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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박데기 영애의 반격을 조심하세요 (33)화 (33/139)

33화

* * *

방으로 돌아온 나는 곧장 편지 안에 있던 후원 양식 서류를 꺼내서 채워 넣었다.

서류를 반절 정도 채워 넣었을 때, 똑똑하는 소리와 함께 타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전하, 집사 타한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응, 들어와.”

달칵, 문이 열리고 타한이 단정한 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내 책상 한쪽에 자네한이 보냈을 것이 분명한 내정 관련 서류를 올려놓은 타한은 이어 내 앞으로 서신 하나를 건넸다.

고급스러운 겉봉에는 켈타카 은행에서 보냈다는 문구가 멋들어지게 적혀 있었다.

그러니까, 이 서신은 켈타카 은행장에게서 내 말을 전해 들은 빈센트가 내게 보내는 답신이었다.

“비전하께 수신된 서신입니다.”

“아…… 고마워.”

나는 서신을 건네받으며 타한을 향해 빙긋 미소 지었다. 타한은 왠지 귀여운 손주를 보는 할아비의 얼굴로 나를 잠시 바라보다가 정중하게 인사한 뒤 집무실을 나갔다.

타한이 나간 후, 나는 서류를 한쪽으로 정리한 뒤 빈센트에게서 온 서신을 펼쳤다.

그는 과연 내 제안을 받아들였을까, 아니면 납치라는 번거로운 절차를 거치려고 할까. 나는 진중한 얼굴로 서신을 찬찬히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오글거림을 버티지 못하고 서신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뭐? 마음씨가 따뜻? 마음고생이 심해? 다정한 성정?”

빈센트의 사람 보는 눈이 이렇게까지 틀려먹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앞으로 인사 관련 처리할 때 빈센트의 의견은 절대로 반영하지 말아야겠다.’

다시 서신을 집어 들기가 두려웠다. 나는 양팔 양다리에 쫙 돋아난 소름을 문지르며 고개를 저었다.

현실을 부정하고 싶다는 염원이 불러낸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손가락 발가락을 비비 꼬며 난리 부르스를 치던 나는 심호흡을 하며 겨우 정신을 붙들었다.

“괜찮아, 괜찮아, 에리카……. 뭐가 괜찮은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괜찮아.”

나는 정좌 자세로 자기 세뇌를 한 뒤, 경건한 마음으로 서신을 내려다봤다.

“그래, 중요한 건 빈센트가 내 권유를 승낙해 줬다는 거지.”

서신 내용의 90% 가까이를 차지하고 있는 아부성 미사여구는 스킵해도 무관했다.

‘그럼 빈센트가 에이리트에서 출발하는 일정을 대략 한 달 뒤로 잡으면 되겠네.’

그렇게 생각한 나는 떠올리기만 해도 소름 끼치는 글자들을 당장 눈앞에서 치워 버리려다가, 순간 멈칫했다.

잠깐만.

‘이거, 잘하면 써먹을 수도 있겠는데?’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는 속담이 있다.

다시 말해, 개똥 같은 게 약으로 쓰일 때도 있다는 말씀!

나는 절로 곱아 들려는 손가락과 발가락을 억지로 펴면서 빈센트의 서신을 찬찬히 훑었다.

이 중에서 가장 많이 쓰인 수식어는 ‘마음씨 고운’이었다.

“그러니까, 빈센트 눈에는 내가 마음씨 곱고 상냥한 사람으로 보인다는 거지?”

저를 그렇게 부려 먹은 내가 이렇게 보인다니, 정말 놀랄 노 자가 아닐 수 없다.

나는 눈을 흐리게 뜨면서 과거 드물게 참석했던 연회나 티파티에서 내가 어떤 이미지였는지를 되짚었다.

‘가로수 1, 이름 모를 꽃 4, 나무 2, 뭉게구름 5……. 한마디로, 대충 비중 없는 조연 역할.’

그리고 항상 선한 웃음을 곁들이곤 했지.

나는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고로 거짓말은 일관성이 가장 중요한 법. 그건 사기극도 마찬가지였다.

“좋았어. 답답할 정도로 착한데 소심하기까지 한 천사병 인간 해야겠다.”

