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내 물음에, 한없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타한은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들고 있던 서류를 내 앞으로 내밀었다.
“서쪽 변경으로 파견 나갔던 기사단이 나흘 후 전원 복귀 예정이라는 소식이 도착했습니다. 최대한 빨리 소식을 전해 드릴 수 있도록 보고서 작성을 마치자마자 들른 것입니다.”
“아, 저녁에도 고생이 많네. 쉬지도 못하고.”
“아닙니다.”
타한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나는 그렇게 덧붙이며 타한이 내민 서류를 대충 눈으로 훑었다.
서류에는 기사단이 복귀한다는 정보뿐만 아니라, 기사단이 나를 주인으로 받아들이는 의식인 서약식은 언제 하면 좋을지 그 후보 날짜도 좌르륵 정리해 놨다.
‘각 날짜에 개최하면 뭐가 좋고 나쁜지조차 다 적혀 있어…….’
서류를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타한은 참 깔끔하고 일목요연하게 보고서를 작성할 줄 알았다.
나는 감탄을 터뜨리며 서류를 갈무리했다.
“타한은 정말 보고서 잘 쓰네. 존경스러워.”
“기본인 것을요. 과찬이십니다.”
타한이 귀여운 소리를 들었다는 것처럼 웃었다.
나는 흐린 눈으로 과거 내가 교수님께 과제로 제출했던 보고서란 것들을 떠올렸다.
‘이게 기본이면 나는 대체 뭐지.’
지능을 가지고 있는 게 맞기는 한 걸까.
‘아 갑자기 안구에서 습기가 차네.’
눈가에 반짝이는(확실하지는 않다) 눈물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숙이던 내 눈에 문득 손목 안쪽이 보였다.
그 순간, 내 입에서 질문 하나가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왔다.
“타한은 혹시 조그만 뱀 본 적 있어?”
“……네?”
타한은 생각보다도 더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촛불 때문에 주황색으로 물든 그의 노란색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거세게 흔들렸다.
“그…….”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지 ‘그’만 반복하고 있는 타한을 보고, 나는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됐어, 타한. 괜히 나 위로해 주려고 끙끙거리지 않아도 돼. 위로는 세이룬에게서 많이 들었는걸.”
“…….”
“내가 바쁜 타한을 계속 붙잡고 있었네. 어서 가서 빨리 일 끝내고 푹 쉬어. 나도 서류 좀 살펴보다가 자야겠다.”
타한이 계속 동공지진을 일으키며 서 있자, 나는 곤란한 질문을 던진 과거의 나를 탓하며 타한에게 도망의 길을 열어 주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잠시 후 타한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과 전혀 다른 말이었다.
“……보여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보여 주고 싶은 거?”
나는 눈을 끔벅이며 타한을 바라봤다.
타한은 뭔가 결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비전하께 보여 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같이 가 주시겠습니까?”
타한이 다시 한번 정중하게 부탁했다.
거절할 이유가 없는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 * *
타한이 나를 안내한 곳은 대공성 중에서도 지하에 위치한 곳이었다.
“비전하, 이곳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지하 복도의 어느 문 앞에서 멈춰선 타한이 내게 말했다.
‘먼지라도 치우려고 그러나?’
나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내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타한은 내게 “감사합니다”하고 인사한 후,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얼마쯤 기다렸을까, 다시 밖으로 나온 타한이 이제 들어가도 된다며 나를 안으로 안내했다.
방은 넓고 긴 복도처럼 꾸며져 있었는데, 양 벽에 달린 양초에 불이 밝혀져 있어서 그리 어둡지는 않았다.
점점이 이어진 양초 사이에는 휘장으로 가려진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이 풀린 것은, 유일하게 휘장이 젖혀진 어느 그림 앞에서 타한이 걸음을 멈췄을 때였다.
“다 왔습니다, 비전하. 이 그림이 제가 비전하께 보여 드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내가 그림을 잘 볼 수 있도록 살짝 옆으로 비켜선 타한이 등롱을 들고 그림을 밝혔다.
양초들의 빛으로는 어렴풋이 보이던 그림이 등롱의 불빛에 의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나는 잠시 멍한 표정으로 그림을 바라봤다.
검은빛 고운 머릿결이 그대로 표현된 머리카락, 기억하는 것보다는 통통해 보이는 뺨.
작은 어깨나 얇은 뼈대로 봐선 이 그림은 어린 시절의 세이룬이 분명했다.
‘5살쯤…… 된 것 같은데.’
와중에 얼굴 보면 안 된다고 실크 천으로 눈 부분을 가린 걸 보면 세이룬이 아닐 수가 없었다.
멍하니 어린 세이룬의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문득 그림 속 세이룬이 뚱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풋.”
저 부루퉁한 표정 좀 봐. 초상화 그리는 게 정말 싫었나 봐.
나도 모르게 키득키득 웃음이 터져 나왔다.
“세이룬은 아이 때도 귀여웠네.”
“……전하를 귀엽다고 말씀하시는 분은 비전하밖에 없을 겁니다.”
타한이 왠지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이전에도 비슷한 말을 세이룬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지.
‘세이룬의 귀여움을 모르는 그대들이 가엾구나…….’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타한, 초상화 속 세이룬은 아이인데도 얼굴은 못 보는 거야?”
