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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박데기 영애의 반격을 조심하세요 (34)화 (34/139)

34화

구시렁거리는 사이 머리를 다 말린 나는 수건을 베드스툴 위에 걸친 다음, 침대 위에 털썩 누웠다.

“으아, 역시 침대가 최고다…….”

오후 내내 내정 인수인계로 시달렸던 피로가 한순간에 풀리는구나.

나는 살갗에 차갑게 닿아 오는 실크의 매끄러운 느낌을 마음껏 느끼며 열심히 팔다리를 휘젓다가 휙 몸을 돌려 누웠다.

그나저나 오늘은 결혼 후 꼭 일주일 되는 날이었다. 타한이 안내해 준 바에 의하면, 세뤼아와 자네한이 떠나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그동안 자네한 몰래 나와 티타임을 가져왔던 세뤼아도 그렇고, 마지막 인수인계 때조차도 아무 내색 없이 인계와 나 귀여워하는 데에만 집중했던 자네한도 그렇고, 타한이 내일 아침에 두 분이 떠날 예정이라는 걸 미리 귀띔해 주지 않았더라면 떠나는 시간이 다가온 줄도 모른 채 인사도 제대로 못 할 뻔하지 않았는가.

“세계 유람이 무슨 옆 마을에 잠시 놀러 갔다 오는 것도 아니고, 정말 너무하신 거 아닌가…….”

나는 애꿎은 이불을 쥐어뜯으며 볼을 부풀렸다.

원래는 언제 떠날 예정인지 마지막 날 직접 물어보려 했다. 그 이전에 물어보면 괜히 분위기가 어두워질까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막상 마지막 날이 되고 나니, 그때까지도 떠날 생각 같은 건 하나도 없는 것처럼 귀띔조차 없이 태연하기만 한 세뤼아와 자네한을 보고 갑자기 서러움과 반항심이 확 치솟았다.

“앞으로 오랫동안 보지 못할 예정인데, 떠난다는 말 정도는 해 줄 수 있는 거잖아.”

그냥 정말로 작별 인사 없이 이대로 무시해 버릴까 싶다가도, 그래도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가슴을 콕콕 쑤셨다.

‘그래서 탄생한 결과가 이거였지.’

나는 꾸물꾸물 몸을 움직여서 슈미즈 주머니 속에 넣어 놨던 편지를 꺼냈다.

혹시라도 작별 인사를 못 하게 될 경우를 대비해서 마련한 구구절절한 편지와 시부모님께 드리는 여분의 용돈이었다.

‘며느리가 세계 최고 부잔데 시부모님 여행길에 용돈을 안 드린다는 건 말도 안 되지.’

우리 어머님, 아버님이 예전에 가정 폭력을 일삼다가 급기야 엄마를 죽이기까지 했던 그 범죄자 새끼도 아니고 말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킨 뒤, 편지를 근처 협탁 위에 올려놓았다.

“세이룬은 언제 오는 거지…….”

나는 하품을 하며 침대 위로 다시 엎어졌다.

어차피 이렇게 합방하게 된 거, 세이룬과 함께 작별 인사를 어떻게 해야 할지 의논하면 좋을 것 같은데.

“언제 오는 거야…….”

눈을 깜박이는 간격이 점점 느려졌다. 하품이 다시 새어 나와서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얼마쯤 그렇게 멍하니 언제 오냐며 중얼거리고 있었을까. 잠깐 존 것 같았다.

근처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나는 부스스 눈을 떴다.

“세이룬이에요……?”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하품이 치밀어 오른 까닭에, 나는 멍하니 하품을 하며 물었다.

내 물음에 잠시 멈칫하던 세이룬은 이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에리카.”

“좀 늦었네요. 의논하고 싶은 게 있어서…… 기다리다가 자 버렸나 봐요.”

다시금 하품이 나오는 것을 보니, 생각보다 내가 무척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불현듯 품이 허전했다. 나는 힘겹게 손을 뻗어서 머리 위쪽에 있는 베개를 집으려 했다.

