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황후에게 마지막으로 예를 갖춘 카리에는 황후궁을 나섰다.
황후궁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에밀리와 합류한 카리에는 곧장 저택으로 돌아가지 않고 황궁의 중앙 정원인 리사벨 화원에 들렀다.
황후나 황태자와의 알현을 마치고 난 후 리사벨 화원을 거니는 것은 카리에의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7월의 리사벨 화원은 다채로운 빛깔의 수국이 만개해 있었다.
카리에는 에밀리가 씌워 주는 양산으로 햇빛을 가린 채 수국 사이사이를 거닐며 향기를 즐겼다.
그런 그녀의 발걸음이 멎은 것은, 불현듯 들려온 목소리 때문이었다.
“야, 너 들었어? 이번에 새로 대공비 되신 영애분 있잖아. 그분께서 신교에 정기적으로 후원하고 계신대.”
카리에의 은청안이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향했다.
목소리가 들려온 곳에는 황궁의 하인들이 구석진 나무 그늘에 옹기종기 모여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카리에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에밀리가 한마디 하기 위해 그들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 하자, 카리에는 말없이 손을 들어 에밀리를 막았다.
하인의 말을 들은 다른 하인이 비죽 입꼬리를 올리며 그녀를 비웃었다.
“너 소식 정말 느리구나? 그게 언제 적 나돌던 소문인데. 요즘은 이 소문이 대세지.”
“무슨 소문인데?”
다른 하인들의 호기심 가득한 시선이 하인을 향했다.
그녀는 일부러 시간을 끌며 다른 이들의 애를 태우다가, 모든 이들의 애가 새카매졌을 때야 입을 열었다.
“글쎄 대공비님이, 그 억만장자 해수래.”
“……엉?”
“허. 뭐?”
무슨 소문일지 잔뜩 기대하던 하인들의 얼굴이 급속도로 차게 식었다.
가장 처음 ‘대공비가 신교에 후원을 하더라’는 소문을 꺼냈다가 대차게 비웃음당했던 하인이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외쳤다.
“야, 누가 그런 헛소문을 믿냐? 이번에 대공비 되신 분은 셀루리아 후작가의 영애시잖아. 셀루리아 후작가는 구교파의 중심이라고!”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하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그리고 해수는 무려 셀루리아 후작가 상대로 선전 포고 한 사람이잖아. 셀루리아에 적을 두셨던 영애께서 무슨 억만장자 해수― 꺅!”
자신만만하게 말을 이어가던 하인은 갑자기 불쑥 나타난 귀족가의 귀공녀를 보고 까무러치게 놀랐다.
하인들 전원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카리에에게 허리를 굽혔다.
“여, 여, 영애님을 뵙습……!”
“―방금.”
하인들의 인사를 끊고, 카리에가 입을 열었다.
“방금 한 말…… 다시 해 보거라.”
서릿발처럼 차가운 음성에, 하인들은 서둘러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소, 송구합니다, 영애님! 저희가 실언을……!”
“아니. 벌하지 않을 것이니 그리 떨 것 없다.”
카리에는 애써 표정과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벌하지 않겠다는 말에 하인들이 주춤주춤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들의 경계가 조금 풀린 것을 느낀 카리에가 다시 부드럽게 말했다.
“아까 한 말만 그대로 다시 해 보거라. 요즘 대세라는 소문 말이다.”
모두의 시선이 한 하인에게로 향했다.
하인은 움찔 어깨를 떨며 눈동자를 도록도록 굴리다가 이윽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그…….”
“그래.”
“대공비 전하께서…… 억만장자로 유명한 그 해수…… 시라고…….”
순간, 카리에는 저도 모르게 치맛자락을 힘껏 틀어쥐었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존재의 결합에, 머릿속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신빙성 있는 소문이냐.”
“제, 제 사촌 오라비가 켈타카 은행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 오라비한테서 직접 들은 거예요.”
켈타카 은행은 해수의 주거래 은행으로 알려져 있는 은행이었다.
카리에의 입꼬리가 비딱하게 비틀렸다.
