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들어오세요.”
나는 서류 막바지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대수롭지 않게 허락했다. 어차피 들어올 사람은 한정적이었으니까.
서류 끝자락에 인장을 찍은 후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마주한 사람은, 정말 말 그대로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정말로 루비를 실로 뽑아다가 모아 놓은 것 같은 적빛 머리카락, 그 아래 자리한 불꽃을 닮은 선홍빛 눈동자.
아름다운 남자였다.
“안녕하세요, 제수씨!”
나와 눈이 마주친 남자가 선홍빛 눈동자를 활짝 휘며 인사했다.
남자가 나를 지칭한 생소한 단어에 나는 슬쩍 미간을 좁혔다.
“……제수씨?”
그러고 보니, 세이룬에게서 그 또래의 친인척이나 친구가 있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런데 누구시죠?”
“하하, 진짜로 세이룬 이 자식이 제수씨한테 아무 말도 안 했나 봐요. 저 세이룬의 고향 친구예요. 편하게 체사라 불러 주세요.”
“고향 친구라고요? 혹시 동방의 려 제국 사람?”
세이룬의 친구라니.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남자, 체사를 바라봤다.
신기한 것과는 별개로 경계심을 놓지 않고 설렁줄 가까이로 손을 가져가자, 체사는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맞아요, 제수씨. 아, 제 정체가 의심된다면 설렁줄 잡아당겨도 돼요.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세이룬이 저한테 제수씨를 소개해 주지 않아서 제가 직접 찾아온 거예요.”
“아 그렇군요. 일단 설렁줄은 사양 않고 잡아당길게요.”
나는 말과 동시에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고 포카와 레비나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체사 님……?”
들어오자마자 내게 인사하려던 포카와 레비나는 집무실 안에 있는 체사를 보자마자 동공을 흔들었다.
“체사 님께서 왜 여기에……?”
“대공 전하께서는 분명 곧장 돌아가시라고…….”
“보셨죠, 제수씨? 세이룬 그 녀석이 하나 있는 죽마고우한테 제수씨도 소개 안 해 주고 그냥 쫓아내려 한다니까요.”
체사가 불쌍한 강아지처럼 눈썹을 내려뜨리며 푹 고개를 숙였다.
그 인위적인 모습에,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팔짱을 낀 채 그를 쳐다봤다.
“혹시 체사 씨가 세이룬한테 잘못한 거 있는 건 아니고요? 우리 순진하고 귀여운 세이룬은 아무한테나 몰염치하지 않거든요.”
“……순진하고……, ……귀여운……?”
체사가 떫은 감을 씹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진심이냐고 물어보는 듯한 눈빛에 나는 어찌 이보다 더 진심일 수 있겠냐는 듯 미간을 좁혔다.
“그 이상한 표정은 대체 뭔가요.”
“……아뇨, 저희 지금 같은 사람 얘기를 하고 있는 건가 싶어서요.”
왠지 허탈한 목소리로 체사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가 지나온 인생에 대한 회의감에 젖은 얼굴을 하고 있을 동안, 나는 옆에 서 있던 포카와 레비나에게 차를 부탁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님을 이렇게 세워 둘 수는 없으니, 응접실로 자리를 옮길까요?”
내 말에, 회의감 따위는 어딘가로 감쪽같이 치워 버린 체사가 불꽃을 닮은 눈동자를 반짝반짝 빛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역시 제수씨는 누구와는 달리 손님을 대접하는 기본부터가 남다르시네요. 집무실에서 간단하게 휘리릭 치워 버리는 게 아니라 무려 응접실로 직접 데려가 주시다니, 완전 감동이에요!”
“우리 세이룬 돌려 까지 마세요.”
나는 응접실 문을 열다 말고 눈에 쌍심지를 켠 채 체사를 노려보았다.
친구라는 사람이 친구 험담을 아주 밥 먹듯이 하고 있어.
