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세이룬이 먼저 입을 열어 말했다.
다른 누가 들으면 당장 반역죄로 끌려가서 구족이 삭제당할 만한 발언이, 마치 너 좋아하는 연어회를 사 주겠다는 것처럼 담담하게 흘러나왔다.
‘……그래도 나름 강대국인데 너무 쉽게 지도에서 나라 이름을 지워 버리겠다고 하는 것 아닌가요.’
좋다고 대답한다면, 바로 내일 아침에 이렌텔 제국이 다른 이름으로 바뀌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착각만이 아닐 것이다.
“황제의 자리를 원하신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고귀한 그대의 머리 위에 황제의 관을 얹어 드리겠습니다.”
“……저기요.”
나는 흐린 눈을 뜨고 한껏 신이 나서 말하고 있는 세이룬을 바라봤다.
‘세이룬, 지금 하고 있는 말 그거 전부 김칫국이거든요…….’
정작 복수할 사람은 황가를 교체하거나 황제가 되고 싶은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는데, 말하는 사람은 이미 개국 공신 명단까지 좌르륵 짜 놓고 있다.
이래서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 한다는 격언이 있는 거다.
“세이룬, 저는 황가를 교체할 생각이 없어요.”
“……네?”
“물론 제가 황제가 되고 싶은 마음은 그것보다도 더 없고요.”
꼭 그게 아니더라도 깔끔하게 복수를 마칠 방법이 있는데 굳이 불필요한 일을 늘릴 필요는 없지 않은가.
‘대공비인 지금만 해도 하루에 몇십 장씩 쏟아지는 저놈의 서류 따위 창밖으로 던져 버리고 싶은데, 황제라니?’
스스로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멍청이도 있나.
나는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뒤, 진지한 얼굴로 세이룬을 마주 보았다.
“세이룬, 혹시 사피엔 르 이렌텔 황자를 알아요?”
“……그자와 손을 잡을 생각이십니까.”
내 질문 한 방에 바로 내 의도를 알아차린 세이룬이 불만스러운 듯 입술을 삐죽거렸다.
앵두처럼 귀여운 입술이 심통이 났다는 것을 알아달라는 듯 톡 하고 튀어나왔다. 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심장이.”
“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보다 바로 알아차리셨네요. 맞아요. 전 사피엔 황자와 손을 잡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그 뒤로 나는 사피엔과 손을 잡으면 얻게 될 이득에 대해 구구절절하게 설명했다.
현 황제와 황태자를 끌어내리고 사피엔을 황제로 세운다는, 더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사피엔더러 대신 똥 싸게 하고 치우게 한다는 나의 야심 찬 설명에도 세이룬의 불만스러운 표정은 풀릴 줄 몰랐다.
“결국 에리카에게는 사피엔 황자가 필요하다는 것 아닙니까.”
“음, 그렇죠?”
“저는 싫습니다.”
세이룬이 볼멘소리로 딱 잘라 말했다.
“혈통 말고는 내세울 것 없는 그런 자보다는 제가 여러모로 훨씬 더 쓸모 있지 않습니까.”
“…….”
“에리카의 복수가 성공할 수 있도록 제 모든 것을 바쳐 돕겠습니다. 그러니 그자와의 협력은 재고해 주세요.”
“…….”
“에리카?”
의아한 어조로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나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
- 쟤, 빚, 싫어……
- 쓸모, 내가 더 많아
방금 전 세이룬의 말이 언젠가 샤샤에게서 들었던 말과 비슷해서…… 나도 모르게 그를 멍하니 쳐다본 모양이었다.
“에리카, 괜찮으십니까?”
어디 아픈 건 아닌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꼼꼼히 살피며 그가 물었다.
왠지 여기 와서 괜찮냐는 소리만 주야장천 듣는 것 같네. 나는 뻘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나 완전 멀쩡하니까 걱정하지 마요.”
일단 걱정하는 세이룬을 안심시킨 나는 곧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세이룬은 복수가 끝나면 나와 알콩달콩 놀아야죠. 당신이 유능한 건 당연히 알지만, 그렇다고 나랏일 같은 고강도 공무에 당신을 뺏기고 싶지는 않거든요.”
나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귀여워서 미칠 것 같은 초절정 꽃미남이 내 남편인데, 일 따위에게 밀려나서 주말 부부 하고 싶지는 않단 말이다!
“……그런가요.”
내 말을 들은 세이룬이 발그레하게 볼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에리카의 말을 듣고 보니, 사피엔 황자와 손을 잡는 것이 더 이득일 것 같습니다.”
세이룬이 수줍게 말했다.
참으로 속 보이는 태세 전환에 나는 다시금 아파 오는 심장을 느끼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뭔데 사람이 이렇게 귀엽게 쉬울 수 있는 거지…….
* * *
드레인 대공령으로 향하는 트란셋 상인단은 무척이나 조용했다.
이들은 식사나 취침, 휴식과 같은 꼭 필요한 소통이 아니면 입을 열지 않았으며, 그마저도 길게 끄는 일이 없었다.
대공령으로 향하는 동안 하루 종일 듣는 소리라고는 말발굽 소리와 마차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뿐이었지만, 빈센트는 사람들이 쓸데없이 말을 붙이는 것보다 차라리 계속되는 말발굽 소리를 듣고 있는 게 더 좋았다.
은행장을 통한 에리카의 주선으로 합류하게 된 트란셋 상인단은 대공령에 식료품을 납품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에리카는 거금을 들여서 빈센트를 임시 상인단 소속으로 만들었고, 상인단 주변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특급 용병단이 그를 호위하고 있었다.
