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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박데기 영애의 반격을 조심하세요 (32)화 (32/139)

32화

“1단계도 실패했는데, 2단계를 잘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나.”

세이룬의 무른 면모에 그새 익숙해진 포카와 레비나는 서둘러 고개를 내저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니요, 전하! 당연히 잘하실 수 있어요!”

“오히려 존댓말로 하는 게 갭이 있어서 더 설렐지도 몰라요……!”

“더 설렌다고……?”

세이룬이 조금 기대하는 얼굴로 그들을 돌아봤다.

포카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시를 보여 드릴게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포카가 옆에 서 있던 레비나를 벽에 확 밀치고는 곧장 레비나의 얼굴 옆 벽에 한 손을 짚어 빠져나가지 못하게 가로막았다.

그러고는 다른 손으로 레비나의 턱을 잡아챈 뒤 시선을 맞추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넌, 나만 바라봐야 해요.”

“…….”

“전하, 이렇게 하시면 돼요. 간단하죠?”

언제 박력이 넘쳤었냐는 듯, 포카는 금세 해맑은 표정으로 돌아와 세이룬을 돌아봤다.

세이룬은 조금 떨떠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렇게 하면…… 정말 부인님을 유혹할 수 있다고?”

“네, 그럼요……!”

“벽쿵! 그리고 나를 내려다보는 그윽한 눈빛! 차갑고 도도한 남자가 내게만 내보이는 짙은 소유욕! 거기에 나는 심쿵사!”

“…….”

솔직히, 세이룬은 위압적으로 상대를 압박하는 행동이 대체 뭐가 설렌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에리카의 직속 하인 둘이 저렇게 눈을 빛내면서 설렌다고 하지 않은가.

‘……여자의 마음은 여자가 가장 잘 안다고 했으니까.’

세이룬은 마음을 다잡고 2단계의 성공을 위해 피나는 연습을 시작했다.

* * *

두 번째 일은 이틀 뒤, 내가 포카와 레비나를 데리고 해사원을 산책하고 있을 때 일어났다.

“에리카.”

성벽을 고풍스럽게 감싼 장미 넝쿨을 보며 감탄을 연발하던 나는 맞은편에서 마주친 세이룬을 보고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세이룬! 오랜만이네요.”

“……오랜, 만입니다.”

세이룬은 이번에도 굉장히 긴장한 듯한 기색이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슬쩍 팔짱을 꼈다.

“오늘은 꼭 세이룬이 제게 하고 싶은 말을 들었으면 좋겠네요.”

“…….”

입술을 깨물며 안절부절못하던 세이룬은 이내 결심한 것처럼 고개를 들고 나를 곧게 응시했다.

“에리카.”

“네, 말씀…… 세이룬?”

순간, 세이룬이 내 쪽을 향해 성큼 다가왔다.

그의 그림자가 내게 온전히 드리웠다. 그의 상체가 내 쪽으로 천천히 기울기 시작했다.

‘……?’

예상치 못한 그의 행동에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던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세이룬!”

나는 곧장 손을 뻗어서 세이룬을 밀쳤다. 놀라서 빳빳하게 굳은 세이룬은 그대로 뒤의 아름드리나무로 밀쳐졌다.

세이룬의 앞을 가로막은 뒤 한 손을 나무 몸통에 짚은 나는 심호흡을 하며 놀라서 쿵쿵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지금, 지금 뭐 한 거예요.”

“죄, 죄송……”

“벽이 온통 장미 넝쿨 천지인데! 방금 저기에 손바닥을 짚으려고 했잖아요!”

설마 벌써 닿은 건 아니겠지?

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세이룬의 손을 살폈다. 다행히 닿은 건 아니었는지, 굳은살이 박인 커다란 손은 가시 흔적 없이 깨끗했다.

“하, 다행이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잡고 있던 손을 놓으려 했다.

닿았던 손이 떨어지려는 순간, 세이룬이 잽싸게 내 손을 다시 잡아 왔다.

“세이룬?”

의아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는데, 문득 세이룬의 시선이 내 턱에 닿았다.

물론 눈을 가리개로 가려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고개가 숙여진 각도로 보건대 내 턱을 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뭐 묻었어요?”

나는 주춤하며 잡힌 손의 반대편 손으로 턱을 만지작거렸다.

뭐가 묻은 것 같지는 않은데.

“……에리카.”

입술을 파르르 떨던 세이룬이 나를 불렀다. 나는 눈을 흐리게 뜨며 그를 바라봤다.

본론 없이 내 이름만 지금 몇 번째로 부르는 건지. 이쯤 되면 흐린 눈 뜰 때도 됐잖아?

하지만 잔뜩 긴장한 세이룬은 내 시선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그 모습에 나는 더욱 눈을 가늘게 떴다.

‘아니, 진짜 뭔데. 대체 왜 긴장을……’

그때였다.

스윽.

세이룬이 떨리는 두 손으로 내 턱을 살포시 들어 올렸다.

저 가리개가 없었다면, 아마 눈이 마주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 만큼, 나는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저만……, 바라봐 주십시오.”

“네?”

나는 멀거니 눈을 깜박였다. 순식간에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세이룬이 푹 고개를 숙였다.

“……이게 아닌데…….”

이번에는 똑똑히 들렸다.

방금, ‘이게 아닌데’라고 한 거. 맞지?

“풋.”

어쩔 수 없이 웃음이 나왔다.

그러니까, 지금 귀여운 재롱 부리려고 그렇게 긴장했다는 말이잖아.

나도 손을 뻗어서 세이룬처럼 두 손으로 그의 턱을 들어 올렸다.

“……에리카?”