아무리 힘껏 손을 뻗어도 잡히지 않아서 인상을 쓰는데, 문득 폭신한 베개가 내 품 안에 쏙 들어왔다.

베개를 한 번 꼭 껴안은 나는 슬쩍 눈을 떴다.

‘잠깐, 눈이 떠진다고?’

“……아. 내가 눈을 감고 있었구나.”

나는 자각 없이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머리의 감각이 매우 둔했다.

편지…… 편지가 협탁 위에 있었지. 입 밖으로 중얼거렸는지 아니면 속으로만 중얼거렸는지 모를 말을 읊조리며 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협탁 쪽으로 향했다.

“……응?”

가다가 길이 막혔다.

멍하니 눈을 끔벅이다가 베개를 턱받침 삼아 고개를 들어 올리자, 세이룬이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베개를 더욱 세게 껴안으며 기울인 고개를 베개 위에 받쳤다.

“세이룬, 왜 여기 서 있어요? 이쪽은 내가 쓰는 협탁이 있는 곳인데.”

“…….”

“표정이 안 좋네……. 혹시 무슨 일 있었어요?”

잠기운이 조금 가셨다.

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세이룬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문득 움찔한 세이룬이 시선을 피하며 한 걸음 물러섰다.

“……아니, 아닙니다.”

“아니면, 어디 아프나?”

안색도 왠지 불그스름한 것 같고 말이지. 심각한 얼굴로 세이룬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간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뻗었다.

손은 손가락만 겨우 세이룬의 이마에 닿았다.

“안 닿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세이룬 앞으로 성큼 다가가 다시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손바닥까지 온전히 세이룬의 이마를 덮을 수 있었다.

“열은 없네. 다행이다.”

얼굴에 자각 없는 웃음이 떠올랐다. 나는 배시시 웃으며 이어 말했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있으면 곧장 말해 줘야 해요. 그래야 바로 손을 쓸 수 있으니까.”

그러고는 그대로 협탁을 향해 몸을 틀었다.

아니, 틀려고 했다.

“……에리카.”

팔이 잡혔다. 그것을 인지하기도 전에 몸이 휙 뒤로 넘어갔다.

폭, 소리와 함께 나는 어느새 침대 위로 쓰러져 있었다.

나는 놀라서 눈만 멀뚱히 껌벅거렸다. 안고 있던 베개는 다른 곳으로 떨어진 지 오래였다.

세이룬 특유의 달콤한 향기로 정신이 아득했다.

“……세이룬?”

뭐지 이 상황.

왜 세이룬이 내 위에서 나와 몸을 겹치고 있는 거지.

‘설마…… 내가 그새를 못 참고 순진한 세이룬에게 작업 걸고 있는 건가?’

잠으로 둔해진 머릿속은 그런 생각마저 떠올렸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 상황이 도저히 이해 가지 않았으니까.

‘안 돼, 세이룬! 당신 도망가야 해!’

경악한 나는 나의 삿된 욕망으로부터 세이룬을 구출시키기 위해 얼른 입을 열었다.

그리고 멍하니 탄성을 흘렸다.

“예쁘다…….”

사람이 어쩜 이리 예쁠 수가 있지.

옥처럼 고운 얼굴 위 오뚝하게 세워진 코, 그 밑에 고혹적으로 자리한 붉은 입술.

내 위로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은 비단 자락처럼 매끄러웠고, 눈가를 덮은 하얀 눈가리개는 가리개를 풀어서 그 속에 감춰진 그의 눈동자를 보고 싶게끔 하는 충동이 들도록 만들었다.

“……너무 예뻐.”

나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바로 지척에 있던 세이룬의 뺨에 손가락이 닿았다.

“이래서 경국지색이란 말이 있는 거구나…….”

나는 내 삿된 욕망으로부터 세이룬을 구출 어쩌구를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날려 버린 채 그의 미모를 홀린 듯이 감상했다.

뺨을 쓸어 가던 손가락이 느릿하게 내려가 입가에 닿았다. 붉은 입술이 움찔거렸다.

