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그 뒤로 나는 알바를 뛰면서 생활비를 벌고 장학금으로 학비를 내며 신아에게 진 빚을 갚아 갔다. 국가장학금이나 학자금 대출? 그 악마 새끼가 동의해 줄 리 없으니 그런 건 내겐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생활에서 값비싼 디저트나 문화생활을 즐길 여유 같은 게 있을 리가.
‘에리카에 빙의한 뒤로는 골방에 짱박혀 있느라 아주 중요한 티파티가 아니고서야 보지도 못했지.’
이래 봬도 수도 사교계를 주름잡는 디저트 가게 ‘세사르’의 주인인데 말이다.
생각해 보니 너무 억울하다. 나는 꿈틀거리려는 미간을 급히 다잡으며 애써 태연한 얼굴을 했다.
세뤼아는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옆에 시립하고 있는 하인에게 명령했다.
“세작에 재스민을 섞은 화차를 가져오너라. 다과는 매작과와 빙사과가 좋겠어. 아, 딸기 과편도 가져오고.”
“예, 선대공 전하.”
하인이 예의 바르게 인사한 후 물러갔다. 떠나는 하인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나는 시선을 돌려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까 세이룬과 함께 갔던 정자와는 다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 이곳은 한가득 쏟아져 내리는 햇살 덕에 무척이나 포근한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주변을 가득 채운 각양각색의 꽃들은 화사한 빛을 머금은 채 한들거렸고, 가끔 산들바람이 불어올 때면 달콤한 꽃 내음이 폐부를 가득 채웠다.
얼굴에 저절로 옅은 미소가 피어났다.
문득, 이 따사로움과 포근함을 음으로 표현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였다.
“흠흠흠…….”
귓가를 간지럽히는 노랫가락에, 나는 시선을 돌려 세뤼아를 바라보았다.
한 손으로 턱을 괸 세뤼아는 나른히 눈을 내리감은 채 처음 듣는 음을 흥얼거리고 있었다.
“…….”
나는 나도 모르게 그녀의 가락에 맞춰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8분의 6박…… 아니, 8분의 12박인가?
“……그것보다는 왠지, 3소박 4박자가 더 어울리는 것 같은데.”
“그 박자를 아니?”
어느새 눈을 뜬 세뤼아가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아요. 조금…….”
대학에서 작곡 수업을 들을 때, 1학년 전공 필수 과목으로 배웠던 수업 중 국악과 관련된 내용도 있었다. 그때 배운 박자였다.
세뤼아가 재밌다는 듯 눈을 접어 웃었다.
“그래? 네가 그 박자를 알고 있다니 기분이 좋네. 그건 려 제국의 전통 민요에 사용되는 대표적인 박자거든.”
려 제국의 민요와 우리나라 민요 사이에 공통점이 있을 줄이야. 나는 신기한 마음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혹시, 장단도 존재하나요?”
“장단? 아니, 그런 건 없어.”
“아…….”
“그런데 네가 말하니까 왠지 궁금해지네. 아가, 장단이 뭔지 알려 줄래?”
세뤼아가 다정하게 나와 눈을 맞췄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많은 걸 배운 게 아니라서 잘 아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제가 아는 데까지 설명해 드릴게요. 장단은…….”
나는 하인들이 차를 내온 것도 모른 채 종알종알 떠들어댔다. 이야기의 주제가 좋아하는 전공일 뿐 아니라 어머님도 저렇게 관심 있게 내 얘기를 들어 주니까 신이 나서 주체를 못 해 버렸다.
그렇게 이야기는 삼천포로 빠져서 내가 다이어토닉 코드에 대해 열렬히 설명하고 있을 때였다.
“너는 음악을 진심으로 좋아하는구나.”
세뤼아가 신기하다는 듯이 툭 말을 던졌다. 나는 즉시 입을 다물었다.
“음악은 무슨 놈의 음악! 네까짓 게 가당키나 할 것 같아?!”
세뤼아는 그 새끼가 아닌데도, 나도 모르게 움찔해 버렸다.
내 기색을 눈치챘는지, 그녀가 다시금 녹아들 듯 웃으며 손등으로 내 볼을 스치듯 쓰다듬었다.
“보기 좋다는 뜻이었어.”
“아…….”
멍하니 눈을 끔벅이던 나는 쑥스러운 마음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내 보호자 되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해 주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어머님한테 계속 아가 소리 들었더니, 정말로 애가 된 기분이야…….’
부끄럽고 쑥스러우면서도, 가슴은 뿌듯한 충만감으로 가득 차올랐다. 든든한 지지대가 뒤에서 나를 받치고 있는 기분이었다.
나는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문득 내 앞에 놓여 있는 찻잔을 쳐다봤다.
새하얀 꽃송이가 서너 개 떠 있는 유리 찻잔은 안이 그대로 투명하게 비쳐 보였다.
꽃잎과 함께 찻물 위로 둥둥 떠 있던 작고 가는 찻잎이 낙엽처럼 하나둘씩 잔 밑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와, 예쁘다…….”
순백색의 예쁜 꽃 아래로 점점이 떨어져 내리는 자그마한 푸른 낙엽.
마치 동화 속에 등장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재스민과 초봄에 난 찻잎을 섞어 만든 화차란다.”
세뤼아의 말에, 나는 조심스럽게 잔을 들고 한 모금 마셔 보았다.
꽃의 향긋함, 언뜻 느껴지는 달콤함, 그리고 혀를 휘감는 고소한 씁쓸함.
차를 모르는 나조차도 눈을 휘둥그레 뜰 법한 맛이었다.
“에리카, 이곳에서 네가 못 할 것은 아무것도 없어.”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세뤼아가 부드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급 차가 마시고 싶다면 마시면 된단다. 음악을 하고 싶다면 계속하면 돼.”
