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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박데기 영애의 반격을 조심하세요 (40)화 (40/139)

40화

“……네?”

‘에리카’란 이름을 들었을 때부터 굳어 가던 카리에의 얼굴이 ‘신교’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더욱 딱딱하게 굳어졌다.

에스로타의 말에 좌중이 술렁거렸다.

이들은 곧 사교계의 중심지인 세사르에 조르르 몰려가서 그 소문에 날개를 달아 주는 역할을 하겠지.

카리에는 당장이라도 그게 무슨 소리냐고 버럭 소리 지르고 싶은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입가를 억지로 늘려 웃었다.

“그게, 무슨 소리이신지……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에스로타는 난감한 기색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영애는 모르셨던 모양이군요. 최근 평민들 사이에서 드레인 대공비의 인지도가 급격히 상승했어요. 아시다시피 평민들은 신교를 믿는 자들이 대다수잖아요. 의아해서 수하에게 그 이유에 대해 알아 오라고 지시했는데, 대공비께서 신교에 후원금을 보내셨기 때문이라고 답하더군요.”

“하지만, 드레인 대공비께서는 셀루리아 가문 출신이시잖아?”

“셀루리아는 구교파의 중심 가문 중 하난데 왜 신교에 후원을……?”

둥글게 앉아 있던 영애와 영식들이 서로 수군거렸다.

아닌 척 흘끔거리는 시선들이 카리에에게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에리카 이 멍청한 자식! 도대체가 쓸모 있는 구석이 하나도 없어!’

카리에는 당장이라도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으며 웃음을 유지했다.

카리에는 앞에 놓인 찻잔을 천천히 들어 한 모금 마신 뒤, 나긋하게 입을 열었다.

“에리카는 원래 마음이 여리고 상냥한 아이라, 예전부터 저와 밖으로 놀러 다녔을 때도 불쌍하고 가여운 아이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어요. 그런데 셀루리아에서는 신교에 대한 정보가 빈약하고, 구교는 아이들에게 후원 같은 걸 하지 않잖아요. 공국에서 신교가 아이들에게 후원한다는 소식을 듣고 후원을 시작한 것 같아요.”

카리에의 설명에 주위 사람들이 하나둘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맞아. 셀루리아 가문은 신교에 유독 적대적인 가문으로 유명하지.”

“하긴, 저번에 비전하와 한번 대화 나눠 본 적이 있었는데, 굉장히 상냥하신 분이더라고요.”

“다시 생각해 보니, 비전하께서 평민들에게 인지도를 쌓으시는 게 저희 구교파의 이미지 쇄신에도 도움이 될 것 같네요.”

영애와 영식들이 속삭이는 말은 제각기 달랐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모두 에리카에 대한 호의였다.

카리에는 당장이라도 갈리려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다시금 웃었다.

손아귀에 절로 힘이 들어가려고 해서 재빨리 테이블 밑으로 손을 집어넣는데, 좌중의 수군거림을 가만히 듣고 있던 에스로타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비전하의 상냥하신 성정이야 모두가 익히 아는 바지만, 그래도 후원금이 전달되는 곳이 신교인 만큼 그쪽으로 자금이 흘러 들어가는 게 조금 우려되네요.”

“……제가 에리카에게 소공작의 우려에 대해 잘 말해 놓을게요.”

“그래 주신다면 고마워요, 영애.”

에스로타는 카리에의 그 말을 듣고서야 안심이 된 듯 부드럽게 웃었다.

애써 곡선을 그리고 있는 입꼬리가 파들거렸다. 카리에는 드레스 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화원에서 들려오는 맑은 새소리가 이토록 듣기 싫었던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 * *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지 모를 정도로 머릿속이 온통 새하얬다.

카리에는 에밀리의 시중을 받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외출용 드레스를 벗고 간편한 슈미즈와 실내용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진이 다 빠져서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카리에는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에밀리, 어머니와 아버지를 응접실로 모셔 오도록 해. 긴히 말씀드릴 이야기가 있다고.”

“네, 아가씨.”

