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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박데기 영애의 반격을 조심하세요 (38)화 (38/139)

38화

‘샤샤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에 들떠서 기대해 버린다면, 그것이 다시 부정당했을 때 나는 그때처럼 끔찍한 절망감을 또 느끼게 되겠지.’

샤샤가 살아 있을 확률은 희박하다. 이성은 그리 말했다.

그 작고 작은 희망으로 다시 기대해 버린다면, 너는 그때처럼 또 아픔에 허덕이게 될 것이라고. 이제야 겨우 샤샤를 생각해도 웃을 수 있게 됐는데, 기대가 부정당해 버리면 앞으로 한동안은 그럴 수 없을 거라고.

차라리 이대로 그 기대를 묻어 버리는 것이 이로울 거라고.

“에리카, 어디가 불편하다면 말씀해 주세요.”

세이룬의 목소리가 상념을 가르고 들려왔다. 나는 눈을 깜빡여 그의 얼굴로 초점을 맞췄다.

내 눈에 초점이 돌아온 것을 확인한 세이룬이 ‘말씀을 하다가 마시기에……’하고 말끝을 흐렸다.

나는 걱정이 가득한 그의 얼굴을 마주 보며, 문득 저 가리개를 풀고 그 뒤에 숨겨진 눈을 보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그렇게 한다면, 왠지 지금 갖고 있는 모든 고민이 다 사라질 것만 같았다.

정말, 비이성적인 생각이었다.

“세이룬.”

나는 다시 한번 그를 불렀다. 본론 없는 반복적인 물음에도, 세이룬은 짜증 내는 기색 하나 없이 대답했다.

“네, 에리카.”

그가 나와 시선을 맞추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의 팔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분명 이성은 이대로 내가 그 기대를 묻어 버리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대로 묻지 않고 넘어가기에는, 나는 이미 너무나 많은 기대를 해 버린 후였다.

“혹시…… 작은 뱀 본 적 있어요?”

내 질문을 들은 세이룬은 입을 꾹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혹시 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걸까.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가맣고 조그만 뱀인데, 제 한 뼘보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더 컸어요.”

“…….”

“손에 올려놓으면 쏙 들어왔는데…… 아, 보통 뱀과는 달리 눈을 깜박여요. 눈은 예쁜 오드 아이인데, 오른쪽은 금색이고 왼쪽은 은색이구요. 손바닥에 올려놓으면 따끈따끈한 온기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왠지 딱딱해진 것 같은 목소리로 세이룬이 대답했다. 나는 손목 안쪽에 새겨진 문양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하긴…… 샤샤는 너무나도 조그매서, 쉽게 눈에 띄는 게 더 이상했다.

‘이 정자에서 문양이 나타났으니까, 샤샤는 정자 근처에 있다는 뜻이겠지?’

나는 문양에서 눈을 떼며 정자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지금은 날이 저물었으니,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나와서 이 주변을 돌아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갑자기 뱀은…… 왜 찾으십니까?”

머릿속으로 이 일대를 수색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세이룬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천천히 손목을 돌려서 세이룬에게 문양을 보여 줬다.

“셀루리아 저택에 있을 때, 작은 실뱀 하나를 키웠었거든요. 그 애랑 함께 있으면 손목에 이 문양이 생기곤 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나쁜 일이 생겨서 그 애가 죽었는데…… 근데 지금 갑자기 이 문양이 나타났어요.”

나는 내가 횡설수설하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 열심히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이 근처에 그 애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러다 문득 감정이 치밀어 올라서, 나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소중한 뱀이었습니까?”

내가 입을 다물자, 잠자코 내 말을 듣고 있던 세이룬이 가만히 물어왔다. 나는 잠시 눈을 끔벅이다가 이내 소리 내어 웃었다.

“너무 당연하잖아요.”

“…….”

“안 소중하면 제가 왜 샤샤를 찾고 싶어 하겠어요.”

다시 만나면, 그럴 수 있다면.

이번에야말로, 해 주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았다.

문득 세이룬의 손가락이 내 눈가를 스쳤다. 의아해서 쳐다보자 손가락 끝에 맺힌 물방울이 시야에 들어왔다.

“……네.”

세이룬이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대답했다. 목소리가 왠지 떨리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착각일까.

연못 위로 떨어져 내리는 낙화가 서서히 옅어지기 시작했다.

다시 불꽃으로 시선을 돌리려는 내 귓가로, 물기 어린 그의 목소리가 나직이 스쳤다.

“감사합니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옅은 미소가 맺혔다.

“낙화유, 나중에 또 볼까요.”

가볍게 툭 내뱉었다.

내 웃음 따라 배시시 웃음 지은 세이룬이 “네” 하고 대답했다.

그 별것 아닌 대답에, 신기할 만큼 마음이 따뜻해졌다.

마치, 저기 내리는 꽃잎이 마음 밑바닥에 소복소복 쌓여 가는 것처럼.

* * *

세이룬에게 낙화를 보여 준 다음 날부터,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해사원으로 나와 정원을 뒤지기 시작했다.

어제 문양이 나타났던 정자를 중심으로 온갖 꽃과 나무들을 헤집고 다니면서 손목 안쪽에 문양이 나타나는지를 수도 없이 확인했다.

“샤샤.”

“샤샤, 나 에리카야.”

“있으면 대답해 줘, 샤샤.”

옷에 풀물 드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곳저곳을 찾아봤지만, 샤샤는커녕 어제는 분명히 나타났던 문양조차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하루가 지났다. 샤샤는 찾지 못했다.

