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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박데기 영애의 반격을 조심하세요 (35)화 (35/139)

35화

“에리카가 알면 나를 얼마나 파렴치한으로 여길까…….”

정작 에리카는 떡 줄 생각도 하지 않는데, 자신만 신이 나서 아직 허락받지 못한 상상까지 해 버렸다.

‘술이라도 마실까.’

어차피 취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런 수치스러운 기억 정도는 조금 옅어질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한 세이룬이 옆에 있는 설렁줄을 잡아당기려 했을 때였다.

분명 창문이 모두 닫혀 있었던 집무실 안에 옅은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세이룬은 낮게 한숨을 내쉬며 뒤를 돌아봤다.

“어머니, 창문으로 드나드는 것은 삼가 달라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왜. 혹시 우리가 인간이 아닌 거 에리카가 알게 돼서 너 싫어할까 봐?”

창문 아래로 발을 툭 내디딘 세뤼아가 피식 웃으며 세이룬의 책상 위에 걸터앉았다.

“……애초에 창문은 드나드는 길이 아닙니다.”

움찔한 세이룬이 날카롭게 말했다. “그래, 그래”하면서 건성으로 대답한 세뤼아는 이내 눈을 가늘게 뜨면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러고 보니, 요즘 재밌는 소리가 들려오던데.”

“…….”

“너 에리카 유혹하려다가 대실패 했다며? 오늘은 무려 방에서 쫓겨나셨다던데.”

세뤼아가 아이처럼 까르르 웃었다. 안 그래도 침울해져 있던 세이룬은 그 말에 더 침울해져서 고개를 돌렸다.

“……놀리러 오신 겁니까?”

“흠, 크흠. 엄마가 돼서 아들을 놀리면 쓰겠니. 결혼 선배로서 너한테 사랑받는 팁 좀 전수해 줄 생각으로 왔지.”

오랜만에 진지한 표정을 지은 세뤼아는 책상 위에 고급스러운 책 두 권을 내려놓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부인에게 사랑받는 남편들은 무릇 밤에 그 진가가 드러나기 마련이란다.”

“……밤에?”

“그럼. 남자는 자고로 허리가 가장 중요한 법이지. 남편이 화정단을 먹은 날과 먹지 않는 날에 느껴지는 사랑은 확실히 달라. 새로운 기술을 배워 온 날과 그렇지 않은 날은…… 말해 무엇하니.”

세뤼아가 의미심장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혹한 표정으로 세뤼아를 바라보던 세이룬은 이내 이성을 찾은 듯 얼른 고개를 저었다.

“……에리카는 저를 그런 상대로 보고 있지 않습니다.”

“너 설마, 너희들 부부라는 거 잊은 건 아니겠지?”

“하, 하지만― 저는 몸만으로 사랑받고 싶은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도 사랑받고 싶은 겁니다.”

단호한 말에, 세뤼아는 한심한 기색을 담은 눈으로 세이룬을 바라봤다.

“아무리 우리 아들이라지만, 어쩜 이리 순진해서야. 몸정이 곧 마음정이 되고, 마음정이 곧 몸정이 되는 법이거늘.”

“……몸정이 곧 마음정이 된다고요?”

“그래. 베갯머리 송사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란다.”

세뤼아가 눈을 가늘게 접어 웃었다. 옅은 달빛이 창 사이로 들어와 빛 자국을 덧그렸다.

잠시 아무 말이 없던 세이룬은 이내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렇다고 해도…… 저와 에리카는 아직 미성년자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지금부터 배워야지. 성인이 되자마자 에리카에게 사랑받아야 하지 않겠니?”

“그런가요……?”

“그럼! 내가 특별히 방중술로 유명한 호혜부인과 석연랑의 춘화를 가져왔단다. 공부해서 완벽히 숙지할 수 있도록 하렴.”

세뤼아는 더없이 해맑은 얼굴로 책상 위에 올려놓은 책 두 권을 가리켰다.

“네가 잘해야 아가가 다른 놈팡이한테 한눈팔 일이 없을 것 아니니.”

“……네, 어머니.”

