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아무리 세이룬이 눈가리개를 착용하고 있다고 해도, 저건 모를 수가 없었다.
그렇게 늦봄의 어느 날, 대공성에는 갑자기 북풍한설이 몰아쳤고 라인과 기사들은 추위와 살기에 오들오들 떨며 상사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세계가 멸망할 때까지 이 자세 그대로 달라지지 않을 것 같아서, 나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내 손등을 들어 올려서 라인의 입술에 닿게 했다.
솔직히, 세이룬이 끼워 준 장갑이 꽤 두꺼운 것이었기 때문에 라인의 입술이 닿은 손등에는 입술의 촉감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입술이 손등에 맞닿는 순간 세이룬 주위를 몰아치던 한기는 절정에 달했고, 나는 서둘러 내가 들고 있던 라인의 검을 그녀에게 넘겨주었다.
사, 상사의 분노를 피해서 어서 도망가세요!
“……참으로,”
내게 예법대로 절한 후 재빨리 물러가는 라인을 노려보던 세이룬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많은 이들이 닿을 수 있는 공공재로군요, 부인님의 손은.”
“…….”
“그 손이 저만을 위한 손이길 바라는 제 욕심이 과한 걸까요.”
세이룬이 씹어뱉듯 중얼거리며 라인의 입술이 닿았던 내 손등 부분의 장갑 표면을 거칠게 박박 문질렀다.
마치 피부의 때를 벗겨 내서 라인과 닿았던 피부의 표피를 제거하려고 하듯이.
나는 흐린 눈으로 세이룬이 하는 양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세이룬, 장갑은 때가 없어요.”
“네?”
“그렇게 박박 문질러 봤자 불쌍한 장갑만 수명을 다할 뿐이에요.”
“…….”
내 말에, 불현듯 세이룬의 움직임이 멈췄다.
잠시 그렇게 입술을 꾹 깨물며 내 손을 바라보던 세이룬은 이내 풀 죽은 듯이 고개를 숙이며 조그맣게 속삭였다.
“……저도 몰랐습니다.”
“…….”
“제가 서약식의 일부분조차 받아들이지 못할 만큼 질투가 심하다는 걸, 저도 몰랐어요. 장갑만 있으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서럽게 중얼거린 세이룬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그냥 단순히 장갑을 문지르는 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행동이라는 걸 말하고 싶었던 나로서는 갑작스러운 세이룬의 자책이 당황스러워서 어쩔 줄 몰랐다.
“저, 세이룬? 괜찮아요. 세이룬을 탓하는 게 아니에요.”
“질투가 심한 연인은 쉽게 질려서 금방 버림받는다고 들었습니다. 에리카, 제가 더 잘하겠습니다. 그러니 절 버리지 말아 주세요…….”
세이룬이 내 소맷자락을 소심하게 붙들며 애원하듯 말했다.
정말로 서러운지 눈가리개 끝자락이 살짝 젖어 들었다. 그걸 확인한 나는 기겁하며 세이룬의 눈가를 닦아 줬다.
“세이룬, 내가 세이룬한테 질리는 일 같은 건 일어날 리 없어요. 특히나 세이룬을 버리는 일 따위는 더더욱, 결단코!”
“……정말입니까?”
“그럼요! 아니, 이렇게 귀엽고 예쁜 사람이 대체 왜 그런 쓸데없는 걱정을 해요?”
오히려 세이룬이 나를 질려 하면 질려 했지, 이 얼굴이면 평생을 물고 빨아도 전혀 안 질릴 것 같은데.
거기다가 질리면 버릴 거라니, 대체 나를 얼마나 쓰레기로 보고 있으면 그런 걱정을 하고 있는 거야.
나는 진심으로 어이가 없는 얼굴로 세이룬을 바라봤다.
세이룬은 진위를 확인하듯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보다가, 내가 진정으로 진심임을 확인했는지 한층 풀어진 얼굴로 배시시 웃었다.
“감사합니다.”
“당연한 말을 한 걸 가지고 감사 인사를 들으니 기분이 이상하네요…….”
이혼 사유란에 ‘남편이 질려서’라고 적어서 내면…… 이게 대체 무슨 희대의 쓰레기지.
난 그냥 쓰레기가 아니었을 뿐인데 감사 인사를 받다니. 나는 흐린 눈으로 정면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가, 아예 눈을 차게 식혀 버렸다.
‘저기요, 당신들은 왜 무릎을 꿇고 귀를 막은 채 땅을 바라보고 있는 건가요.’
마치 상전의 애정 행각을 마주한 아랫것들처럼 말이다.
아니 대체 우리가 무슨 말을 했다고 못 볼 걸 봤다는 듯이 그러고 있냐고.
공장에서 찍어 내기라도 한 듯 수많은 기사 전원이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똑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으니, 왠지 모를 기괴함 같은 것이 느껴져서 문득 소름이 돋았다.
나는 양팔을 슥슥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서약식, 어서 마저 진행하도록 하죠.”
빨리 해치우고 방에 들어가서 달달한 까까나 먹고 싶다.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세이룬이 다소 불퉁한 얼굴로 내 곁에서 한 걸음 물러섰다.
그제야 나는 원래 내게서 한 걸음 정도 거리를 둔 채 서 있던 세이룬이 방금까지 내 바로 지척에 서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언제 이만큼 와 있던 거지…….’
역시 검을 쓰는 사람은 운동 신경이 다르긴 한가 보다.
실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서약식은 처음보다 훨씬 경직된 공기 속에서 이어 진행되었다.
나는 계속 내 장갑 위에 맹세의 키스를 하는 기사들을 노려보는 세이룬으로부터 선량하고 가엾은 기사들을 지키기 위해 최대한 빨리 서약식을 진행했다.
