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나는 끙끙거리며 몸을 뒤집어서 천장을 바라봤다.
와, 천장 한번 화려하기도 하지…… 가 아니라.
나는 두 손으로 내 뺨을 짝 때린 뒤, 정신을 집중했다.
일단 내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빈센트를 이쪽으로 영입하는 것이었다.
‘내 은인이 그딴 곳에서 죽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지.’
나는 은행장을 통해 빈센트에게 비밀리에 서신을 보낼 생각이었다.
내가 이곳에서도 잘 적응하지 못해서 그러니 빈센트의 도움이 많이 필요하다고 하소연하면, 착한 빈센트 성정에 와 주지 않을까.
‘와 주겠다고 하면, 대충 건강상의 문제로 사퇴한 후 은거하고 있을 때 이쪽으로 불러들이면 좋을 것 같은데.’
물론 그게 좋은 생각인 이유는, 내가 뒤에서 돈으로 빈센트의 이동을 지원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용병을 고용해서 비밀리에 그의 신변을 보호하고, 적당한 상인 무리에 숨겨서 이곳으로 데려오고, 이동 흔적이 남지 않게끔 목격자들을 입막음하면 충분하니까.
셀루리아에서 보좌관 한 명이 왜 사퇴하는지, 그 뒤 행방은 어떻게 되는지 집요하게 추적하면서 집착할 것 같지는 않고.
고용주가 고용인에게 집착하다니, 그 무슨 7월에 심장 서늘해질 소리야.
‘부디 빈센트가 셀루리아 가문에 미련이 없어야 할 텐데.’
아무래도 빈센트는 셀루리아의 가신 가문인 하르센 남작 가문의 가주이니, 그 점이 가장 걱정이었다.
‘흠. 나중에 내가 에이리트에 갈 때까지 거절하면, 그땐 그냥 납치해 와야겠다.’
내가 수도 에이리트에 도착하면 그때부터 정말로 피의 복수가 시작될 텐데, 빈센트가 그 복수에 휘말려서 한 줌의 재가 되는 것을 나는 결코 두 눈 뜨고 지켜볼 수 없었다.
‘그리고, ‘신.로.줄’의 남주와 여주에게도 슬슬 접근해야 하는데.’
내가 말 했던가?
‘신.로.줄’은 ‘종교 갈등으로 인한 난관을 헤쳐 나가서 결국 사랑의 결실을 맺는 남주와 여주’라는 큰 틀을 가지고 있다고 말이다.
‘신.로.줄’의 여주는 ‘세인트 바네사’로, 신교의 교황이었다.
그렇다면 남주의 가문인 세네카 공작 가문은 어디 소속이겠는가?
‘바로 구교파 소속이지.’
당연히 세네카 공작 가문은 남주인 킬리언과 여주인 바네사의 연애를 결사반대했고, 그래서 킬리언과 바네사는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몰래 만나며 사랑을 키워 나가고 있었다.
‘저번에 내가 샤샤와 함께 외출했을 때도 밀회할 예정이었잖아.’
그리고 내 적인 셀루리아 가문은 구교파였다.
자고로, 적의 적은 나의 아군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게다가 남주는 나한테 빚도 졌고 말이지.’
역시, 기회가 있으면 일단 악착같이 잡고 보는 게 답이다.
‘그럼, 일단 여주와 친해져 볼까.’
나는 옆으로 돌아누운 뒤, 근처에 있던 베개를 꼭 껴안았다.
그저 신만을 섬기는 구교의 신전과는 달리, 신교의 신전에서는 평민과 천민을 대상으로 다양한 구호 활동을 펼쳐 왔는데, 그중 하나가 고아 아이들이나 어른에게 학대를 당하는 아이들을 돌봐주는 것이었다.
‘시대 배경으로만 보면 아동 인권은 바닥을 길 것 같은데 말이지.’
왜 그런 설정이 있는지 어쩐지 알 것 같기도 해서, 나는 피식 웃었다.
아무튼, 나는 구호 활동 중 고아와 학대 피해 아이들을 위한 구호 활동을 정기적으로 후원할 생각이었다.