세이룬은 더없이 진중한 얼굴로 책을 서랍에 잘 갈무리했다. 아들이 투지에 불타는 모습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본 세뤼아는 화제를 돌렸다.

“그리고 아들. 아이테 왕국이 현재 내전 중이라는 건 알고 있지?”

“알고 있습니다.”

세이룬의 얼굴이 사무적으로 변했다.

아이테 왕국은 이렌텔 제국의 동쪽에 위치한 왕국으로, 오래전부터 렌티타 산맥을 사이에 두고 이렌텔 제국과 전쟁을 벌여 왔다.

드레인 공국이 이렌텔 제국의 동쪽인 아이스멜 산과 렌티타 산맥 사이에 자리 잡게 되면서부터 아이테 왕국은 드레인 공국과 끊임없는 마찰을 빚고 있는 실정이었는데, 근래 들어서는 아이테 내부에서 기존의 왕정파와 혁명 세력인 공화정파가 나뉘어 내전을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내가 보기엔 공화정파가 승리할 것 같아.”

다시금 창가에서 바람이 들어왔다. 세뤼아는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갈무리하며 이어 말했다.

“공화정파가 승리한다면, 아이테는 반드시 제국인 이렌텔을 공격하러 올 거야. 국내의 혼란한 민심을 하나로 뭉치는 데는 공공의 적을 만드는 것만 한 게 없으니까.”

“…….”

“특히나 이렌텔은 지리상으로도 멀지 않을 뿐 아니라 황제가 다스리는 제정 국가이지 않니. 이보다 더 써먹기 편리한 전쟁의 명분이 존재할 리가.”

공화정파가 타도한 ‘악’의 세력인 왕정파와 비슷한 유형의 제정 국가. 더구나 그 나라는 몇천 년 전부터 적대국으로 마찰이 잦았던 나라였다.

이보다 더 적합한 공공의 적이 또 있을까.

“하지만 세이룬. 우리 가문과 황가가 맺은 맹약, 기억하지?”

“……네, 기억하고 있습니다.”

세이룬은 무심하게 눈동자를 내리깔았다.

이렌텔 제국이 아직 왕국이었을 무렵, 이렌텔의 왕은 이곳에 놀러온 동방의 용에게 대공이란 지위와 땅을 내어 줄 테니 왕국을 수호해 달라고 부탁했다. 용은 흔쾌히 수락했고, 본인의 가족과 그들을 따르는 수인족들을 이렌텔 왕국으로 데려왔다.

왕은 용에게 넓지만 척박한 동쪽의 땅을 내주었다. 그 땅이 적국인 아이테 왕국과 접한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본디 용족은 천성이 자유로워서 세계를 떠돌아다니며 여행하기를 좋아했다. 하지만 당시 용족은 동방 대륙의 려 제국에만 보금자리를 가지고 있었기에 다른 곳에도 편히 쉴 수 있는 보금자리를 마련하길 원했고, 이렌텔 왕의 제안은 그들에게 굉장히 흥미롭게 다가왔다.

어차피 용족과 수인족은 인간에 비해 전투력이 월등히 뛰어났으므로, 아이테 왕국의 위협 같은 건 큰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이렌텔’을 수호하기로 약조했어. 에리카가 황가와의 전쟁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던데, 드레인 가문은 절대로 황가를 무너뜨려서는 안 돼. 타국의 침략을 이용해서도 안 되고.”

“…….”

“그 점은 절대로 잊지 말렴.”

“알고 있습니다.”

세이룬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물론 그는 에리카가 원하기만 한다면 이렌텔 따위 세계 지도에서 지워 버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잠시 세이룬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세뤼아는 이내 눈을 접어 웃었다.

“하긴, 황가에게 한 방 먹일 방법이 그것만 있는 건 아니니까.”

“…….”

“그나저나 황가와의 전쟁이라니, 너무 흥미진진하구나. 여행 도중에도 가끔 들러서 구경 좀 해야겠어.”

키득키득 웃은 세뤼아가 이내 책상에서 내려왔다. 세이룬의 시선이 세뤼아에게 닿았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십니까.”