소심하고 여리면서 무지하게 착한 사람은 경계 대상에서 제외된다.

안 그래도 드레인 대공가는 그 자체만으로 경계 대상인데, 곧 해수라는 정체를 드러낼 나까지 굳이 경계를 긁어모을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연기하는 편이 셀루리아 사람들을 엿 먹이기 더 수월하니까.’

후에 있을 거사를 위해서라도, 그 이전까지의 평판은 최대한 좋게 유지하는 편이 좋았다.

하지만 거사의 밑밥을 깔아 놓을 때까지 셀루리아 사람들과 아예 안 부딪칠 수 없을 텐데, 그때마다 대놓고 평판을 깎아 먹을 수는 없는 노릇.

이럴 때 필요한 것이 일명 ‘얌체 짓’인 거지.

‘또, 내가 여리고 소심하고 답답할 정도로 착한 사람이어야 날파리들을 구별하기 쉬우니까.’

내가 날파리 알레르기가 있어서 말이지.

“좋아, 앞으로의 행실은 천사병으로 결정 났고.”

나는 거하게 숨을 내쉬며 등받이에 등을 기댄 뒤 천장을 바라봤다.

“거사라…….”

나는 멍하니 중얼거리다가 팔짱을 꼈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말로만 황가를 친다고 했지, 구체적인 계획을 생각해 본 적은 없는 것 같았다.

‘최대한 황가와는 얽히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셀루리아를 공격하려면 황가와 싸울 수밖에 없으니까.’

드레인 대공가는 군력에 있어서 1인자라고 해도 무방했다.

황가는 그런 대공가를 늘 경계하고 있을 테고, 드레인이 셀루리아를 공격한다면 멍청이가 아니고서야 이 좋은 명분을 그냥 날려 보낼 리 없었다.

결국에는 반드시 황가와 갈등을 빚게 될 텐데, 그렇다고 황가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역성혁명은 반드시 나라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 테고, 그것이 가져오는 혼란은 차원을 달리한다.

그리고 그걸 수습하는 것은 드레인 가문의 몫이 되겠지.

“미쳤어? 내가 왜 그딴 짓을 해.”

나는 온몸을 부르르 떨며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바라는 것은 복수 후 만끽하는 자유롭고 행복한 삶이지, 절대로 소처럼 죽을 때까지 일만 하다가 뒈지는 고위 공무원의 삶이 아니었다.

그래도 나한테는 최소한의 양심이란 게 있었다. 적어도 내가 싼 똥을 다른 사람에게 치우라고 하는 몰염치한 짓은 하지 않았다.

‘그러니, 내가 싼 똥을 최대한 덜 치우기 위해서는 똥을 최대한 덜 싸는 수밖에…….’

일단, 가장 중요한 것은 황가를 교체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것만 지켜도 사람들의 혼란은 훨씬 줄어드니까.

“그러고 보니 지금 황실에…… 그림자 취급받는 황자가 한 명 있었지?”

사피엔 르 이렌텔.

푸른 머리카락에 금색 눈동자를 가진, 평민 신분의 하인과 현 황제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 황자.

백치 같을 정도로 순진하고 멍청해서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사람.

그 와중에 존재감조차 매우 옅어서, 사피엔 황자는 몇십 년 뒤에 황궁의 골방에서 늙어 죽은 채 발견되는 것이 아니냐는 소문까지 귀족들 사이에서 왕왕 돌 정도였다.

‘그러니까, 차후 황제가 될 칼릭스 황태자에게 제거조차 당하지 않을 만큼 무가치하다는 소리지.’

그런데 그거 아는가?

때로는 저렇게 극단적으로 무해해 보이는 사람들이 훨씬 유해하다는 사실을?

사람 중에는 웃는 얼굴로 복수를 꿈꾸고 있는 사람이 가장 무서운 법이다.

흥선대원군이 괜히 심심해서 초상집 개 노릇을 하고 다녔던 게 아니란 말씀.

‘신아는 칼릭스의 설정을 짤 때 폭군으로 살해될 운명을 심어 놓았지.’

그렇다면 칼릭스를 살해할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답은 불 보듯 뻔하지 않은가.

