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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박데기 영애의 반격을 조심하세요 (37)화 (37/139)

37화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머리맡에서 부드럽게 떨어져 내렸다. 나는 어깨를 폭 감싼 숄을 조금 더 끌어당기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내 뒤에서 세이룬이 고개를 숙여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레비나는 정자를 내려간 건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빙긋 웃으며 내 옆자리를 툭툭 쳤다.

“조금 추웠는데, 숄을 덮어서 이젠 괜찮아요. 자, 여기 앉아요.”

“추우면 감기 걸리기 쉽다고 배웠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그럴 순 없어요.”

나는 숄 밖으로 손을 뻗어서 세이룬의 손을 맞잡았다. 굳은살이 곳곳에 박혀서 투박한 느낌을 주었지만, 그럼에도 크고 따뜻한 손이었다.

“오늘을 위해서 내가 얼마나 열심히 준비했는데요.”

“……네?”

순간, 세이룬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아마 눈을 볼 수 있다면, 분명 동그랗게 떠져 있겠지.

나는 맞잡은 손을 깍지 껴 잡으며, 다시금 웃었다.

“오늘 여기에서 세이룬에게 보여 주고 싶은 것이 있어요.”

내 말이 끝나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조그맣게 빛나는 불씨들이 물 위로 포슬포슬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기막힌 타이밍이 아닐 수 없었다.

“저건…….”

멍하니 낙화유를 응시하던 세이룬이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다시 닫았다. 감정을 참아 내듯, 맞잡아진 손에서 강한 힘과 함께 옅은 떨림이 전해져 왔다.

나는 푸스스 웃으면서 입가에 매달린 세이룬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세이룬의 고향에는 정말 예쁜 놀이가 있더라구요.”

“…….”

“세이룬에게 예쁜 걸 보여 주고 싶어서 준비했어요.”

보슬보슬, 허공에서 피어나 물 위로 내리는 불꽃은 여전히 고요하게 내리고 있었다. 내 말을 들은 세이룬이 감정을 가리듯 손등으로 제 입가를 가렸다.

“……그럼, 요 며칠간 그토록 바쁘셨던 게…….”

중얼거리다가, 지레 움찔하며 고개를 숙여 버린다. 그렇게 하면 제 속마음이 숨겨지는 줄 알았던 모양이지.

‘그래도 귓가가 붉어진 건 다 보이는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 얼굴만 숨기면 다 숨겨지는 줄 알았던 샤샤가 생각나 마음이 술렁거렸다.

나는 울렁이는 감정을 갈무리하며 부러 밝게 입을 열었다.

“요 며칠 동안, 나 유혹하기 위해서 세이룬이 많이 고생했다면서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세이룬이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 걸…… 어떻게……?”

그의 목소리가 널을 뛰듯 흔들렸다. 필시 저 가리개 안의 눈동자도 동공지진을 일으키고 있을 터. 나는 피식 웃으며 검지로 입을 가렸다.

“영업 비밀.”

“아…….”

세이룬은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안절부절못하며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앓는 소리를 내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 버렸다.

그런 그가 귀여워서 당장이라도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나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아 내며 입을 열었다.

“낙화유는 그 노력에 대한 보답으로 준비한 거예요.”

“하지만, 저는 하나도 제대로 성공하지 못했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세이룬이 귀여웠는데.”

축 처져 있던 세이룬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천천히 고개를 든 그가 두 손을 입가에 모은 채 나를 올려다봤다.

흡사 ‘정말……?’하고 물어오는 귀여운 소동물 같은 모양새에, 나는 그만 심장을 부여잡고 정자 위를 나뒹굴 뻔했다.

‘뭐야. 눈을 가려도 이렇게 심장이 아픈데 눈을 안 가리면 어떻게 되는 거야.’

큰일 났네. 지금부터라도 묫자리를 알아봐야 하나. 나는 진지하게 고민을 하며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말 귀여워요. 늘. 언제나. 항상.”

“…….”

“아니, 대체 뭘 먹고 이렇게 귀여울 수가 있는 거지?”