특히 대공가에 대한 평민들의 인식이 ‘괴물’인 지금, ‘대공비’의 이름으로 진행하는 내 후원은 대공가의 괴물 이미지를 지우고 그 위로 천사 이미지를 덧씌우기 충분했다.
‘선한 이미지도 쌓고, 여주와도 가까워지고, 내 사심도 채우고.’
일타삼피가 아닌가.
“으핫, 이제 진짜로 움직이자, 에리카!”
나는 기합을 넣으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은행장을 통해서 빈센트에게 전달할 서신을 하나 적어서 켈타카 은행에 보내고, 다음으로는 ‘드레인 대공비’의 이름으로 신교의 아동 구호 활동을 후원하겠다는 서신을 하나 적어서 신교의 신전에 보내면 된다.
‘해야 하는 일은 흐린 눈 뜨고 재빨리 해치워 버리는 게 정신 건강에 이롭다고 했어.’
그 말에 따라, 나는 눈을 흐리게 뜨며 편지지에 글을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 * *
드레인 대공의 집무실 안.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는 평소와는 달리, 오늘의 공기는 유독 몽글몽글한 분위기를 머금고 있었다.
대공령 행정에 관한 총괄 보고서를 세이룬에게 제출하기 위해 집무실에 들렸던 타한은 얼떨떨한 눈으로 종이에 뭔가를 적고 있는 세이룬을 바라봤다.
평소 차가운 무표정이 어려 있는 그의 얼굴에는, 현재 왠지 모를 옅은 웃음이 피어나 있었다.
‘뭐지……?’
대체 뭐를 그토록 열심히 적고 계시기에, 무려 옅은 미소까지 짓고 계신 거지?
궁금해진 타한은 슬쩍 다가가 세이룬이 끄적이고 있는 종이를 내려다봤다.
그러고는 살며시 눈을 감으며 이마를 짚었다.
‘아아, 전하…….’
지금 세이룬은 ‘이혼’이라고 적힌 글자 위에 열심히 가위표를 치고 있는 중이었다.
“타한.”
무념무상의 늪을 헤엄치고 있던 타한은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흠칫 정신을 차렸다.
“예, 전하.”
“뭘 그리 멍하니 보고 있지?”
아까 그 웃음은 신기루였던 것처럼, 어느샌가 세이룬은 무심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야 제가 기억하는 대공 전하의 모습이 망막에 비치자, 타한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보고서를 가져왔다 하지 않았나?”
“예, 전하. 여기 있습니다.”
타한은 정갈한 동작으로 세이룬에게 보고서를 넘겼다.
보고서를 받아든 세이룬은 빠른 속도로 훑은 뒤, 검토했다는 뜻으로 인장을 찍었다.
“아, 그리고 타한.”
“예, 전하.”
“부인님 모르게 포카와 레비나를 불러오도록 해.”
“……비전하의 직속 하인들을 말입니까?”
타한이 얼떨떨한 목소리로 물었다. 세이룬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상담할 것이 있다.”
‘상담……?’
대체 가문의 주인인 대공께서 하인과 나눌 상담이 뭐가 있단 말인가. 타한은 반신반의하면서도 명에 따라 포카와 레비나를 불러왔다.
갑자기 불려온 포카와 레비나도 영문을 모르는 듯 잔뜩 굳어서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포, 포카와 레비나가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간단히 인사를 받아 준 세이룬은 이어 다른 이들을 모두 내보낸 뒤, 본론을 꺼냈다.
“너희와 상담하고 싶은 것이 있다.”
“네…… 네?”
긴장으로 가득했던 두 얼굴이 일시에 어벙해졌다.
세이룬은 한없이 진중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부인님을 유혹하려면 어찌해야 하지?”
* * *
“바네사 언니!”
모래밭에서 모래성을 쌓고 있던 어린 에이미가 발딱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도도 뛰어서 자신의 품으로 쏙 안기는 에이미를 껴안은 바네사가 은빛 눈동자를 부드럽게 휘었다.
“우리 에이미, 오늘 잘 놀고 있었어?”
