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알았어, 곧 나갈게.”
에리카가 깨지 않도록 조용히 대답한 세뤼아는 간단한 쪽지를 적어 협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에리카의 이마에 작게 입을 맞추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아가, 나중에 보자.”
“다음에 뵙겠습니다, 아가.”
세뤼아처럼 에리카의 이마에 입을 맞춘 자네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소 이른 아침, 선대공 부부는 조용히 대공성을 떠났다.
* * *
하늘은 눈이 부실 정도로 쨍하니 맑았다.
처음으로 혼자 하는 대공비의 업무를 모두 마친 나는 우울한 기분을 달랠 겸 해사원으로 산책을 나왔다.
“하아…….”
하지만 나는 얼마 걷지도 못하고 근처 벤치에 주저앉았다. 옆에서 포카와 레비나가 쩔쩔매며 주위를 얼쩡거렸지만, 나는 그들을 달랠 기운도 없어서 손만 훠이훠이 저어 보였다.
‘어떻게 한마디 말도 없이 편지만 가지고 떠나실 수 있는 거지…….’
나는 소박맞은 며느리의 얼굴로 한숨을 폭폭 내쉬었다.
잠에서 깨자마자 본 협탁 위에는 편지 고맙고 나중에 보자는 짤막한 쪽지만이 덩그러니 올려져 있었다.
그 말인즉, 세뤼아와 자네한은 어젯밤 내 방에 들렀다는 소리였다.
“아무리 내가 늦잠을 잤더라도, 그래도 깨워서 작별 인사할 기회는 주셨어야죠…….”
나는 시무룩하게 중얼거리며 괜히 발로 땅을 툭 찼다. 걷어차인 돌멩이 하나가 도르르 굴러갔다.
지금 내 귓가에 아리랑이 맴돌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고 발병 나길 바라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버림받은 건 맞잖아?
“비전하…… 여전히 기분 안 좋으세요?”
발치에 있는 두 번째 돌멩이를 막 걷어찼을 때였다.
제가 더 시무룩한 얼굴로 다가온 포카가 조심스럽게 내 앞에 쪼그려 앉았다. 옆에 앉은 레비나도 같은 표정으로 나를 말꼬롬히 올려다보았다.
올망졸망한 두 쌍의 눈동자가 귀여워서, 나는 픽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그런 얼굴 안 해도 돼. 그냥 배신감에 토라진 것뿐이니까.”
“배신감이요……?”
레비나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이 한 마리 앙증맞은 토끼처럼 귀여워서 나는 손을 뻗어 그녀의 연분홍색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어머님과 아버님께서 나한테 말도 없이 떠나 버리셨잖아. 그래서 삐졌어.”
“하지만, 선대공 전하께서는 비전하께 어마어마한 선물을 남기고 가셨는걸요?”
레비나의 머리를 쓰다듬는 내 손을 흘긋한 포카가 직접 내 손을 쥐고 제 주홍색 머리 위로 올렸다.
‘무슨 성인이 이렇게 소동물처럼 귀여울 수 있는 거지.’
나는 귀여운 아이를 오구오구 해 주는 심정으로 포카의 머리도 슥슥 쓰다듬으며 물었다.
“선물? 혹시 그 쪽지 말하는 거야?”
가볍게 던진 내 물음에 포카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선물은 비전하 왼손 손등에 있어요.”
“엄청 예뻐요…….”
레비나가 수줍게 볼을 붉히며 속삭이듯 말했다.
나는 의아한 얼굴로 레비나를 쓰다듬던 왼쪽 손을 살폈다.
“……뭐 없는데?”
아무리 꼼꼼하게 살펴봐도 왼쪽 손등은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희기만 했다.
“저것을 보고도 비전하께 감히 함부로 대하는 자는 없을 거예요.”
“이제 비전하를 건든 자는 뼈도 못 추릴걸요……!”
“…….”
‘뭔데. 대체 너희들 눈에는 뭐가 보이는 건데.’
혹시 무시무시한 귀신이라도 내 손등에 붙어 있나. 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살짝 소름이 돋았다.