진짜 무슨 귀염귀염 열매 같은 거라도 먹는 건가. 나는 희대의 의문을 마주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내 말을 듣고 수줍은 듯 작게 눈을 접어 웃은 세이룬이 비밀을 알려 주는 것처럼 조그맣게 속삭여 왔다.

“에리카가 유일해요. 저한테 귀엽다고 말해 준 사람.”

“……네? 어, 어머님이나 아버님도 당신한테 그렇게 말 안 해 줬어요?”

“네.”

나는 기가 막혀서 말까지 더듬었는데, 세이룬은 너무나도 당연한 명제를 마주한 사람처럼 고개까지 끄덕였다.

나는 코도 막히고 뇌혈관까지 막히는 심정으로 입을 떡 벌렸다.

‘나한테는 말끝마다 귀엽다고 하시더니, 세이룬한테는 그런 말 전혀 안 하셨다고?’

뭐지. 귀여움의 기준이 낮은 게 아니라 그냥 취향이 좀 이상하셨던 건가.

심각하게 고민하던 나는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생각을 돌렸다. 어차피 내가 귀여워 보인다는 시점에서부터 이미 세뤼아와 자네한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거였다.

“그나저나, 세이룬은 왜 나를 유혹하려고 했던 거예요? 나는 이미 당신의 아내잖아요.”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당황한 듯, 빳빳하게 굳은 세이룬의 하얀 뺨 위로 따스한 낙화의 불빛이 옅게 머물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만져 보고 싶다.’

저번 합방일 때 만졌던 세이룬의 뺨은 참으로 보들보들 쫀득쫀득했는데 말이지.

그뿐일까.

손끝에 잠깐 닿았던 입술은 따뜻하면서도 부드러웠고, 폐부를 가득 채우던 그의 체향은 머리가 아득해질 정도로 달콤했다.

세이룬을 바라보는 내 눈빛이 점점 음흉해지기 시작했다. 못된 손이 슬금슬금 목표 지점을 향해 올라갔다.

그런 내게서 음흉함을 몰아낸 것은, 이어 세이룬의 입가에 떠오른 순수한 웃음이었다.

“……네, 에리카는 제 아내입니다.”

“…….”

“저는 그저 에리카가 제게 질리지 않기를 바라서 그랬던 거였어요. 에리카를 유혹하면, 조금이라도 저를 떠날 생각 같은 건 하지 않으실 것 같아서…….”

나는 양심의 가책을 더 견디지 못하고 눈을 감아 버렸다.

저렇게 순수한 사람한테 이런 더러운 마음을 품다니, 나는 쓰레기였나 보다.

‘나 원래 이런 사람 아닌데…….’

근데 그렇게 말해 봤자 더 쓰레기 같아질 뿐이겠지. 구차함을 곁들인 쓰레기 말이다.

나는 씁쓸한 얼굴로 떨어지는 불꽃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지금 저렇게 세상 무해한 얼굴로 웃고 있는 세이룬이더라도, 내가 쓰레기임을 알아차린다면 경멸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볼지도 몰랐다.

“세이룬이 이렇게나 귀여운데, 제가 어떻게 질려요…….”

세이룬이나 나한테 질리지 않으면 다행이죠. 속으로 멍하니 중얼거리고 있는데, 문득 따뜻한 온기가 내 손을 감싸는 것이 느껴졌다.

“그 말씀이 얼마나 저를 행복하게 만드는지…… 당신은 모를 거예요.”

갑작스러운 온기에 놀라서 세이룬을 쳐다보자, 내 손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린 세이룬이 빙긋 눈웃음을 짓고는 손바닥 위로 작게 입을 맞췄다.

촉, 하는 소리와 함께 입술의 부드러운 감촉이 손바닥에 닿았다가 사라졌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낙화유를 보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세이룬이 다시금 웃었다. 어떻게 웃음을 그치는지 모르는 사람처럼, 그렇게 웃었다.

