니다. 외람되오나, 해수의 정체가 대공비라 하더군요.”
“허나 대공비는 후작의 질녀가 아닌가.”
황제의 의심스러운 눈초리가 펠리페를 향했다.
펠리페는 곧바로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러하긴 하오나, 아이가 워낙 몸이 약하고 성정 또한 여린지라……. 대공가에서 아이에게 겁박을 한다면 아이는 강제로 따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긴, 후작의 질녀가 유독 체력이 약하다는 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바이지. ……대공가에서 셀루리아에 청혼서를 보냈다기에 내심 기쁘면서도 의아했거늘, 그것이 실은 구교파의 중심 가문을 건드리려는 수작이었을 줄이야.”
황제의 미간에 진 주름이 깊어졌다.
잠시 침묵하던 황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찌 되었든, 현 정세로 보았을 때 드레인 대공가에 권력이 몰려 있어. 게다가 대공가는 신교에 후원을 함으로써 황가에 반하려 하고 있지.”
“……면목 없습니다.”
펠리페가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황제는 고개를 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것이 어찌 후작의 죄인가. 대공가의 야심은 본인조차 모르던 것이니 자책하지 말도록.”
“……감사합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대공가를 견제할 방법을 찾는 것이지. 우선 그대는 대공비를 역으로 이쪽의 뜻대로 움직일 수는 없는지 방도를 찾아보게. 믿을 만한 세작도 추려서 넣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그리고, 마침 대공가를 견제하면서도 구교파의 결속을 굳건히 하기에 적격인 방법이 하나 있는데.”
펠리페의 호박색 눈동자와 황제의 푸른 눈동자가 마주쳤다.
황제의 입술이 슬쩍 위로 올라갔다.
“후작의 가문은 구교파의 중심 가문 중 하나이고, 곧 소후작이 될 그대의 여식은 사교계의 별인 베이센 소공작과 돈독한 사이라지.”
“과찬이십니다, 폐하.”
“셀루리아 영애와 황태자의 성혼을 앞당기면 구교파의 결속이 더욱 단단해지지 않겠나.”
펠리페는 입꼬리가 절로 올라가려는 것을 애써 저지하며 더욱 깊이 고개를 숙였다.
“……허나 이미 예법에 맞춘 날 중 가장 가까운 날로 예정했지 않습니까. 이보다 더 앞당긴다면 예법을 어기게 되므로 황태자 전하께 누가 될까 두렵습니다.”
“태자에게 끼치는 예법의 누가 군력과 재력을 모두 끌어 쥔 대공가만 하겠는가.”
“제가 폐하께 실언을 하였습니다.”
황제는 이미 식어 버린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흑차 특유의 달짝지근한 맛이 입 안을 맴돌다 사그라들었다.
“귀족가에서는 간혹 사랑이 극에 달아 병이 생기면 약혼을 건너뛰고 곧장 결혼식을 올린다고 하지.”
“그렇습니다, 폐하.”
“우리 태자는 그대의 여식을 마음에 담은 후로 매일 애가 닳아 시들어 가는데, 그대의 여식은 어떠한가?”
황제의 새파란 시선이 펠리페에게 닿았다. 답이 정해진 질문이었다.
펠리페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정해진 답을 입에 올렸다.
“제 여식도 매시간 황태자 전하를 그리워하여 밤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황제의 입꼬리가 만족스럽게 올라갔다.
* * *
챙그랑, 꽃병이 벽에 부딪혀 깨지는 소리가 고급스러운 방 안을 더없이 선명하게 울렸다.
델레미아와 펠리페는 흘러나오려는 한숨을 삼키며 엉망이 된 몰골로 엉엉 울고 있는 카리에를 내려다보았다.
“카리에, 그만 진정하거라.”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요! 약혼식도 없이 바로 결혼이라니요?”
카리에는 눈물로 흥건히 젖은 뺨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악을 쓰듯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아, 너무 품위 없어요! 이대로는 제 명예는 땅에 떨어질 거라고요. 어머니, 아버지, 전 마음에 안 들어요!”
그녀가 있는 힘껏 소리 질렀다.
약혼식 없이 곧바로 결혼식을 올리는 경우는 보통 넘쳐흐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서둘러 결혼식을 올릴 때나, 두 번째 남편 혹은 부인을 맞아들일 때였다.
에리카의 경우에는 시집가게 된 가문이 워낙 폐쇄적인 것으로 유명한 대공가였던지라 약혼식을 서신 교환으로 생략하는 것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지만, 일국의 황태자비가 되려 하는 카리에의 경우에는 가당치도 않은 소리였다.
