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드레인 대공가는 건국 초기부터 이렌텔의 동쪽에서 이렌텔을 지켜온 명문가였다.
그런 대공가에서 신교의 구호 활동에 후원해 준다면, 분명 신교의 위상은 올라가리라.
바네사는 혹시 서신에서 의도를 읽을 수 있을까 싶어 글을 훑었다. 정갈한 필체로 적힌 미사여구 가득한 서신에서는 상대의 의도를 짐작할 수 없었다.
‘저쪽에서 신교를 이용하려 하는 것이라면, 이쪽도 똑같이 상대를 이용해 주면 돼.’
바네사는 서신을 곱게 갈무리한 뒤, 다시 아이들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저 아이들에게 더 나은 삶을 주기 위해서라도, 후원은 받는 것이 더 나았다.
* * *
“유혹…… 이요?”
한동안의 침묵 끝에, 입을 연 것은 포카였다.
세이룬은 경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시는 나를 떠날 생각 같은 건 하지 않도록 부인님을 유혹하고 싶다. 너희는 부인님 곁에서 일거수일투족을 시중드는 자들이니, 너희라면 뭔가 방법을 알 것 같아 불렀다.”
“비, 비전하께서 떠나고 싶어 하시나요?!”
포카와 레비나가 다급하게 물었다.
지레 놀란 세이룬은 순간적으로 움찔했다가 이내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냥…… 나를 사랑하시게 되면, 그 무슨 이유로도 나를 떠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
“그뿐이다.”
그러니 적어도 지금은, 나를 떠나고 싶어 하지 않아. 세이룬은 자신을 세뇌시키듯 작게 뇌까렸다.
잠시 머뭇거리던 레비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어…… 전하. 저에게 전하께 도움이 될 만한 책이 하나 있습니다.”
“책?”
세이룬의 눈이 반짝 빛났다.
레비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인 다음, 제 처소에서 잽싸게 책을 가져왔다.
“이 책이에요.”
레비나가 수줍게 웃으며 책을 내밀었다.
책을 받아 든 세이룬은 겉면을 훑어봤다. ‘여자들을 설레게 하는 남자가 되는 법: 차가운 북부대공st’란 제목이었다.
책의 제목을 본 포카가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와! 전하께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아요!”
“……그런가?”
“네! 이거라면 분명 비전하께서도 전하의 매력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실걸요!”
부인님을 가장 지척에서 모시는 두 사람이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라면, 에리카를 유혹할 수 있어.’
세이룬은 비장한 얼굴로 책의 표지를 넘겼다.
* * *
“빈센트 하르센 님, 안내 도와드리겠습니다.”
빈센트의 신분을 확인한 은행 직원이 부드럽게 말했다. 빈센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직원을 따라갔다.
오늘 퇴근 무렵, 켈타카 은행에서 서신 하나가 도착했다. 금고에 문제가 생겼으니 잠시 방문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하르센 남작 가문은 구교파에 속하기는 하지만 소귀족이었기에, 빈센트는 직접 재산을 관리하는 대신 전문적으로 재산을 관리해 주는 은행을 이용하고 있었다.
‘여태껏 재산을 보관만 해 왔던 터라 사소한 문제 하나 생기지 않았었는데, 갑자기 금고에 문제가 생겼다니.’
빈센트는 의아한 마음을 내리누르면서 직원이 안내해 준 응접실 안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십니까, 하르센 남작님.”
안으로 들어서자, 빈센트를 기다리고 있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자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맞이한 남자는 50대 초반으로 보였는데, 갈색 머리카락을 뒤로 깔끔하게 넘겨서 단정한 인상을 풍겼다.
“저는 켈타카 은행의 은행장, 베르헨 말론입니다.”
“……네?”
마주 인사하려던 빈센트는 딱딱하게 굳었다.
갑자기 은행장이 자신을 만나러 오다니?
멈칫하는 빈센트의 기색을 알아차린 은행장은 별다른 첨언 없이 들고 있던 서신을 그에게 건넸다.
“드레인 대공비 전하께서 남작님께 보내신 서신입니다.”
“비전하께서, 왜 은행장님을 통해 제게 서신을……?”
은행장은 대답 대신 서신을 눈짓했다. 빈센트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서신을 내려다봤다가, 천천히 펼쳐 들었다.
서신에는 여태껏 그가 몰랐던 많은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에리카가 그에게 부탁해서 짧게 외출했던 것들이 실은 재산을 만들기 위해서였다는 것, 해수가 실은 에리카였다는 것, 그녀는 곧 셀루리아 가문을 상대로 복수를 시작할 예정이라는 것 등등.
충격적인 이야기의 말미에는, 그 복수에 자신이 휘말릴까 걱정되므로 대공령에 와서 자신의 보좌관이 되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글이 적혀 있었다.
‘……셀루리아 가문을 금전으로 압박했던 해수가 실은 에리카 아가씨였다니.’
에리카가 외출을 시작했던 것은 2년 전부터였다.
설마 그녀는 지금껏 가문에게 휘두를 칼을 가슴속 깊이 묻어 둔 채 여리게 웃고 있던 것이었나.
몇 번을 읽어도 가시지 않는 충격에 빈센트는 서신을 쥔 손을 바르르 떨었다.
‘아직 성년도 되지 않은 어린 아가씨인데…….’
고통받기에도 버거울 나이에, 뒤에서 이 모든 것을 계획한 것도 모자라 차근차근 실행하고 있었다니.
빈센트는 순간 가슴이 미어져 와 잠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후작저에서 구박받는 무일푼 영애가 억만장자로 이름을 날리기까지 얼마나 우여곡절이 많았을까.