아무 생각 없이 던진 질문이었는데, 타한이 놀란 것처럼 움찔 어깨를 떨었다.
그 모습에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고 보면 얼굴을 마주할 수 없는 건 7살 이후부터잖아. 지금 저 초상화는 5살 무렵인 것 같고.’
그 말인즉, 초상화를 통해서라면 세이룬의 눈을 볼 수도 있다는 소리 아닌가!
“타한, 응? 초상화 속 세이룬은 아직 어리잖아. 나 세이룬의 눈이 보고 싶어.”
“비전하, 그건…….”
“진짜 보면 안 돼? 그냥 어린아이의 귀여운 초상화를 보는 것뿐이잖아?”
나는 일부러 어깨를 축 늘어뜨리면서 물었다.
내적 갈등이 일어났는지 안절부절못하며 나와 초상화를 번갈아 보던 타한은 이내 마음을 다잡은 듯 굳게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비전하.”
“쳇.”
남편의 눈동자 한 번 보는 게 이렇게 힘들 줄이야.
가볍게 한숨을 내쉰 나는 다시 시선을 돌려서 초상화 속 어린 세이룬을 바라봤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이미 큰 청소년의 모습을 봐서 그런가.
‘……어디서 본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왜 이렇게 낯익은 것처럼 느껴지지? 나는 눈가를 좁히며 어린 세이룬의 초상화를 가만히 응시했다.
내가 아이 때의 세이룬을 봤을 리는 없을 텐데 말이다.
‘거참 희한한 기분일세.’
잠시 그렇게 초상화를 쏘아보던 나는 이내 머릿속의 모든 잡생각을 지운 뒤 흐뭇한 얼굴로 어린 세이룬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아무튼, 저는 분명…… 보여 드렸습니다…….”
감상하는 도중, 타한이 옆에서 뭐라고 중얼거린 것도 같았다.
하지만 세이룬이 너무 귀엽고 예쁘고 사랑스럽고 말랑거리고 아무튼 다 해서 그림에 집중하기에 여념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타한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했다.
* * *
베이센 소공작인 에스로타 르 베이센이 개최하는 티파티는 이렌텔의 구교파 귀족이라면 모두가 초대받고 싶어 안달하는 티파티였다.
카리에는 제가 탄 마차의 가문 문양만 보고 바로 입장을 허락하는 문지기를 보면서 아찔할 정도로 황홀한 기분을 만끽했다.
얼마 전, 해수가 셀루리아 가문에 농간질을 부렸을 때는 발도 디밀지 못했던 곳이었는데, 초대장 확인 절차조차 거치지 않고 통과하는 이 쾌감이라니.
“안녕하십니까, 셀루리아 후작 가문의 카리에 영애. 자리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저택 앞에 도착해서 내리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집사가 카리에에게 예를 표했다.
우아하게 미소 지은 카리에는 집사를 따라 자리를 안내받았다.
카리에가 안내받은 자리는 개최자 에스로타의 바로 옆 상석이었다. 집사가 빼 준 의자에 카리에가 앉자, 옆자리에서 하인들에게 지시하고 있던 에스로타가 그녀를 발견하고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카리에 영애. 초대에 응해 주셔서 기뻐요.”
에스로타의 티파티가 선망의 대상인 이유는, 세력가만 초대받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하거니와, 사교계의 정점에 있으면서 사람 보는 눈이 무척이나 깐깐한 그녀의 선택을 받았다는 증거이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해수의 소유인 에인시아와 세사르를 전혀 이용하지 않게 된 셀루리아 가문이 사교계 입지가 조금밖에 줄어들지 않은 데에는 에스로타의 초대가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초대받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하는 처지거늘, 무려 초대에 응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까지 듣다니.
“아니에요, 소공작. 저야말로 초대해 주셔서 감사하죠.”
카리에는 입술 끝이 귀에 걸리려는 것을 가까스로 제지하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에스로타도 녹금안을 접어 웃으며 말했다.
“영애께서 그렇게 말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에스로타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한 카리에는 시선을 돌려서 제 앞에 있는 찻잔을 기울여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뭐, 나름 에리카 녀석이 쓸모가 있을 때도 있네.’
그냥 죽여 버렸으면 좀 아까울 뻔했다.
티파티는 잔잔하고 매끄러운 분위기 속에서 시작됐다.
구교파 제일의 티파티에서 카리에는 단연 주인공이었다.
모두가 카리에에게 말을 붙이고 싶어 안달했고, 그녀에게 잘 보이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그래, 이게 당연한 거잖아.’
에리카는 보이지도 않는 곳에 처박혀 거름이 되고, 자신은 그 거름을 발판 삼아 주인공으로서 군림한다.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
“카리에 영애,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한창 티파티가 진행되던 도중, 문득 에스로타가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카리에와 에스로타를 흘끔거리던 시선이 완전히 그들에게로 쏠렸다.
에스로타가 연보랏빛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넘기며 덧붙였다.
“제가 최근에 들은 소문과 관련된 질문이에요.”
카리에는 우아하게 미소 지으면서 에스로타를 돌아보았다.
“네, 소공작. 뭐든지 여쭤보셔도 좋아요.”
선선한 대답이 떨어졌다. 그럼에도 잠시 침묵하던 에스로타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당신의 사촌이신 에리카 영애…… 아니, 드레인 대공비께서 신교에서 돌보는 고아들에게 후원을 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