“…….”
“혹시라도 감히 네 앞길을 방해하는 것이 있다면, 내가 나서서 쳐부숴 주고 싶은데―….”
“…….”
“그럴 필요 없이, 이미 너는 무척이나 강인한 사람이로구나.”
문득, 속 안에서 공연히 울컥하는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그래도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의지하렴. 버거운 문제가 생긴다면 내가 해결해 줄 테니, 너는 지금처럼 하고픈 것 맘껏 하도록 해.”
“……어머님.”
“나는 언제나 너의 뒤에 있을 거란다, 아가.”
나는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삼키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찻잔을 쥔 손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엄마가 힘이 없어서……, 우리 해수 하고 싶은 것 마음껏 하게 해 주지 못해서…… 그래서 정말 미안해.”
엄마, 있잖아요.
나 하고 싶은 것 마음껏 해도 된다는 말 들었어요.
지금만큼은, 어리광 한 번 제대로 부리지 못했던 과거로 돌아가서 감히 부리지 못했던 어리광을 마음껏 부리는 기분이었다.
“……네.”
배시시, 입가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기분이 몽실몽실한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간질간질했다.
등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여기 있었군요.”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흠칫 놀란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리자마자 자네한의 연둣빛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자네한이 내게 부드럽게 웃어 주는 동안, 세뤼아가 창백한 얼굴로 다급히 입을 열었다.
“나, 나 우리 아가 안 괴롭혔어! 진짜야!”
그녀는 필사적으로 양손과 고개를 마구 저었다. 차분히 걸어서 내 옆에 선 자네한은 나직이 한숨을 내쉰 뒤, 딸기 과편을 집어 내 입에 넣어 주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입 안에 든 과편을 오물거렸다.
“그렇다고 이리 일언반구도 없이 제 역할을 빼앗아 가십니까.”
“……우리 아가랑 데이트하다 보니 그렇게 됐지, 뭐.”
세뤼아는 뜨끔한 표정으로 슬쩍 시선을 피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은 자네한이 이번엔 매작과를 내 입에 넣어 주며 말했다.
“그렇다면 전 지금이라도 우리 아가에게 제 본분을 다해야겠습니다.”
“뭐?”
“성을 모두 소개해 주었으니 이제 세뤼아는 아가에게 더 이상 볼 일이 없지 않습니까. 저는 이제 아가를 데려가 내정에 관한 업무 인계를 마치려 합니다.”
“자네한, 잠깐!”
세뤼아가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자네한은 물 흐르듯이 내게로 몸을 돌린 뒤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아가, 제가 안주인으로서의 업무를 인계해 드리겠습니다. 저와 함께 가시겠습니까?”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난감한 얼굴로 자네한과 세뤼아를 번갈아 보았다.
망설이는 내 기색을 읽은 자네한이 다시 입을 열었다.
“혹여 세뤼아를 걱정하는 거라면,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양심이 있다면 아가를 붙잡지 못할 테니까요.”
“윽…… 너무해.”
양심을 저격당한 세뤼아가 비틀거렸다.
이대로는 승산이 없겠다고 판단했는지, 그녀가 휙 고개를 돌려서 불쌍한 강아지 같은 울망울망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아, 심장이…….’
어머님께서 저렇게 함초롬하게 저를 쳐다보고 계시는데, 제가 어떻게 떠나요.
나는 울 것 같은 얼굴로 입을 틀어막았다. 내 상태를 보고 한숨을 내쉰 자네한이 다시 입을 열었다.
“세뤼아, 미인계로 아가 홀리지 마세요.”
“…….”
쳇 하고 혀를 찬 세뤼아는 볼을 불퉁하게 부풀리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자네한은 뭐라고 구시렁거리는 세뤼아를 뒤로한 채 내게로 내밀고 있던 손을 조금 더 높이 들어 올렸다.
“방해꾼도 더 이상 방해하지 않으니, 그럼 이제 저와 함께 가시겠습니까?”
자네한이 그렇게 말하며 살짝 웃었다. 그에 나는 홀린 듯이 손을 뻗어 내밀어진 손을 맞잡았다.
아니, 어머님더러 저에게 미인계 쓰지 말라고 하셨으면서 아버님도 저한테 미인계 쓰시면 어떡해요…….
* * *
인수인계를 받기 전, 자네한에게서 안주인의 업무인 내정에 대해 배운 나는 한껏 기가 빨린 채로 처소에 돌아왔다.
나는 좀비처럼 비틀거리며 침대로 다가간 뒤, 곧장 이불 위로 다이빙했다.
“흐아아아…….”
자네한은 무척 친절하고 상냥했지만, 그가 가르치는 내정 업무는 그딴 거 없었다.
다행히 에리카의 두뇌가 무척 똑똑하고 저장 공간도 넓어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그냥 그대로 대공성에서 강퇴당할 뻔했다.
역시, 뭐든 만만한 일은 없어.
“일어나 에리카…… 너 지금 해야 할 일 산더미야…….”
나는 침대 위를 마구 흐느적거리며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다.
열심히 침대를 벗어나기 위해 꿈틀거렸지만, 어림도 없지.
나는 그냥 얌전히 침대 위에 몸을 맡겼다.
“역시 침대가 최고야.”
나는 침대 이불에 뺨을 비비며 배부른 고양이 같은 표정을 지었다.
슈미즈만 입고 있는 게 아니라서 상당히 불편할 법했지만, 이미 모든 기가 빨려 나간 상태에서는 불편함이고 뭐고 느껴지지 않았다.
‘침대 밖으로 벗어나기는 틀렸으니까…… 그냥 이대로 계획이나 짜 놔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