“……알았다. 가 보거라.”
“가, 감사합니다, 영애님!”
가 봐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하인들은 벌떡 일어나 인사를 하고는 부리나케 도망치듯 사라졌다.
멀어지는 하인들을 멍하니 바라보던 카리에가 돌연 픽, 헛웃음을 터뜨렸다.
“……해수였다고? 에리카 그 애가? 어떻게?”
그 애는 우리의 마리오네트잖아.
“아가씨…….”
카리에가 충격받는 것을 우려한 에밀리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카리에를 불렀다.
카리에는 대답 없이 꾹 입술을 깨물고 있다가, 이내 고개를 들고 정면을 응시했다.
“돌아가자, 에밀리.”
“……네, 아가씨.”
카리에는 곧장 화원을 벗어났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눈을 즐겁게 했던 수국은 더 이상 아름답게 보이지 않았다.
* * *
카리에가 저택으로 돌아오자마자 한 것은, 황궁에서 들은 정보가 맞는지 정보 길드 녹셰를 통해 확인하는 것이었다.
“이 서신을 녹셰에게 전해. 만약 이번에도 정보 제공을 거절하면, 셀루리아의 이름을 걸고 후회하게 해 주겠다고 덧붙이고.”
“알겠습니다, 아가씨.”
고개를 숙인 에밀리는 곧장 방을 나섰다. 카리에는 자리에 가만 있지 못하고 일어나서 정신 사납게 방 안을 돌아다녔다.
“만약 맞다면…… 어떻게 에리카 그 자식이 해수일 수가 있지?”
카리에는 저도 모르게 손톱을 물어뜯으며 중얼거렸다.
에리카는 지금껏 줄곧 레틸기스 즙을 먹어 왔다. 레틸기스 즙의 효과는 이미 명징한 바였고, 에리카는 이곳에서 레틸기스 즙이 섞인 물만을 식수로 마셨기 때문에 세뇌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설령 천만 분의 일로 레틸기스 즙이 선천적으로 통하지 않는 체질이라 할지라도, 에리카는 이곳에 있는 동안 줄곧 저택의 골방에만 갇혀 있었다. 그런 애가 어떻게 다른 이들과 거래를 하고 부를 축적할 수 있을까.
“설마…… 그때 그 뱀처럼 에리카를 도와준 변절자가 있는 건가?”
생각만 해도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만약 녹셰에서 정말로 에리카가 해수가 맞다는 답신을 보내온다면, 언제 한번 날을 잡고 사용인들을 물갈이해야겠다고 카리에는 생각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에밀리가 녹셰에서 가져온 답신에는 ‘대공비 에리카 르 드레인은 해수가 맞다’는 대답이 적혀 있었다.
“……당장, 어머니와 아버지를 응접실로 모셔 와.”
“네, 아가씨.”
가까스로 녹셰의 답신을 구기지 않은 카리에는 곧장 응접실로 향했다.
뒤이어 델레미아와 펠리페가 도착하자, 카리에는 늘 챙겼던 다과마저 물리고 곧장 녹셰의 답신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에리카가 해수였어요.”
“……응?”
“뭐?”
다짜고짜 꺼내진 본론에, 펠리페와 델레미아는 얼떨떨한 얼굴로 제 딸을 바라봤다.
“카리에, 혹시 꿈을 꿨느냐?”
“에리카 그 애가 해수라니, 차라리 구교의 교황 성하께서 해수였다는 말이 더 성의 있는 것 같구나.”
“방금 녹셰에서 받아 온 정보예요. 확인해 보세요.”
카리에는 첨언하는 대신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던 서신을 밀었다.
딸의 가라앉은 반응에서 심상치 않음을 느낀 펠리페와 델레미아는 머뭇거리다가 서신을 집어 들었다.
서신을 읽은 그들은 글 밑에 찍혀 있는 녹셰의 새 모양 인장을 확인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황제 폐하와 속히 의논을 해야 할 것 같구나.”
먼저 사리 판단을 내린 델레미아가 입을 열었다.