“세이룬. 아까 나한테 당신 봐 달라고 했죠?”

슬쩍 내 눈치를 보듯 머뭇거리던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의 코를 톡톡 두드리며 덧붙였다.

“세이룬이 내 눈 닿는 곳에 있으면, 언제든 돌아볼게요.”

“……!”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발갛게 달아올랐다.

잠시 그대로 빳빳하게 굳어 있던 세이룬은 이내 조심스럽게 자신의 손을 내 두 손 위에 겹쳤다.

“약속, 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깟 약속 좀 못 해 줄까. 나는 속으로 우쭈쭈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세이룬의 얼굴이 막 환해졌을 때였다.

하인 한 명이 이쪽으로 다가와 나와 세이룬에게 예를 올린 뒤, 나에게 서신을 하나 건넸다.

“신교의 신전에서 도착한 서신입니다, 비전하.”

“아, 고마워.”

나는 곧장 서신을 받아 들었다. 안에는 후원에 감사한다는 답장과 함께, 후원에 대한 정보를 적는 구체적인 양식이 담겨 있었다.

내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그려졌을 때였다.

“아가씨, 피곤하시죠?”

포카가 내게 권유했다. 옆에 있던 레비나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 돌아가서 쉬시는 게 어떠세요? 저희가 맛있는 차와 과자 가져다드릴게요……!”

“음, 그럴까?”

마침 산책을 마칠 시간이기도 했거니와, 후원에 대한 양식이 담긴 서류를 채워야 하기도 했다. 절대로 먹을 거에 혹해서 그런 게 아니다.

“그럼 세이룬, 나중에 봐요.”

머뭇거리던 세이룬이 이내 힘없이 “네, 부인님……”하고 마주 인사해 왔다.

그 모습이 나와 헤어지게 되어서 시무룩한 것처럼 보인다면, 착각일까?

‘저렇게 행동하니까 세이룬이 정말로 나를 좋아하는 것 같잖아.’

만난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은 사람을 저렇게 티가 날 정도로 좋아한다니, 가당키나 한 말인가.

나는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방으로 돌아왔다.

* * *

세이룬은 밝은 얼굴로 집무실에 돌아왔다.

에리카와 헤어져서 시무룩했던 마음도, 에리카가 제게 해 준 약속을 떠올리자 조금씩 흩어져 갔다.

에리카의 눈이 닿는 곳에 있으면 그녀는 언제나 저를 돌아봐 주겠다고 약속했다. 자신은 언제나 에리카 곁에 있을 예정이니, 그 말은 곧 에리카는 언제나 저를 돌아봐 준다는 것을 의미했다.

“언제나…….”

섬세하게 세공된 유리 공예품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중얼거리던 그가 다시금 웃었다. 행복해서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때, 집무실 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세이룬은 웃음을 지울 생각도 하지 않고 출입을 허락했다.

“들어오도록.”

“대공 전하……!”

활짝 웃으며 들어오던 포카와 레비나가 세이룬의 입가에 걸린 웃음을 보고 못 볼 것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흠칫 몸을 떨었다.

아무리 조금쯤 주인의 무른 면모에 익숙해졌다고 하더라도, 주인의 웃는 얼굴이 익숙해진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추, 축하드립니다, 전하…….”

잔뜩 쪼그라든 포카와 레비나가 쭈뼛쭈뼛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그 어색해하는 모습은 보이지도 않는지, 입가의 미소를 지울 생각도 하지 않는 세이룬이 행복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귀한 약속을 얻어 낸 데는 그대들의 공로가 커. 그 공로를 치하하고 싶으니,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하도록.”

“아, 아닙니다, 전하!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걸요.”

“맞아요. 저희는 괜찮습니다!”

화들짝 놀란 포카와 레비나가 서둘러 고개를 내저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세이룬이 입을 열었다.

“해야 할 일을 한 거라고 해서 치하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 부담 없이 원하는 것을 말하도록 해.”

그 말에, 일순 멈칫한 포카와 레비나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검은색 눈동자와 붉은색 눈동자가 욕망을 머금고 반짝 빛났다.

잠시 뒤, 두 사람 중에서 먼저 포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부디 만일의 경우에도 인사 변동 없이 계속 직속 하인으로서 비전하를 모실 수 있도록 해 주세요.”

“저도 포카와 원하는 것이 같습니다. 앞으로도 평생 비전하 곁에서 비전하를 모시고 싶어요…….”

레비나의 말을 끝으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세이룬은 진중한 시선으로 제 앞에 선 포카와 레비나를 꼼꼼히 살피며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생각과 판단을 마친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부인님께서 직속 하인의 교체를 원하시지 않는 한, 그리하도록 하겠다.”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대공 전하!”

주인에게서 떨어진 허락의 말에, 포카와 레비나가 활짝 웃으며 기뻐했다.

그 반응에서 에리카가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지를 확인한 것 같아 세이룬은 저가 더 뿌듯해졌다.

그는 다시금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가, 이내 표정과 분위기를 무겁게 바꾸며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그 책의 다음 단계는 뭐지?”

세이룬이 제 앞을 가로막는 것은 뭐든지 베어 버리겠다는 얼굴로 포카와 레비나를 바라봤다.

비록 책에 나와 있는 모범만큼 2단계를 제대로 실행하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에리카는 ‘곁에 있으면 언제든 돌아봐 주겠다’고 약속해 주었다.

분명, 이 유혹은 효과가 있었다.

세이룬의 말에, 레비나가 군수 회의를 하듯 진지한 표정으로 가져온 책을 펼쳤다. 포카 역시 진중해진 얼굴로 나직이 입을 열었다.

“다음 단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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