“응응! 오늘은 요한 선생님이랑 모래성 쌓았어!”
“앗, 바네사 언니다! 언니!”
“바네사 누나아!”
바네사가 온 것을 알아차린 아이들이 활짝 웃으며 발딱 일어나 오도도도 뛰어왔다.
바네사는 어느새 제게로 달려오는 아이들에게 한가득 둘러싸였다.
“다들 재밌게 잘 놀고 있었어?”
“응―!”
아이들이 아기 새처럼 삐약거리듯 대답했다.
아이들을 지도해 주고 있던 상급 사제 요한이 난감하게 웃으며 바네사에게로 다가왔다.
“매달리는 건 안 된다고 단단히 일렀는데도 매번 그러네요.”
“아이들이잖아요.”
바네사는 부드럽게 답하며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더 쓰다듬을 받으려는 듯 제 머리를 더 바짝바짝 들이밀던 아이들 중, 세라가 돌연 얼굴을 반짝 치켜들었다.
“언니, 언니― 나 그 말 해 줘.”
세라의 말에, 그 옆에 있던 요한도 반짝 얼굴을 치켜들었다.
“나도, 나도! 그 말 해 줘, 누나.”
“앗, 나도!”
“나한테도 해 줘, 언니!”
아이들이 저마다 신난 얼굴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큼지막한 아이들의 눈망울이 기대로 반짝거렸다.
“그럴까?”
“응응!”
바네사는 풋 웃으며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거뒀다. 그러고는 몸을 숙여서 아이들과 눈을 맞췄다.
그녀의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아이들을 부드럽게 감쌌다.
“모르면 물어보면 되는 거고, 서툴면 연습하면 되는 거야.”
“물어보면 되는 거고, 연습하면 되는 거야!”
“너희는 잘못되지 않았어.”
“우리는 잘못되지 않았어!”
아이들이 까르르 웃으며 바네사의 말을 따라 했다. ‘정말?’하고 물어보듯 눈을 빛내 오는 아이들에게 바네사가 고개를 한 번 끄덕여 주자, 아이들은 와아아 하면서 모래밭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바네사는 아이들이 활기차게 노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요한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동안 별다른 이상은 없었나요?”
“네, 성하.”
“다행이에요.”
한결 편안하게 웃은 바네사의 시선이 다시 아이들에게로 향할 때였다.
“교황 성하.”
평사제 한 명이 바네사의 곁에 다가와 몸을 숙였다. 바네사는 몸을 돌려 사제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자매님. 무슨 일이신가요?”
“저…… 신교의 구호 활동에 후원하고 싶다는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후원 서신이요?”
바네사는 반가운 얼굴로 사제가 내민 서신을 받아 들었다.
수신인을 확인하는 바네사의 귓가로 사제의 목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드레인 대공비께서 보내신 서신입니다.”
“……대공비께서?”
바네사가 멈칫했다.
마침 표지에 적힌 ‘대공비, 에리카 르 드레인’이란 수신인이 눈에 들어왔다.
바네사는 눈가를 가늘게 좁혔다.
‘대공비는 셀루리아 후작가의 영애라 알고 있는데, 어째서 신교를 후원하겠다고 한 거지?’
혹여,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은 아닐까.
“어찌할까요?”
사제가 물어왔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바네사는 얼른 다시 웃으며 서신을 열었다.
“아이들에게 후원하고 싶다는 내용이네요. 후원은 감사히 받겠다고 답장 보내 주세요.”
“알겠습니다, 성하.”
평사제는 바네사와 요한에게 인사를 한 뒤 몸을 돌려 멀어져 갔다.
요한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네사에게 물었다.
“정말 후원을 받아도 괜찮을까요?”
“과거에는 셀루리아 후작 영애였다고 할지라도, 지금은 드레인 대공비이시잖아요. 드레인 대공가는 구교파가 아니니 괜찮을 거예요.”
바네사는 요한을 달래듯 대답했지만, 의아한 기분을 지울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지금껏 정계나 종교계에 전혀 관여한 바 없던 드레인 대공가의 후원이라니.
미심쩍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어쩌면, 이건 기회가 될지도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