그 말에 펠리페도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 가문은 제국에서 제일의 군권을 지닌 가문이고, 해수는 금전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자다. 군권과 금전이 결합하였으니 이는 필시 문제가 될 만한 사항이야.”
펠리페는 곧장 보좌관을 불러 황궁에 최대한 빨리 뵙고자 한다는 전갈을 넣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카리에는 찌르르 두통이 오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물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레틸기스 즙을 먹고 골방에만 갇혀 있던 에리카가 어떻게 해수일 수 있는지 이상하지도 않으세요?”
“카리에, 지금 중요한 것은 에리카가 어떻게 해수일 수 있는지가 아니라 에리카가 해수인 것 그 자체란다. 에리카가 어떻게 해수인지는 나중에 알아봐도 늦지 않아.”
“하지만 어머니, 문제가 생겼으면 그 원인을 고쳐야 새로운 문제가 생기지 않잖아요. 혹시라도 저택의 누군가가 에리카 그 천한 걸 도와줬다면요? 그러면 우리 저택 내에 변절자가 있다는 얘기인데 어떻게 그걸 가만히 두고 볼 수만 있겠어요?”
카리에가 볼멘 목소리로 항변했다.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펠리페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 후계자가 가문에 대한 걱정이 많구나. 우리 가문의 사용인들은 모두 안전한 사람으로 선발했기도 하고 에리카는 그 당시의 해수가 아니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는 없단다. 이에 대해서는 황제 폐하와 알현하고 나서 더 자세히 알려 주도록 하겠다.”
“…….”
“하나 정 네가 걱정스럽다면, 네게 인사권을 줄 테니 원하는 대로 사용인들을 교체하도록 하거라.”
“……네? 저한테 인사권이라니요?”
“이제 너도 내년이면 소후작의 지위를 받지 않느냐. 이런 일을 해 보는 것도 경험이 될 것이다.”
펠리페의 말에 카리에가 활짝 웃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반드시 지금과 같은 일은 없게 하겠어요.”
카리에의 다짐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펠리페와 델레미아는 이내 각자의 생각에 빠져들었다.
델레미아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기댄 채 테이블을 손톱으로 톡톡 두드렸다.
셀루리아에서는 사용인을 뽑을 때 특이한 조건을 붙인다. 혈연이 없는 고아거나 죽어서 혼자가 된 사람일 것. 언제 사라져도 전혀 티 나지 않도록.
더불어, 셀루리아는 다른 이의 수상한 짓을 보고하면 포상을 주는 체제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사용인들은 포상을 받기 위해 서로를 눈에 불을 켜고 감시했다.
셀루리아 가문의 사용인들이 유독 목숨으로 한 협박이 잘 통하는 것은 이 때문이었다.
명령을 어겨서 고발되면, 셀루리아는 자신을 죽이는 데 거리낌이 없을 테니까.
‘그러니, 하인이 에리카를 도와줬을 리는 거의 없어.’
그럼에도 펠리페가 카리에에게 인사권을 줘서 사용인의 교체를 허락한 이유는 사용인들의 기강을 더 확실히 잡아 두기 위해서였다.
앞으로 있을 폭풍을 대비하려면, 아무래도 기강을 잡아 두는 편이 더 좋을 테니까.
‘그나저나, 그동안 보낸 서신에 에리카가 아무런 답장도 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 있었군.’
델레미아는 테이블을 두드리던 손을 멈추고 팔짱을 꼈다.
대공비가 되기 전의 에리카는 절대로 해수가 아니었다.
저택 내에 에리카를 도와줄 간 큰 이도 없을 뿐만 아니라, 혹여 기적이 일어나 에리카가 저택을 빠져나갔다 해도 금융이나 경제에 관한 수업은 일체 들은 적 없는 어린애가 단순히 운으로 그토록 막대한 재산을 쌓았을 가능성은 한없이 무에 수렴했다.
즉, 에리카는 대공비가 된 후에 해수가 ‘되었다’는 소리였다.
‘다시 말해, 본래 해수라는 허상의 틀을 가지고 있던 대공가가 에리카에게 그 틀을 씌웠다는 뜻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