그 웃음을 마주한 순간, 불현듯 가슴 저 안쪽에서부터 묵직한 두근거림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더없이 작고 작은 곳에서부터 시작된 두근거림이 내 전체를 집어삼키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것은, 절대로 익숙해질 수 없는 감각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아직까지도 세이룬에게 잡혀 있는 손을 휙 빼냈다. 손이, 화상이라도 입을 것처럼 지나치게 뜨거워서, 본능적으로 나온 반응이었다.

“에리카?”

세이룬이 의아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지만, 안타깝게도 나에겐 그 물음을 인지하고 적절한 대답을 뱉어 낼 정상적인 정신머리가 남아 있지 않았다.

‘감정이…… 이렇게까지 주체 되지 않는 건 꽤 오랜만인데…….’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다는 마음과 조금 더 세이룬과 함께 있고 싶다는 마음이 교차했다. 그것이 모순적이라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이리저리 시선을 굴리던 나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내려다봤다가, 불현듯 딱딱하게 굳었다.

“에리카? 괜찮으십니까?”

걱정이 짙어진 목소리가 귓가를 겉돌았다. 나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오랜만에 보는 손목 안쪽을 멍하니 바라봤다.

‘문양이…….’

샤샤가 죽은 뒤로 지금까지 줄곧 잠잠했던 곳에, 익숙한 꽃문양이 다시금 은빛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샤샤와 함께 있을 때면 그려졌던 바로 그, 다섯 개의 꽃잎으로 이루어진 꽃문양 말이다.

쿵, 쿵, 아까와는 다른 의미의 두근거림이 심장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샤샤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으로부터 비롯된 두근거림이었다.

“에리카? 어디가 불편하신가요?”

혹여 내가 추워서 그런 건지 걱정한 듯, 세이룬이 내 어깨에 덮인 숄을 더욱 세심하게 여며 주며 다시금 나를 불렀다.

아까 전까지 나를 지배하고 있던 낯선 두근거림은 새롭게 등장한 ‘기대’라는 거친 파도가 집어삼킨 지 오래였다. 나는 다급히 고개를 들고 세이룬의 두 팔을 움켜잡았다.

“세이룬, 혹시 말이에요.”

하지만 그렇게 말문을 연 순간, 온갖 회의적인 감정이 나를 짓눌렀다.

문양 하나가 나타난 것만으로는 샤샤가 살아 있다는 근거로 삼기에는 부족했다. 애초에 샤샤가 가까이 있을 때만 문양이 나타난다는 것은 그냥 내가 그렇다고 생각해 버린 것이지 않은가.

그리고 나는 죽은 샤샤를 직접 봤다. 샤샤를 안아 들고 창가에 고이 눕혀 두기도 했다.

세찬 비가 내리고 있는데 샤샤를 땅에 묻을 수는 없어서, 나중에 비가 그치고 고운 해가 떠오르면 그때 샤샤를 후원에 있는 쪽동백나무 밑에 묻어 주려고 했다.

중간에 갑자기 샤샤가 사라지지 않았다면, 나는 분명 그리했을 터였다.

‘창가에 놓아 둔 게 실수였어. 안 그래도 폭우가 며칠째 쏟아져서 새들이 먹이를 찾기 힘들었을 텐데, 내가 샤샤를 창가에 떡 하고 놔뒀으니…….’

땅속으로 들어가기 전, 비 오는 풍경이라도 원 없이 봐 두라는 마음으로 창가에 뒀던 건데…… 그것이 일을 그르칠 줄 알았더라면 나는 절대로 그리하지 않았을 것이다.

샤샤가 사라진 것을 깨달은 아침, 그때 느꼈던 끔찍한 절망감은 아직도 생생했다. 혹시라도 저택 사람 중 누군가가 장난으로 가져다 숨겨 놓은 것일까 봐 저택 안을 미친 듯이 돌아다녔던 것도, 그때 느꼈던 돌아 버릴 듯한 감정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샤샤의 죽음이 가져다주는 생생함에 비하면, 지금 내 손목에 자리하고 있는 문양은 샤샤가 살아 있음을 알려 주기에는 너무나도 초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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