체사가 알았다고, 세이룬을 욕하지 않겠다고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인 후에야, 나는 찌푸렸던 얼굴을 펴고 응접실 문을 열었다.
“참, 편의상 제수씨라고 불러도 괜찮죠? 물론 세이룬은 형수님이라 부르라고 했지만요.”
응접실 의자에 마주 앉자마자 체사가 물어왔다.
‘체사 씨가 나를 제수씨라고 부르니까 세이룬이 형수님이라고 부르라 했다고?’
형수니 제수니 하며 기 싸움을 하다니, 역시 미자라는 건가.
역시 세이룬은 귀엽다며 흐뭇하게 웃고 있던 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얼굴을 굳혔다.
“체사 씨, 세이룬 친구라고 하셨잖아요.”
“네, 그렇죠.”
“그런데 려 제국에서는 칠 세 이상 성인 이하 남녀는 얼굴을 마주 보면 안 된다는 전통이 있는 걸로 알고 있거든요. 이렇게 마주 봐도 되는 건가요?”
나는 나름 심각하게 물은 거였는데, 내 질문을 들은 체사는 재밌는 말을 들었다는 것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제가 비전하를 제수씨라고 부르는 건 괜히 그런 게 아니에요. 저는 세이룬보다 형이라서 이미 성년이거든요.”
“아, 그런가요?”
하긴, 친구라고 반드시 같은 나이라는 보장은 없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하게 웃었다.
형보다 위에 서고 싶어서 체사에게 나를 형수님이라 부르도록 강요하는 세이룬이라니, 귀여워 죽을 것 같다.
내 웃음을 보고 떨떠름한 표정을 지은 체사가 입을 열었다.
“지금 세이룬이 귀엽다고 생각하고 계시죠?”
“네, 맞아요. 하긴, 너무 당연한 걸 몇 번이나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저는 저희가 같은 인물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게 맞는지 모르겠네요.”
체사는 흐린 눈으로 중얼거리다가, 이내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제수씨는 제 깜짝 선물 어떠셨어요?”
“그 깜짝 선물이라는 것이 지금과 같은 깜짝 방문이라면,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나는 진중하게 답했다.
정말로 진지하게 생각해서 한 대답이었는데, 내 대답 어디가 웃겼는지 체사가 다시금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아니, 그걸 물어본 건 아니었어요. 제수씨의 성격에 갑자기 이렇게 초면의 상대가 불쑥 나타나면 별로 반기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고요.”
“……그걸, 알면서…….”
대체 우리 귀요미 세이룬은 이런 예의 밥 말아 먹은 사람이 어디가 좋다고 어렸을 때부터 놀아 준 걸까.
내가 질린 시선을 보내자, 당황한 체사가 재빨리 두 손을 내저었다.
“물론 저는 연락 후에 약속 잡고 만나 뵙고 싶었어요! 지금 이 돌발 만남은 제 의지가 아니었다는 점, 부디 기억해 주세요.”
“아, 네…….”
기억해 봤자 당신에 대한 내 평판이 달라지는 건 없겠지만요.
나는 눈을 흐리게 뜨며 마침 들어오는 트롤리를 바라봤다.
아, 다과로 가져온 과자 중에 내가 좋아하는 앵두과편이 있어서 스트레스가 조금 가신다.
포카와 레비나는 테이블 위에 다과를 세팅한 뒤, 다시 응접실 밖으로 나갔다.
나는 달달한 모과차를 한 모금 마시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체사 씨가 저한테 준 깜짝 선물이란 게 뭐죠?”
“D등급이요.”
“……네?”
대수롭지 않게 찻잔을 기울이려던 손이 삐끗했다.
내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쳐다보자, 체사는 내 반응이 즐겁다는 듯이 눈을 휘어 웃었다.
그가 손을 뻗어 금귤정과를 하나 가져가며 이어 말했다.
“해수에 관한 정보 요청이 들어왔을 때 모조리 D등급 이하 정보만 주고 돌려보냈었는데.”
“…….”
“그 주역이 바로 저랍니다?”