나는 하르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남주와 여주가 사랑하기도 바쁜데 왜 주인공들과 관련되지도 않은 그런 무거운 설정으로 주위를 번다하게 만들어 놓냐고 물어본다면, 그건 신아가 소설을 쓰려 했던 목적이 ‘정치와 종교의 상호관계성(줄여서 정.종.상)’이란 전공 수업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함이었다고 대답할 수 있겠다.

뭐라더라. 책을 읽는 것은 완성된 사람을, 대화를 하는 것은 영리한 사람을, 글을 쓰는 것은 정확한 사람을 만든다고 했던가?

‘나를 이곳에서 억만장자로 만들어 주었던 신아의 그 완벽주의 성격이 발동하셨던 게지.’

베이컨의 그 명언에 꽂힌 신아는 전공 수업을 이해하는 데 필요하지만 머리엔 잘 들어오지 않은 유럽사 중 일부를 가져다가 소설을 쓰기로 했고, 소설 쓰기에 흥미를 붙이기 위해서 자신이 좋아하는 장르를 채택했다.

소설을 쓰려면 설정을 구상해야 하고, 그러려면 필히 관련 역사를 공부해야 할 테니까.

누가 과 수석 아니랄까 봐 티엠아이 하나하나까지 꼼꼼하게 신경을 쓰신다.

“결국 설정만 짜다가 나가떨어졌지만…….”

그리고 목표였던 유럽사도 뭐, 설정 짜면서 원형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변형됐지만. 나는 눈을 흐리게 뜨며 중얼거렸다.

“하긴,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된다고 했으니까.”

소설을 쓰고 안 쓴 게 중요하냐. 배경 짜면서 필요한 내용을 공부했다는 게 중요하지.

‘아무튼, 그 ‘정.종.상’은 학점 잘 나왔을지 궁금하네.’

나는 찌뿌둥한 몸을 위해 쭉 기지개를 켰다. 물론 신아의 두뇌라면 그깟 티엠아이 정보 없이도 학점은 충분히 잘 나왔을 것이다.

“문제는 나지. 구밀복검하고 있는 사생아 황자님하고 딜을 맺어야 하는 나지…….”

사피엔 황자하고 손을 잡아야만 나는 셀루리아와 황가를 물리치고 나서도 사피엔을 황위에 앉힘으로써 똥을 덜 치울 수 있었다.

그리고 사피엔 황자는 똑똑한 사람이니 황위에 앉혀 놓기만 하면 알아서 나라의 혼란을 잘 수습하고 나라를 잘 다스리지 않겠는가.

똑바로 서서 보나 물구나무서서 보나, 사피엔과 손을 잡는 것이 훨씬 이득이라는 건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문제는, 어떻게 저 경계심 많은 황자님과 딜을 맺냐는 거지…….”

나는 흐어어 소리를 내며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난 그냥 작곡을 좋아하는 음대생이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돼 버린 걸까.

“망할 셀루리아, 빌어먹을 카리에. 저 새끼들만 아니었어도 나는 샤샤와 함께 행복한 프리 라이프를 즐기는 억만장자가 됐을 텐데…….”

감히 샤샤를 건드리고 나를 이렇게 고통스럽게 만들다니. 나는 옆에 놓여 있는 다 식어 버린 차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그래. 저 자식들을 갈아 버리기 위해서라면, 사피엔과 딜 좀 하는 거?

못 할 것도 없지.

* * *

예의 세이룬의 괴이한 일 세 번째는 정확히 이틀 뒤, 일주일마다 한 번 있는 합방일에 일어났다.

“미자끼리 뭘 할 수 있다고 굳이 합방일을 챙겨. 가림막이 이토록 굳건할 바에야 그냥 성인 될 때까지 미루는 게 낫지.”

너무나도 비효율적인 시스템이지 않은가. 나는 낮은 목소리로 투덜거리며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말렸다.

원래 내 시중을 들어주던 포카와 레비나는 오랜만인 두 분 전하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다면서 먼저 퇴근해 버렸다.

‘거참, 일찍 퇴근하고 싶다면 그냥 그렇다고 말하지. 나 그렇게 쪼잔한 상사 아닌데…….’

괜히 내가 악덕 상사가 된 것 같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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