나도 모르게 양팔을 감싸 쥐자, 반짝반짝 웃고 있던 포카와 레비나의 얼굴이 순식간에 걱정으로 물들었다.
“혹시 어디 불편하신가요? 열이 있으신가? 아니면 추우신가요? 레비나, 주치의를 불러와야겠으니 먼저 비전하 모시고 처소로 올라가 있어!”
“응, 포카……! 비전하, 저 숄 가져왔어요. 일단 이거라도 덮고, 천천히 처소로―….”
“아냐, 나 괜찮아! 진짜로!”
나는 혼비백산해서 당장 주치의를 부르러 가는 포카와 내게 숄을 둘러 주려고 애쓰는 레비나를 말렸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나 진짜 괜찮다니까!’
고작 소름이 돋은 걸 가지고 행차하게 된 주치의는 대체 무슨 죄란 말인가.
어떻게 하면 이 웃기지도 않는 상황을 무마시킬 수 있을지 열심히 머리를 굴리던 나는, 이내 손뼉을 치며 두 사람의 주의를 집중시킨 뒤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나 궁금한 거 있는데, 최근에 세이룬의 상태가 조금 이상해 보여서 말이야. 묘하게 나를 피하는 것 같기도 하고.”
“…….”
“혹시 왜 그런지 짐작 가는 거 있어?”
그냥 아무거나 생각나는 대로 던진 질문이었는데, 효과는 굉장했다.
딱딱하게 얼어붙은 포카와 레비나의 고개가 나를 향해 삐걱거리며 돌아갔다.
“……눈치, 채셨어요?”
“……?”
이게 바로 코끼리 뒷걸음질 치다가 쥐 잡은 격이란 걸까.
‘진짜로, 뭐가 있었다는 말이지.’
나는 팔짱을 낀 채 눈을 가늘게 뜨고 포카와 레비나를 바라봤다. 두 사람은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죄송해요…….”
“뭐가 죄송해?”
“저희가 부족해서…… 전하의 유혹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했어요.”
“무슨―”
생각지도 못한 말에 목소리가 저절로 크게 나와서, 나는 다급히 입을 다물었다.
‘유혹? 유혹이라고?’
이 무슨 아침 드라마에 등장할 것 같은 단어냔 말이냐.
내가 기가 막힌 표정으로 포카와 레비나를 바라보자, 둘은 우물쭈물 내 눈치를 보면서 천천히 사건의 전말을 고백하기 시작했다.
그 설명을 차분히 경청하던 나는 그들이 설명을 마치자 내가 이해한 것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세이룬이 나를 유혹하고 싶어 해서 너희가 도와줬다는 거지? 그…… 북부 대공 스타일 어쩌구 책으로?”
“네…….”
“이제껏 세이룬이 나를 만나면 이상 행동을 보였던 건 모두 그 유혹이란 거 때문이었고?”
“네에…….”
“어젯밤 그 일도 내가 순진한 세이룬을 어떻게 해 보려던 게 아니라 세이룬이 나를 유혹하려고 그랬다는 거네?”
골 때린다. 내 양심이 건재하다는 깨달음에 안도할 새도 없이, 나는 입술을 꽉 깨물며 당장이라도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삼켰다.
이렇게 힘들게 비법 책 보고 연습해서 하는 유혹보다, 오히려 아무 생각 없이 짓는 웃음이 나한테 더 치명적이라는 건 모르나 보지.
“뭔데 사람이 이렇게까지 귀여울 수가 있지…….”
“네?”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웃음기를 갈무리하며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들어 올렸다. 마침, 정말이지 우연찮게도, 해사원 쪽으로 난 집무실 창가를 기웃거리며 나를 흘끔거리고 있던 세이룬과 눈이 마주쳤다.
“……!”
화들짝 놀란 세이룬이 금세 창 너머로 쏙 사라졌다.
세이룬이 사라진 자리에는 쉬폰 커튼만이 팔랑팔랑 흔들렸다. 결국 나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파안대소해 버렸다.