체사가 해맑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 자신을 가리켰다.
나는 잠시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미간을 좁혔다.
“혹시 녹셰의 마스터세요?”
“네!”
체사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찾아온 인지 부조화를 견디지 못하고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러니까…… 그쪽이 녹셰의 마스터라고요?”
“네, 맞아요!”
체사가 다시 한번 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나는 끙 소리를 내며 다시 관자놀이를 눌렀다. 두통약이 이렇게 간절했던 적은 몇 번 없던 것 같은데.
‘아무도 날 속인 적이 없는데, 속은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왜지.’
아무래도 나는 정보 길드 마스터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던 모양이었다.
정보 길드의 마스터라고 전부 침착하고, 차분하고, 과묵하지는 않을 텐데 말이다.
‘역시 사람은 겉모습으로 그 속까지 판단하면 안 돼.’
저렇게 엄청 입이 가벼울 것 같은 사람이 무려 정보 길드의 마스터이시라잖냐.
“아, 네……. 그럼 체사 씨는 제 과거에 대한 건 다 알고 계시겠네요.”
나는 ‘체사’와 ‘녹셰 마스터’를 연결하려 애쓰며 말했다.
“그럼요, 모르는 게 없는걸요.”
체사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심드렁한 얼굴로 별생각 없이 왼쪽 손등을 내밀었다.
“그럼 이 손등 위에 있는 게 뭔지도 알려 줄 수 있어요?”
“손등 위에요?”
따라 물으며 내 손등으로 시선을 내리던 체사의 표정이 한순간 변했다.
차분하게 내리깐 선홍빛 눈으로 내 손등 위를 가만히 응시하던 그가 이윽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보랏빛을 가진 장미 문양이라……. 선대공 전하께서는 정말 제수씨를 좋아하시는 모양이네요.”
“……네?”
나는 미간을 좁혔다. 저번에 포카와 레비나에게서 들었던 말과 비슷한 것 같은데.
내 표정을 본 체사가 가볍게 웃으며 내 손등 위로 손을 가져갔다.
“잠시 실례.”
그 말이 끝나고 체사의 손끝이 내 손등에 닿는 순간, 무언가 따뜻한 기운이 맞닿은 손끝으로 흘러들어 왔다.
그리고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이게…… 내 손등 위에 줄곧 그려져 있던 거라고요?”
나는 왼쪽 손등 위에 피어난 보라색 장미 모양을 멍하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보라색으로 빛나는 조그만 장미 문양은, 그 결을 따라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체사는 “맞아요” 하고 가볍게 대답한 뒤에, 이 문양에 대해 이어 설명해 줬다.
세뤼아가 내게 남긴 이 문양은, 이 사람은 곧 자신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리는 표식이라 했다.
이 사람의 적은 자신의 적이며, 이 사람이 지은 죄는 같이 사죄하며 용서를 구하리라는.
이 사람의 모든 굴레를 함께 견디겠다는, 절대적인 아군의 표식.
그것이 세뤼아가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 했다.
“…….”
나는 순간 목이 메서 아무 말도 못 한 채 입술만 꾹 깨물었다. 이런 어마어마한 선물을 받았을 줄은, 정말이지 꿈에도 몰랐다.
친부모에게조차 받아 보지 못했던 절대적인 버팀목을 받았을 줄은.
정말, 꿈에도.
‘……그런데 세뤼아는, 대체 언제 봤다고 나를 이렇게까지 신경 써 주는 걸까?’
그녀에게 나는 그저, 만난 지 1년쯤 되어 가는 며느리일 뿐일 텐데.
그런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체사가 문득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비밀을 공유하듯 작게 고개를 숙인 그가 속삭이듯 말했다.
“저는 뭐든지 알고 있어요. 제수씨한테는 특별히 비밀 유지용 요금이나 정보 이용료 같은 건 받지 않을 테니, 혹시 궁금하거나 필요한 요청 사항이 있으면 뭐든지 말씀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