“왜, 부러워서 그래? 그럼 너도 얼른 아이를 낳거나 입양해서 대공 위 넘겨 버리고 우리처럼 여행이나 떠나렴. 나는 지금 이날을 대공녀 시절부터 기다려 왔단다.”

대공이란 지위 따위, 정말 지긋지긋한 감옥이나 다름없었지. 덧붙여 중얼거린 세뤼아는 몸을 한 차례 부르르 떨며 창틀 위로 발을 올리려다가 돌연 고개를 돌려 세이룬을 바라봤다.

“아, 세이룬. 언제 한 번 에리카 데리고 려 제국의 저택으로 오렴.”

“려 제국 말입니까?”

“그래. 그곳의 문화는 그 아이한테 익숙한 문화일 테니 좋아할지도 몰라.”

“알겠습니다.”

아이처럼 좋아하는 에리카의 모습을 떠올리자, 세이룬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아들의 웃음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본 세뤼아는 다시 몸을 돌려 곧장 창틀 위로 올라섰다.

“그럼 나중에 보자.”

“몸 건강히 지내셔야 합니다. 아버지께도 인사 전해 주십시오.”

“어차피 오래지 않아 다시 볼 건데, 굳이 인사 같은 거창한 걸 할 필요가 있나?”

“…….”

“알았어, 내가 잘못했어. 인사 전해 줄게. 그렇게 냉담한 눈으로 보지 마.”

“……되도록 에리카에게도 직접 인사해 주십시오. 서운해할지도 모릅니다.”

“알았어, 알았어. 노력할게. 근데 아침에는 가야 한다?”

그렇게 대답한 세뤼아는 곧장 창 아래로 뛰어내린 뒤 한 손을 크게 흔들어 보였다. 세이룬은 멀어지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곧게 응시했다.

옅은 봄바람에 흑빛 머리칼이 길게 너울졌다.

* * *

“자고 있어?”

뒤에서 작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어둠에 물든 에리카의 밀 빛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자네한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창문으로 들어온 세뤼아를 돌아보았다.

“네, 자고 있습니다.”

“누구와는 달리 이런 것도 준비해 주고, 정말 귀염둥이라니까.”

뭐, 자기는 전혀 동의하는 것 같진 않지만. 품에서 에리카가 손수 준비해 둔 편지를 슬쩍 꺼낸 세뤼아는 그 안에 동봉되어 있는 켈타카 은행의 백지 수표를 보고 푸스스 웃었다.

“편지 챙겨 놓은 것도 귀엽고, 시부모님 용돈도 챙겨 주고. 세이룬이나 체사처럼 무뚝뚝하거나 징글징글한 애들만 보다가 이런 말랑말랑한 아가 보니까 너무 소중해, 정말.”

자네한처럼 에리카의 침대에 살짝 걸터앉은 세뤼아는 편지를 다시 갈무리한 뒤 에리카의 손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이건 내가 우리 아가에게 주는 보답.”

촉, 에리카의 손등에 입을 맞춘 세뤼아가 고개를 들었다. 입술이 닿은 에리카의 손등에 보랏빛 작은 장미꽃 문양이 화사하게 피었다가 소리 없이 사라졌다.

“이제 그 누구도 네가 내 며느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못할 거란다.”

세뤼아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때부터, 이걸 얼마나 주고 싶었는지 몰라…….”

에리카는 여전히 새근새근 곤히 자고 있었다. 세뤼아는 에리카의 머리카락을 쓸어 주며 과거를 잠시 떠올렸다.

차가운 삭막함만이 가득했던 위태로운 관계에 그녀가 길을 알려 주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세뤼아는 아들을 영영 잃어버렸을지도 몰랐다.

“……물론, 너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조그만 중얼거림은 허공 속으로 고요히 사그라들었다.

자네한이 세뤼아의 손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세뤼아는 피식 웃으며 맞잡은 자네한의 손등에 쪽 입을 맞췄다.

달빛이 기울며 하늘이 쪽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이윽고 하늘에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을 때, 문밖에서 작은 노크 소리와 함께 타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분 전하, 더 지체하시면 일정이 꼬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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