아 정말이지…… 잘못을 저질러 놓고 나서 주인과 놀고 싶은데 혼날까 봐 끙끙거리는 강아지 같잖아.
“포카, 레비나.”
“네, 비전하…….”
대답하는 그들의 목소리가 선생님께 꾸중을 듣기 직전의 아이들처럼 기운이 없었다.
세이룬의 유혹을 제대로 도와주지 못해서 속상해하는 건가. 나는 다시금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목 안으로 삼키며 입을 열었다.
“나도 너희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싶은데.”
“네? 도움이요?”
의외의 말이었는지 포카와 레비나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나는 꿍꿍이가 가득 담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도움. 세이룬의 유혹에 대한 보답으로, 깜짝 이벤트를 하나 열어 주고 싶거든.”
* * *
려 제국에는 ‘낙화유(落花遊)’라는 이름의 불꽃놀이가 있었다. 불꽃이 꼭 떨어지는 꽃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세이룬을 위해 준비하고 있는 이벤트가 바로 이 낙화유였다.
낙화유를 준비하는 방법은 은근 간단했다.
상수리나무 껍질로 만든 숯가루와 려 제국에서 가져온 특수 제작 환약 하나를 종이에 담아서 줄에 매단다. 일정한 간격으로 종이 주머니를 종종히 매단 줄들은 연못 위를 가로질러 반대편 나뭇가지에 묶는다.
그렇게 얼마간을 기다리면, 무슨 조화인지는 모르겠지만 안에 있는 환약과 숯가루가 타면서 불꽃이 연못 위로 떨어져 내리게 된단다.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대충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단 말이지.’
분명 엄청 예쁜 광경이겠지. 물론 화재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애초에 그리 복잡하지 않은 준비는 전광석화처럼 진행되었다.
낙화유를 준비하는 동안 사용인들은 모두 내 편이 되어 주었다.
세이룬에게 깜짝 이벤트를 해 주고 싶다는 내 말에, 그들은 저들이 더 의욕적으로 내 깜짝 이벤트를 도와주었다.
‘세이룬이 해사원 근처로 못 오도록 알찬 변명거리를 준비하거나, 세이룬이 은근히 나를 찾을 때면 비전하께서는 바쁘다며 알아서 철벽을 쳐 주는 건 기본이었지…….’
말하지 않은 것도 알아서 척척 해 주는 그 섬세함이란.
“포카, 이제 가서 대공 전하를 모셔올래?”
준비하기 시작한 지 3일째 되는 저녁, 나는 포카에게 세이룬을 해사원의 정자로 데려와 달라고 부탁했다.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 포카는 제가 더 설레는 얼굴로 날듯이 대공의 집무실을 향해 달려갔다.
“비전하, 저 두근거려요…….”
내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레비나가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레비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좋을 때로구나.’
늦지도, 이르지도 않은 저녁. 나무마다 달아 놓은 누각등이 길을 따라 은은한 빛을 흘려 보냈다. 살랑이는 봄바람에 맞춰 달콤한 향기를 흘려 보내고 있는 봄꽃 위에는 어슴푸레한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세이룬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정자의 의자에 앉아 연못을 구경했다. 정자에서 내려다보이는 연못에는 사방을 밝히고 있는 누각등이 점점이 비쳐 보였다.
멍하니 연못을 구경하던 나는 이내 시선을 들어 종이 주머니를 바라보며, 주머니에서 불꽃이 떨어지는 시간을 가늠해 봤다.
종이 주머니를 달 때 30분이면 낙화유가 시작될 거라고 했으니까, 이제 5분 정도 남은 듯했다.
‘으음, 좀 춥네…….’
아무리 봄이라지만 밤은 꽤 쌀쌀했다. 추워서 몸을 움츠리자, 옆에 있던 레비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게 물었다.
“비전하, 추우세요? 숄 둘러 드릴까요……?”
“응, 부탁할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레비나가 숄을 들고 내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내게 숄을 둘러 준 것은, 레비나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손이었다.
“추우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