“이제 사람들은 저를 감정에 휘둘리는 황태자비라고 생각할 거예요. 사랑에 눈이 멀어 예법조차 무시하는 황태자비라니, 사람들이 얼마나 저를 비웃고 헐뜯겠어요?”
다리에 힘이 빠져서 털썩 주저앉은 카리에가 엉엉 울었다.
안타까운 얼굴로 카리에를 바라보던 펠리페는 제 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그녀의 금빛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카리에, 이건 그리 애통하기만 한 일도 아니란다. 평민들에게도 너와 전하께서 서로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결혼을 도저히 기다릴 수 없어 약혼식을 건너뛰었다고 소문을 냈어. 평민들은 높은 이들의 로맨스를 좋아하니 금방 네게 호감을 가질 거야. 너무 속상해하지 말려무나.”
“버러지들의 호감 따위, 전 필요 없어요!”
발악하듯 외친 카리에가 펠리페의 팔을 쳐냈다.
펠리페는 밀쳐진 제 팔을 한 번 내려다보고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아…… 사교계에서 제가 얼마나 입방아에 오를지 생각하기도 싫어요……. 이게 다 에리카 그 자식 때문이야……!”
카리에의 창백한 뺨으로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델레미아는 카리에가 악을 쓰며 울 동안 잠자코 그녀를 지켜보다가, 펠리페가 물러나자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카리에, 뚝 그쳐라. 이는 황가와 구교파를 위한 길이다. 어찌 명예와 같은 작은 것에 연연해서 구교파의 결속이라는 큰 것을 놓치려 하느냐.”
“하지만, 하지만 어머니―”
“사람들이 너를 감정에 휘둘리는 황태자비라 비웃으면 어떡하느냐고 물었지?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거라. 지금 네 행동 중 무엇이 이성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것이냐?”
델레미아의 엄한 말을 듣는 순간, 카리에의 입이 꾹 다물렸다.
머릿속이 차가워지면서, 영원히 흐를 것 같던 눈물이 거짓말처럼 뚝 그쳤다.
딸이 진정했다는 것을 확인한 델레미아는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카리에, 어느 때라도 일의 경중을 판별하는 안목을 키워야 한단다. 성혼식을 앞당기는 이유에 대해 네게 설명해 주지 않았니.”
“…….”
“물론 사교계에서의 평판은 중요해. 하지만 대공가에게 실질적 권력이 집중되어 있는 지금, 대공가를 견제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더 있더냐.”
“……어머니의 말씀이 옳아요.”
잠시 말없이 바닥을 노려보던 카리에가 입술을 달싹였다.
카리에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에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전전긍긍하며 서 있던 에밀리가 얼른 카리에 곁으로 다가가 그녀를 부축하려 했지만, 카리에는 도움을 뿌리치고 스스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 생각이 짧았어요.”
“…….”
“지금 중요한 건 대공가를 견제하는 거예요. 명예 같은 게 아니라.”
카리에의 하늘빛 눈동자가 다시금 맑은 빛을 되찾았다.
“성혼을 받아들이겠어요.”
카리에의 선언에, 펠리페와 델레미아의 얼굴에서 웃음이 피어올랐다.
델레미아는 카리에에게로 다가가 카리에의 얼굴에 흥건히 남아 있는 눈물 자국을 두 손으로 닦아 주며 말했다.
“잘 생각했다, 카리에.”
* * *
오늘은 볕이 좋아서, 해사원의 야외 테이블에서 세이룬과 함께 티타임을 갖기로 했다.
고아한 하얀 돔 아래 자리한 테이블에서는 주위에 만발한 별수국이 무척 잘 보였다.
사용인들이 찻잔에 차를 따라 줄 때까지 테이블에 턱을 괴고 별수국을 구경하던 나는 사용인들이 물러나자 찻잔을 집어 들며 말했다.
“예전에 어머님과 여기서 처음 티타임을 가졌었어요. 그때는 별수국이 아니라 다른 꽃이 피어 있었는데.”
그때 마셨던 차도 얼음 동동 띄워진 이 흑차가 아니라 적당히 따뜻한 화차였었지.
반쯤 회상에 잠겨서 나도 모르게 슬긋 미소 짓자, 왜인지 뚱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던 세이룬이 불쑥 물었다.
“어머니를 떠올리며 그리 예쁘게 웃으실 만큼, 그렇게 어머니가 좋으십니까?”
“……네?”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경악한 얼굴을 하며 세이룬을 바라봤다.
누가 어떻게 웃어? 강렬한 소름이 온몸을 타고 올라왔다.
세이룬은 내 반응이 재밌었는지 얼굴 가득 어려 있던 뚱한 표정도 풀고는 나직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이야말로 너무나 어여뻐서, 나도 모르게 그를 따라 웃었을 때였다.
“비전하.”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나는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