‘이 입술에 입을 맞추면 어떤 느낌일까…….’

잠에 취한 머리 한구석에서, 문득, 그런 궁금증이 불쑥 떠올랐다. 나는 허공을 걷는 듯한 멍한 감각 속에서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손가락이 입술에 닿았을 때, 불현듯 어딘가에서 뭔가가 우지끈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죄, 죄송…….”

입술을 바르르 떨던 세이룬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들었다. 나는 재빨리 정신을 주워 챙긴 다음 그를 따라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나도 모르게 세이룬이 너무 예뻐서 그만! 불쾌했다면 미안해요, 다른 사심은 없었어요! 전 정말로 순수하게 미모를 감상했을 뿐이에요. 진짜!”

나는 다급히 변명을 늘어놓았다.

내 변명이 효과가 있던 것인지 세이룬이 멈칫했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허공을 이리저리 배회하던 그가 천천히 나를 보았다.

상처받은 기색이 역력한 표정이었다.

그 표정을 보고 나는 깨달았다.

‘아, 씨알도 먹히지 않았구나.’

하긴, 내 시선에 타르 같은 질척이는 욕망이 그대로 묻어났을 텐데 어떻게 속을 수 있을까. 세이룬은 지금 내가 자신한테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상처받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사실대로 ‘당신의 예쁜 입술에 내 입술을 문대고 어쩌구 저놈의 가리개를 뜯어서 예쁜 눈을 보고 저쩌구 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그건 절대로 안 돼.’

내 입으로 ‘나는 변태요’하고 변밍아웃 할 일 있나! 나는 다시 한번 되지도 않는 변명을 지껄일 생각으로 입을 열었다.

“저기, 세이룬…….”

“정말, 정말로…… 정말로 죄송합니다……!”

내가 다시 입을 열자마자 흠칫한 세이룬이 허둥지둥 외친 후 도망치듯 방을 나섰다.

콰앙― 하고 문이 닫혔다.

얼마나 당황하고 속상했으면 문을 닫는데 집 무너지는 소리가 다 날까. 나는 허망한 얼굴로 멍하니 닫힌 문을 바라봤다.

“하…… 망했네. 어떻게 변명하지.”

나는 멍하니 중얼거리며 침대 위로 풀썩 누웠다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야. 침대는 또 왜 맛이 갔어.”

나는 한쪽 가장자리가 내려앉은 침대를 심각하게 바라보다가 죄인의 얼굴로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미자에게 흑심을 품은 나는 잠도 편히 자지 말라는 계시인가…….”

나는 참회하는 얼굴로 다급히 들어오는 사용인들을 바라봤다.

‘이 오밤중에 정말 미안하다.’

그래도 나 악덕 상사 아니라고 내심 자부하고 있었는데, 제대로 악덕 상사 돼 버렸네.

나는 허겁지겁 달려온 포카와 레비나의 안내에 따라 대공비의 침소로 돌아갔다.

세이룬과 의논은 개뿔, 결국 세뤼아와 자네한을 작별 인사 없이 떠나보내고 말았던 건 덤이다.

* * *

“……다 틀렸어.”

세이룬은 불도 켜지 않은 집무실로 들어가 눈가리개를 벗어 던졌다.

고작 숨결이 섞이고 손가락이 입술에 닿았다는 것만으로 심장이 쿵 떨어져서 도망쳐 버렸으니, 유혹은커녕 웃음거리만 됐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도망치지 않았으면 나도 내가 무슨 짓을 했을지 잘 모르겠는걸…….’

세이룬은 침울한 얼굴로 책상에 머리를 박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2단계에서 멈추는 편이 더 나았을까.”

에리카에게 웃음거리가 된 것은 참을 수 있었다. 자신으로 인해 그녀가 웃을 수 있다면 그는 괜찮았으니까.

하지만 그가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은, 그저 순수하게 자신의 얼굴을 보고 감탄한 에리카를 상대로 그녀가 알면 경멸할지도 모를 일들을 상상한 자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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