하루 종일 해사원을 헤집고 다니는 내가 걱정스러웠는지, 일이 없을 때면 나와 함께 해사원을 둘러봐 줬던 세이룬은 아무 소득 없이 성으로 돌아오고 나서 내가 침울해하자 그 뱀은 어딘가에서 행복하게 지내고 있을 거라며 위로해 줬다.

하지만 그 말에 샤샤를 포기하기에는, 아직 해사원에서 꼼꼼하게 살피지 못한 곳이 너무 많았다.

이틀이 지났다. 여전히 샤샤는 찾지 못했다.

세이룬은 내가 밥도 안 먹고 해사원만 찾는다는 걸 알면 그 뱀이 무척 걱정할 거라면서, 그 뱀은 자신을 잊고 내가 행복한 삶을 살길 원할 거라고 했다.

하지만 그 말에 샤샤를 포기하기에는, 가끔씩 손목 안쪽에 나타나는 문양이 나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일주일이 지났다. 여전히 샤샤는 찾지 못했다.

샤샤를 찾지 못하는 시간이 점점 늘어날수록, 설렘과 기대로 부풀어 올라 있던 내 가슴은 천천히 어둑한 빛깔로 사그라들어 갔다.

‘정말로, 손목의 문양은 샤샤가 여기에 있어서 나타난 게 아닌 걸까…….’

마음이 심란해서, 속까지 울렁거리는 것 같았다.

한참 청사초를 헤집던 나는 문득 행동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뒤집은 손목에는 흔적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손에 잡혀 있던 청사초가 아무렇게나 짓이겨졌다.

‘정말 이성의 충고대로, 애초에 기대를 묻어 버렸으면…….’

그냥 샤샤가 근처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설렘을 간직한 채 지낼 수 있었을까.

문득 후회가 치밀어올랐다.

내가 행동을 멈춘 채 풀만 움켜쥐고 있자, 내 옆에서 다른 곳을 찾아보고 있던 포카와 레비나가 안절부절못하며 나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비전하, 풀을 그렇게 쥐시면 고우신 손가락이 베일지도 몰라요…….”

“뱀 님은 이미 다른 곳으로 가 버린 걸지도 몰라요. 지금 날이 꽤 저물었으니까, 비전하께서 먼저 처소에 돌아가 계시면 저와 레비나가 남아서 이 근처를 좀 더 찾아볼게요.”

그 말에, 문득 정신이 든 것은 한순간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고 포카와 레비나를 바라봤다.

내가 샤샤를 찾겠다고 해사원을 헤집는 바람에, 내 직속 하인인 포카와 레비나까지 어쩔 수 없이 나를 따라서 팔자에도 없는 풀 헤집기를 하고 있었다.

‘하, 나 완전 빼박 악덕 상사였구나…….’

상사가 여기서 잡초 탐색을 하고 있는데 부하 직원이 룰루랄라 하고 먼저 퇴근할 수 있을 리가.

나는 서둘러 풀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야, 얘들아. 우리 이제 다 같이 돌아가자.”

“네? 하지만 이 근방은 아직 다 돌아보지 못했는데…….”

“괜찮아. 내가 너희 생각을 너무 못 한 것 같네. 다들 힘들었지? 빨리 돌아가서 쉬자.”

나는 포카와 레비나를 데리고 처소에 간 뒤, 식사만 마치고 둘을 평소보다 일찍 하인용 숙소로 돌려보냈다.

문양만을 보고 성급하게 시작한 일에 회의감을 느낄 때까지, 미처 돌아보지 못한 내 직속 하인들에게 미안해서 선사하는 조기 퇴근이었다.

“하…….”

포카와 레비나가 돌아가고 나서, 나는 침대에 앉아 아무 흔적 없는 손목을 내려다봤다.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내일부터는 샤샤를 찾는 일 같은 건 안 하는 게 좋겠지.’

샤샤는…… 정말로 없는 거겠지.

문득, 샤샤가 죽었을 때 느꼈던 참을 수 없는 감정이 다시금 왈칵 치밀어 올랐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근처 책상 서랍을 뒤져서 치료 상자에 담긴 붕대를 꺼내 손목에 칭칭 감았다.

‘이제, 더는 생각하지 말자.’

적어도 복수가 모두 끝날 때까지, 샤샤 생각에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됐다.

붕대를 감고 단단히 고정까지 시킨 다음, 나는 멍하니 손목을 내려다봤다. 기분이 저절로 울적해졌다.

이대로 앉아 있으면 더 우울해질 것 같아서, 치료 상자를 정리한 나는 곧장 대공비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동안 좀 밀린 서류를 처리할 생각에서였다.

어차피 서류 좀 끄적일 건데 샹들리에를 밝힐 필요까지는 없었다. 나는 처소에서 들고 간 등롱에 담긴 불씨로 책상 위의 램프를 밝혔다.

양쪽으로 하나씩 밝히자 그런대로 서류 글씨를 읽을 수 있을 만큼 밝아졌다.

그렇게 불빛에 의지해서 쌓인 서류 중 제일 위에 있는 장부터 확인하고 있을 때였다.

똑똑.

정갈한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안에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한 듯, 인사 없이 들어온 타한은 집무실 책상에 앉아 있는 나를 보고 불현듯 걸음을 멈췄다.

“비전하? 어째서 여기에…….”

“안녕, 타한.”

나는 타한에게 작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타한은 곧장 내게로 다가와 안색을 살피듯 내 얼굴을 살폈다.

어차피 촛불의 불빛이 너무 강해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겠지만.

“역시 안색이 좋지 않으시군요. 그동안 뱀 님을 찾아다니느라 잠도 제대로 못 주무시고 식사도 제대로 못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타한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와, 눈도 밝아라. 나는 어색하게 웃다가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타한은 집무실에 무슨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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