충성스럽게 대답한 에밀리가 밖으로 나간 후, 카리에도 곧장 응접실로 향했다.

응접실에서 하인 두 명에게 다과 준비를 명령하자마자 펠리페와 델레미아가 들어왔다.

“무슨 일이기에 응접실에서 보자고 했니?”

하인이 빼 주는 의자에 앉은 델레미아가 카리에를 바라보았다. 펠리페의 시선도 저에게로 향하고 나서야 카리에는 입을 열었다.

“오늘 베이센 소공작이 개최한 티파티에서 에리카 그것이 신교에 후원을 한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뭐? 후원? 신교를?”

펠리페가 왈칵 인상을 찡그렸다.

역시 얼굴을 찌푸린 델레미아가 말했다.

“그 애가 아무리 멍청하더라도 신교에 그냥 후원금을 내지는 않았겠지. 신교의 구호 활동을 후원한 거니?”

“네, 맞아요. 고아들을 후원한다고 하더라고요. 다들 수상한 눈초리로 저를 쳐다보길래, 그냥 에리카 그 자식이 착해 빠져서 그렇다고 둘러댔어요. 하, 역시 천민 피는 어디 안 간다니까요. 어떻게 버러지들을 후원한다고 신교에 후원금을 보낼 수가 있지?”

카리에가 경멸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잠시 생각하던 델레미아는 찌푸렸던 얼굴을 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 그렇게 나쁜 소식인 것만도 아니야.”

“지금 그게 무슨 말이오? 그 애가 신교에 돈을 보냈는데 나쁘지 않다니? 당장 셀루리아가 불명예를 뒤집어쓰게 생겼는데!”

펠리페가 분개하며 소리쳤다.

델레미아는 화가 난 남편을 달래듯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펠리페, 잘 생각해 봐요. 에리카가 무슨 돈이 있어서 신교의 활동을 ‘후원’씩이나 했겠어요?”

“……!”

“그 애가 신교의 고아들을 후원하는 건, 카리에가 했던 것처럼 에리카의 마음이 무척이나 여려서 그렇다고 둘러대면 돼요. 그리고 에리카에게는 더는 신교에 후원하지 말라는 서신을 보내면 되죠. 이건 큰 문제가 아니에요.”

펠리페와 카리에의 얼굴에 묘한 웃음이 떠올랐다.

웃음을 참는 것처럼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린 카리에가 비밀을 속삭이듯 소곤거렸다.

“그러니까 어머니의 말씀은, 분명 대공가에서 그 애에게 가문의 돈을 사용하도록 허락했을 거란 말이죠?”

“그래. 그리고 에리카는 우리 수중에 있지.”

델레미아가 부드럽게 덧붙였다.

느긋한 얼굴로 찻잔을 기울여 차를 한 모금 마신 펠리페가 말했다.

“일단, 에리카에게 신교로의 후원을 그만두라는 서신을 보내야겠군. 부차적인 사안은 천천히 생각해 봐야겠어.”

“그러도록 해요, 펠리페.”

“그게 좋겠어요, 아버지.”

델레미아와 카리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지금까지 누렸던 평온한 일상은, 이번에도 깨지지 않고 부드럽게 흘러갔다.

* * *

“비전하, 서신이 도착했어요.”

포카가 내 앞으로 서신이 올려진 조그만 쟁반을 내밀었다.

레비나와 다른 하인들에게 둘러싸여서 꾸밈을 당하던 나는 잠시 꾸밈을 멈추고 쟁반 위에 있던 서신을 집어 들었다.

서신 겉봉에 적힌 ‘펠리페 르 셀루리아’라는 이름을 읽자마자, 입가에 가느다란 웃음이 떠올랐다.

‘드디어 내가 신교를 후원한다는 소문이 셀루리아 저택에까지 들어갔나 보네.’

언제 한번 이런 주제넘는 서신이 도착할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서랍에서 페이퍼 나이프를 꺼내는 대신 그냥 손으로 겉봉투를 뜯었다.

손에 의해 찢어진 봉투는 온전한 꼴을 찾아볼 수 없었다.