대공령으로 향하는 하루하루는 참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가끔 마을 여관에 머물게 되면, 고귀하신 대공비께서 우리 같은 천것들을 위해 신교에 후원하고 계신다며 사람들이 종종 에리카를 칭송하고 있는 걸 듣게 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빈센트는 마치 제가 그런 소리를 들은 것처럼 뿌듯해졌다.
느릿느릿하고 평화로운 여정에 갑작스러운 일행이 추가된 것은, 대공령에 거의 다 와 갈 때쯤이었다.
“안녕하세요!”
일행으로 합류하게 된 남자는 하나로 높이 올려 묶은 붉은 머리카락에 선홍색 눈동자를 가진 미려한 사람이었다.
이런 외진 곳에서 그 정도의 미인을 보는 것은 처음이라, 빈센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남자를 바라봤다.
활달한 성격의 남자는 발랄하게 웃으며 상인들과 한 명씩 인사를 나눈 뒤 공간을 한 번 둘러보다가 빈센트와 눈이 마주쳤다.
그대로 곧장 빈센트에게 다가온 남자가 쾌활하게 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옆에 앉아도 될까요?”
“……마음대로 하십시오.”
빈센트의 예의상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남자는 빈센트의 바로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갑자기 예상치 못한 낯선 사람이 불쑥 지척으로 다가온 까닭에 빈센트는 저도 모르게 긴장해서 몸을 빳빳하게 굳혔다.
빈센트가 긴장한 것을 본 남자는 긴장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듯 부드럽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당신도 저처럼 붉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잖아요. 제 주변에는 홍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괜히 반가운 마음에 말을 걸었어요.”
“……네.”
“저는 체사라고 해요. 그쪽은 이름이 뭔가요?”
“저는 빈센트…… 라고 합니다.”
빈센트는 성을 제외하고 이름만 입에 담았다.
상대와는 초면일 뿐 아니라 어차피 대공령에 도착하면 다신 만날 일 없는 사이인데, 굳이 본인이 귀족이라는 사실을 언급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빈센트의 대답에 묘한 웃음을 지은 체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빈센트, 좋은 이름이네요.”
“……그렇습니까.”
빈센트는 생경한 기분으로 중얼거렸다.
빈센트란 이름은 비교적 흔한 이름이라, 그가 이름에 관한 칭찬을 들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 뒤로 체사는 경직된 분위기를 풀어 주는 가벼운 잡담을 이어 나갔다.
적당히 얕은 대화가 오가자 뻣뻣하고 어색했던 공기도 한층 부드럽게 풀어졌다.
“그런데, 빈센트는 무슨 일로 대공령에 가는 거예요?”
대화 도중, 체사가 물었다.
빈센트는 잠시 생각하다가 낯선 이에게 답하기 무난한 대답을 꺼냈다.
“만나야 하는 분이 그곳에 계십니다.”
“와, 그분을 만나러 이렇게 외진 대공령까지 직접 가시는 거 보면 소중한 분이신가 봐요?”
빈센트는 곧이곧대로 그렇다고 대답하는 대신 화제를 돌렸다.
“그러는 당신은 왜 대공령에 가십니까?”
“아, 저는 양심 없는 제 친구를 보러 가는 길이에요.”
체사는 붉은 눈을 곱게 휘며 대답했다.
“이래 봬도 제가 도와준 게 꽤 많은데, 고맙다는 인사는커녕 연락 한번 없는 배은망덕한 놈이거든요.”
그렇게 덧붙인 그는 나직이 소리 내 웃었다.
말의 내용만 들으면 그 친구에게 복수라도 하러 가는 건가 싶다가도, 천진난만한 말투나 얼굴 가득 생글거리는 해맑은 웃음을 보면 그저 오랜 절친을 만나러 가는 길이라 즐거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습니까.”
하지만 빈센트는 눈앞의 모순에 대해 의아함을 내비치지 않고 그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곧 헤어질 사람인데, 이 이상으로 깊게 연관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 * *
하지만 빈센트의 결심은 대공령에 도착한 지 하루도 되지 않아서 무용지물이 되었다.
“……당신도 대공성에 볼일이 있습니까?”
집사 타한의 안내를 받으며 대공성의 대응접실로 향하던 빈센트는 응접실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듯 서 있는 체사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검문소를 통과한 뒤에는 트란셋 상인단과 헤어져서 에리카가 준비한 마차를 타고 대공성까지 이동했던 빈센트로서는 상인단과 헤어질 때 같이 헤어졌던 체사를 응접실 앞에서 보게 되었으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빈센트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체사는 해맑게 웃으며 빈센트의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이렇게 다시 보니 정말 반갑고 좋네요! 저번에도 말씀드렸다시피, 당신 같은 붉은 눈동자는 제 주변에 많이 없어서 속상한 참이었거든요.”
“……체사 님, 이렇게 연락도 없이 불쑥 방문하시면 곤란합니다.”
빈센트의 옆에 있던 타한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체사는 불퉁한 얼굴로 팔짱을 꼈다.
“연락했어도 맛있게 씹어 삼켰을 거잖아.”
“그건 전하께서 그리 명령을 내리셨기에.”
“봤죠, 빈센트? 그렇게 도움을 퍼다 줬더니 이런 푸대접이나 하고. 이 친구가 이렇게 배은망덕하다니까요.”
혀를 쯧쯧거리며 고개를 내저은 체사는 이내 생글생글 웃으며 빈센트의 옆에 딱 달라붙었다.
“그러니 배은망덕한 친구의 잘난 면상 좀 볼 수 있게 빈센트가 저를 도와줘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