미안해요, 기사 여러분. 이렇게 눈칫밥 먹이고 싶지는 않았는데, 세이룬이 자기가 이렇게 질투가 많은 줄 몰랐다며 속상해서 울려고 하잖아요.
우리가 좀 봐줘야지 어쩌겠어요. 그렇죠?
* * *
말은 없었지만 탈은 많았던 서약식이 끝났다.
나는 서약식이 끝난 다음, 세이룬을 데리고 도망치듯 연무장을 떴다.
양심이 있다면 누구든지 부하 직원을 노려보는 상사와 부하 직원을 같이 두려고는 하지 않을 게 아닌가.
“……리카? 에리카?”
정신없이 세이룬의 손을 붙잡고 걸어가던 나는 뒤에서 세이룬이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아…… 내 정신 좀 봐. 갑자기 끌고 와서 놀랐죠.”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봤더니 해사원 안이었다.
이왕 해사원에 온 거, 마침 할 말도 있고 하니 이대로 정자에 가는 게 낫겠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혹시라도 세이룬이 불편할까 봐 잡았던 손을 놓으려고 했다.
“세이룬, 저 당신에게 할 말이―…”
하지만 내가 손을 놓기도 전에 세이룬이 손을 더 꽉 붙잡아 오는 바람에 순간적으로 할 말을 까먹고 말았다.
내 손을 붙잡는 데 그치지 않고 아예 깍지까지 낀 세이룬이 의아한 목소리로 나를 다시 불렀다.
“에리카?”
“……아, 네……. 음, 당신한테 긴히 할 말이 있거든요. 그래서 같이 정자에 가면 어떨까…… 하고요.”
의식이 자꾸 손가락 마디마디가 맞닿은 손으로 향해서, 나는 말에 온전히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온기가 손가락 사이의 여린 살갗을 통해 지속적으로 침투하는 감각은, 상당히 아찔하면서도 간질간질하고 어딘지 모르게 끙끙거리도록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그런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이룬은 아예 한술 더 떠서 깍지 낀 손을 들어 올린 뒤 도장을 찍듯 내 손등에 입술을 꾹 눌렀다.
“……저기, 혹시 이거 자각 없이 이러는 거예요?”
“네?”
내 손등에서 입술을 뗀 세이룬이 이번에는 그 손등에 뺨을 가져다 대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의아함이 가득한 순진무구한 얼굴에, 문득 머릿속으로 첫날밤 때 꽤나 진지한 얼굴로 나를 좋아한다 고백하던 세이룬의 모습이 떠올랐다.
해사원의 정자에서 나와 이혼하기 싫다고 눈물을 뚝뚝 흘리던 그의 모습도 떠올랐고, 자신한테 질리지 않게 하려고 나를 유혹하려 했다던 그의 모습도 떠올랐다.
혹시…… 그 모든 게 계산하거나 꾸며 낸 거 하나 없는 행동이었다면?
“세이룬, 이거 상당히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개수작이긴 한데요……. 혹시 우리 예전에 어디서 만난 적 있어요?”
나는 잠시 세이룬의 기색을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분명, 세이룬의 행동은 어딘가 절절한 구석이 있었다. 단순히 첫눈에 반한 사람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그런 절절함 말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껏 세이룬이 보여 준 그 모든 ‘절절함’은 나를 배려한 연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만약 그게 연기가 아니었다면,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정은 이것 하나밖에 없었다.
우리가 예전에 만난 적이 있고, 세이룬은 그때부터 나를 좋아하고 있었다는 것.
“……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뜻밖의 질문을 들은 것처럼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세이룬의 목소리였다.
흡사 어떻게 하면 내가 실망하지 않게 대답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듯한 기색에, 나는 하하 웃으면서 손을 내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별생각 없이 물어본 거였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그냥 흘려들어요. 내가 이상한 걸 물어봤네.”
“……에리카.”
“그나저나 저 할 말이 있다고 했잖아요. 여기 서서 말하기는 좀 그러니까 정자로 자리를 옮기도록 하죠.”
나는 다른 말이 나오기 전에 얼른 세이룬을 데리고 정자로 갔다.
의자에 앉자마자 깍지 낀 손을 놓은 나는 세이룬이 어떻게 반응하기 전에 다시 얼른 입을 열었다.
“제가 전에 셀루리아 가문에 복수할 거라고 했었잖아요. 그 계획에 관한 내용이에요.”
세이룬은 서운한 것처럼 입을 일자로 꾹 다문 채 비어 버린 제 손을 말없이 내려다보다가, 이내 다시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봤다.
“말씀해 주십시오.”
“일단 첫 번째로 말씀드릴 것은 복수의 큰 틀에 관한 내용이에요. 저는 셀루리아 가문이 구교파인 점을 이용해서 신교와 손을 잡고자 해요. 해수라는 저의 이점을 이용하기에도 신교와 손을 잡는 편이 더 용이하고요.”
제가 신교의 구호 활동을 후원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에요. 그렇게 덧붙인 나는 다시 이어 말했다.
“두 번째로 말씀드릴 것은 황가에 관한 내용이에요. 셀루리아에 복수를 하려면 드레인을 공격할 명분을 얻은 황가도 우리의 적이 될 거예요. 제가 하게 되는 일은 어쩌면 ‘반역’이 될지도 모르죠.”
“……에리카는 황가를 무너뜨리고 싶은 겁니까?”
세이룬이 조용히 물어왔다.
목소리에는 고저가 거의 없어서, 그 질문에 담긴 저의가 무엇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일단 내 솔직한 계획을 말하기 위해 내가 막 입을 열었을 때였다.
“혹여 이렌텔 황가를 무너뜨리고 싶으신 거라면, 지도에서 이렌텔의 이름을 깨끗이 지워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