‘어디 내용이나 한번 보실까나.’

나는 흐린 눈을 장착한 채 종이를 재빨리 훑어 내렸다.

내가 있는 곳이 셀루리아 저택이 아니어서인지, 서신에는 직접적인 모욕이나 윽박보다는 우리가 얼마나 모자람 없이 대해 줬는데 이래서는 안 된다며 가스라이팅하는 내용이 한가득 적혀 있었다.

구역질 나는 서신 그 어디에도 내가 찾는 내용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나는 가차 없이 서신을 쫙쫙 찢어 버렸다.

“약은 자식들.”

‘돈 없는 에리카’가 ‘신교에 후원을 할 만큼 상당한 돈’이 있는데도 관심 없는 척 눈 가리고 아웅이라니.

‘대공가 예산을 빼돌리라는 식의 내용이 딱 한 줄이라도 있었으면 바로 셀루리아의 숨통을 조일 명분으로 수집해 두는 건데.’

이런 교묘한 가스라이팅 글은 나에게 행해진 학대를 모르는 제3자가 보면 그냥 영락없이 ‘구교파 가문 출신에 맞게 행동하라는 단정한 훈계’ 글이었다.

이런 건 천백 장 있어 봐야 아무 소용도 없다.

나중에 내가 학대 사실을 밝힌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귀족들은 ‘가스라이팅’ 자체를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나는 갈기갈기 찢어 버린 서신을 포카가 들고 있던 쟁반 위에 눈처럼 쌓아 올렸다.

“포카, 쓰레기 좀 치워 주련?”

“네, 비전하!”

포카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방 한구석에 마련된 쓰레기통에 쓰레기가 된 편지 조각을 와르르 버렸다.

대 귀족 가문이 사용하는 고급 편지지가 쓰레기통으로 사뿐사뿐 내려앉는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자세를 바로 한 뒤 이어 꾸밈을 당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대공비인 내가 드레인 가문 소속 기사들에게 정식으로 주인 서약을 받는 중대한 날이었다.

이렌텔 제국의 귀족들은 결혼해서 다른 가문의 안주인으로 가게 되면 그 가문의 기사들에게 자신이 새로운 주인임을 알리고 그들에게서 충성 서약을 받아 낸다.

물론, 안주인이 된 그 가문이 사병을 둘 정도의 재력과 권력이 있을 때에 한해서지만.

‘뭐, 나야 이렌텔에서 군력으로 제일가는 가문의 안주인이니까.’

“비전하, 다 되셨어요.”

레비나가 내 얼굴을 두드리던 솔을 가져가며 배시시 웃었다. 그러고는 조그맣게 덧붙였다.

“너무 아름다우세요…….”

레비나를 시작으로 하인들의 아첨이 이어졌다.

“정말, 정말, 정말이지…… 어쩜 이렇게 귀엽고 예쁘고 아름답고 멋지실 수가 있죠…….”

“비전하께서 예쁘신 건 이미 알고 있었고, 오늘 꾸며 드리는 것도 저희가 했지만…… 그래도 이 말은 해야겠어요. 전하, 너무 예쁘셔서 눈이 아파요.”

“아…… 이렇게 사랑스러우셔서 다른 사람들이 비전하 납치하면 어떡해요. 성 보안을 더 강화시켜야 되나.”

“비전하. 다른 인간들이 유혹해도 절대로, 절대로 따라가면 안 돼요. 아셨죠?”

“…….”

다른 건 다 그렇다 치더라도, 내가 마치 물가에 내놓은 영유아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 건 좀 아니지 않니.

‘그러고 보니, 이 성에서 미성년자는 나와 세이룬밖에 없다고 했던가…….’

성년자의 눈에 미자는 모르는 사람이 초콜릿 준다고 하면 좋다고 쫄래쫄래 따라가는 애처럼 보이는 건가.

나는 흐린 눈을 뜨고 하인들을 바라봤지만, 그들은 안 따라갈 거라고 대답해 주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울어 버릴 듯 울멍울멍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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