고작 보좌관에 불과한 자신이 걱정된다는 이유로 이런 서신을 보내올 만큼 마음씨 따뜻한 아가씨인데, 제 외숙부를 상대로 복수를 실행하기까지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하셨을까.
“……답장을, 보내고 싶습니다.”
빈센트는 잠겨 드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은행장은 짧게 고개를 끄덕인 뒤, 미리 준비해 두었던 종이를 빈센트에게 건네주었다.
일찍 부모님을 여읜 빈센트는 어려서부터 할리아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격이 떨어진다며 저에게 관심조차 두지 않았던 펠리페와는 달리, 신분에 구애받는 성정이 아닌 할리아는 빈센트를 친동생처럼 아끼며 보살펴 주었다. 부모님에게 느낄 온정을 할리아에게서 대신 느꼈던 빈센트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에리카를 결코 배신할 수가 없었다.
빈센트는 에리카가 바라는 대로 대공성에 가기로 결정을 내렸다.
* * *
첫 번째 일은 내가 집무실에서 자네한이 내 준 과제를 수행하고 있을 때였다.
“음? 세이룬, 무슨 할 말 있어요?”
나는 내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온 세이룬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물음에, 어깨를 움찔하던 세이룬은 어딘가를 흘긋했다.
어디를 보는 거지? 집무실 안에 찾는 거라도 있나?
뭔지 궁금해서 나도 세이룬의 고개가 향한 곳을 따라 시선을 옮기려는데, 돌연 숨을 깊게 들이쉰 세이룬이 다시 나를 응시했다.
“―에리카.”
그가 비장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다시 그에게로 시선을 돌린 까닭에, 옆에서 ‘화이팅!’하듯 두 주먹을 불끈 쥔 포카와 레비나를 보지 못한 나는 생긋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세이룬.”
“―그…….”
“…….”
“…….”
“……세이룬?”
세이룬이 한참을 지나도 말하지 않자, 나는 의아한 얼굴로 그를 불렀다.
세이룬은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입술을 깨물다가, 이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에리카.”
“네.”
“……에리카…….”
“네, 세이룬. 말씀하세요.”
나는 의구심 가득한 얼굴로 세이룬을 바라봤다.
세이룬은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더니, 급기야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려 버렸다.
“……도저히 못 하겠습니다. 반말, 그거…… 대체 어떻게 하는 겁니까…….”
“네? 세이룬, 잘 못 들었어요. 다시 말해 줄래요?”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웅얼거린 탓에 말을 절반 넘게 알아듣지 못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을 돌아서 세이룬에게로 걸어갔다.
“뭘 못 하겠다고 했던 거예요?”
나는 팔짱을 낀 채 눈을 가늘게 뜨며 세이룬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뭔데. 대체 뭐길래 이렇게 끙끙거리고 있는 건데.
얼굴을 가린 손가락 사이로 나와 눈이 마주쳤는지, 화들짝 놀란 세이룬이 황급히 나와 거리를 벌리며 외쳤다.
“아, 아닙니다. 못 들은 것으로 해 주십시오!”
“네? 세이룬, 잠깐……”
“먼저 가 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세이룬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쌩하니 집무실을 나섰다.
나는 닭 쫓던 개처럼 세이룬이 사라진 자리를 멍하니 바라봤다.
“……뭐야.”
진짜로 어디서 협박받고 있는 거 아니야? 나 사랑하는 척하라고 협박받아서 사랑한다는 말 하려고 찾아왔다가 오글거리고 토 쏠려서 도망간 거 아니냐고.
‘진짜 그러면 좀 상천데.’
턱을 만지작거리면서 심각하게 고민을 하는 사이, 근처에 시립해 있던 포카와 레비나가 머뭇거리면서 내 쪽으로 다가왔다.
“저어, 비전하…… 차를 다시 내올까요?”
“응? 아니, 아직 김도 나고 있는……”
“어머, 이런 더운 날씨에 김이 나는 차라니!”
“별로 덥지 않……”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비전하! 제가 레비나와 함께 시원한 냉차를 내오겠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다과상을 치운 포카 옆에서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인 레비나가 포카를 따라 쪼르르 밖으로 나갔다.
나는 다시 어벙한 얼굴로 텅 빈 집무실을 바라봤다.
“쟤네는 또 왜 저래……?”
* * *
작전에 실패한 세이룬은 우울한 얼굴로 집무실 안에 틀어박혔다.
“분명 실망하셨을 거야…….”
세이룬은 우울하게 중얼거리며 레비나가 빌려준 책을 펼쳤다. 여심을 훔치는 1단계, 반말을 한다.
“1단계조차 제대로 못 하는 남자라니, 질리시지 않을까…….”
솔직히 말하면 0단계인 ‘차갑고 도도한 표정을 짓는다’부터 말아먹었지만, 지금 그는 ‘반말’에 꽂혀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알아차리지 못했다.
전음을 사용할 때는 소모되는 기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썼던 반말이 입으로는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세이룬이 시무룩해 있는 사이, 포카와 레비나가 집무실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전하.”
대답하지 않은 세이룬은 방금 실패한 1단계만 미련 가득한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냉차를 내온다는 명분으로 대공비의 집무실을 나온 포카와 레비나는 곧장 세이룬에게로 다가가 책의 다른 페이지를 펼쳤다.
“전하, 지난 단계는 잊으세요. 다음 단계를 잘하면 돼요.”
포카가 강경하게 말하며 2단계를 탁 짚었다.
풀 죽은 눈으로 책을 흘끗한 세이룬은 내용을 보고 더 풀이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