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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박데기 영애의 반격을 조심하세요 (28)화 (28/139)

28화

“……그 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요?”

나는 한숨처럼 물었다.

그는 제 진심을 내게 새겨 넣고 싶은 것처럼, 한 자씩 꾹꾹 눌러 말했다.

“제가, 그대 곁에 있을 수 있는데, 후회할 리가 없습니다.”

“좋아요. 이혼 얘기는 철회할게요.”

“아…….”

“그러니 이제 정말로 뚝 해요. 알았죠?”

나는 다시금 손을 뻗어 세이룬의 뺨을 적신 눈물을 닦아 냈다.

그는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삼키듯 입술을 파르르 떨다가, 이내 나직이 답했다.

“……네.”

그러고는 떨리는 숨을 뱉으며 배시시 웃음 지었다.

정말이지, 뭐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에도 없는 연기 하려고 애쓰는 거 보니까 뭔가 마음이 짠해진다.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뿔 난댔는데.’

뭐, 세이룬은 예쁘니까 뿔이 나든 말든 아무 상관 없지.

나는 흐뭇한 얼굴로 세이룬의 화사한 웃음을 감상했다.

충분한 위자료도 주겠다고 했는데 대체 왜 나와 이혼하지 않겠다고 고집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런 귀여운 남편이 꽁으로 생긴다는데 나야 당근 오예지.

의도치 않았던 든든한 아군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 * *

에리카를 대공비로 만들어 드레인 대공가와 연을 맺은 이후로, 셀루리아 후작 가문은 어느 정도 회복세를 달리고 있었다.

더 이상 의상실 에인시아나 디저트 가게 세사르를 이용하지 않게 되면서 사교계에서의 입지는 다소 줄어들었지만, 구교파 내에서의 입지는 오히려 이전보다 더 탄탄해졌다.

게다가, 완전히 죽은 것이라 생각했던 흑차 사업 또한 다시 살아났다.

드레인 대공가와 연을 맺은 셀루리아 후작가를 살리기 위해, 황가가 다시 흑차를 구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황가가 먼저 흑차를 구입하자, 미적지근하던 다른 구교파 귀족들도 하나둘씩 셀루리아의 흑차를 구입하기 시작하면서 셀루리아는 재정난을 면하게 되었다.

아니. 드레인 대공가와 연을 맺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더 몰리면서, 이 성황만 지속된다면 내년에는 오히려 이전보다 더 풍족해질지도 몰랐다.

“축하드려요, 셀루리아 후작 부인. 질녀이신 에리카 영애께서 대공비가 되셨다니! 드레인 대공가가 저희 귀족가와 맺어진 것은 거의 몇백 년 만이지 않나요?”

구교파 중심 세력이 모인 티파티에서, 휴블린 공작 부인이 감탄을 터뜨렸다.

“어쩐지. 저번 무도회에 선대공 부부께서 오셨을 때, 에리카 영애, 아니, 대공비 전하께만 말을 거셨지 않습니까. 황태자 전하의 첫 춤 신청을 받은 카리에 영애부터 대공비 전하까지, 후작 부인께서는 다 계획이 있으셨던 거군요?”

그 옆에 있던 베네로사 후작 부군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장난스레 물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카스텔 후작 부군도 작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드레인 대공 가문이라면 군력으로 제일가는 가문이죠. 사실 괴물 가문이라 불리던 것도 그 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부러 그렇게 불렀던 거지, 그게 악의적으로 변질된 소문이라는 것쯤은 다들 알고 있었지 않나요?”

“그런 가문이 셀루리아 후작 가문의 사돈이 되었다니, 정말 든든하시겠어요.”

계속되는 호언에, 생긋 미소 지은 델레미아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다들 말씀 감사합니다. 저도 드레인 대공가처럼 훌륭한 가문이 셀루리아의 사돈이 되어서 기쁘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실은 그녀는 드레인 대공가가 싫었다.

감히 자신을 에리카 그 애보다 하등 취급한 곳 따위!

그런 델레미아의 속마음을 모르는 휴블린 공작 부인이 넌지시 말문을 던졌다.

“결혼식 때 비전하의 보호자로 참석하기 위해 대공성에 방문하셨잖아요.”

“맞아요! 그 이야기 좀 해 주세요.”

그들이 눈을 빛내며 델레미아를 바라보았다.

자연스럽게 그곳에 머물렀던 기억이 떠오른 델레미아는 순간적으로 울컥 치밀어 오른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속으로는 당장이라도 화를 내며 자신이 그곳에서 어떤 취급을 당했는지 싹 말해 버리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면 웃음거리가 되는 것은 오히려 델레미아 자신이었다.

“대공성은 정말로 고풍스러우면서도 화려한 곳이었어요.”

그녀는 입술을 억지로 끌어올려 웃었다.

“사용인들도 어찌나 하나같이 교육이 잘 되어 있던지.”

어차피 대공가 사람들은 영지 밖으로 잘 나오지 않고, 에리카는 자신의 멍청한 마리오네트였다.

그 말인즉, 셀루리아가 드레인의 이름을 팔아 호가호위를 해도 하등 상관없다는 뜻이었다.

‘그러려면 대공가의 이미지를 나쁘게 만들어서는 안 돼.’

대공가의 이미지가 나빠질수록, 셀루리아가 할 호가호위의 효력도 약해질 테니까.

델레미아는 그들에게 드레인 대공 가문이 얼마나 훌륭한 가문인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들은 처음 듣는 드레인 가문에 대한 이야기에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델레미아의 말을 경청했다.

“그런 가문과 연을 맺었다니…… 너무 부럽네요, 셀루리아 후작 부인.”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카스텔 후작 부군이 말했다.

그 부러움에 가득 찬 눈빛을 보는 순간, 델레미아는 짜릿한 전율이 온몸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래, 그 수모는 얼마든지 묻고 넘어갈 수 있었다.

지금 자신과 가문의 가치가 올라갔는데, 그런 수모 따위 무엇이 중요할까.

* * *

“아가, 해사원 구경하고 있었구나?”

세이룬과 헤어지고 난 후 막 해사원을 나서려는데, 문득 위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흠칫해서 위를 올려다보자, 근처 커다란 나무 위에 앉아서 사과를 먹고 있던 세뤼아와 눈이 마주쳤다.

“……어머님?”

“어머, 아가. 안 그래도 조그맣고 귀여운데, 그렇게 눈을 동그랗게 뜨면 더 귀여워지잖니.”

이렇게 귀여워서 누가 홀랑 데려가 버리면 어떡한담. 세뤼아는 귀를 의심할 만한 말을 중얼거리면서 아래로 폴짝 뛰어내렸다.

엄청난 높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하게 착지한 세뤼아는 빙그레 웃으며 내게로 다가왔다.

“이제 성으로 들어가려는 거니?”

“네, 어머님.”

뭐, 우리 어머님은 멋지시니까 저런 높이에서 뛰어내리는 것 정도는 별거 아닐 수 있지.

나는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 먹은 사과 씨를 근처 수풀에 버린 세뤼아가 손을 탁탁 털며 물어왔다.

“우리 아가는 대공성 아직 안 둘러봤지?”

“네, 아직이요.”

“그럼 아가, 내가 대공성 안내해 줄까?”

세뤼아가 눈을 가늘게 접어 눈웃음치며 내게 한 손을 내밀었다.

나는 홀린 듯 멍하니 세뤼아를 바라보며 손을 뻗었다. 의지대로 한 행동이 아니었지만, 의지가 개입했어도 딱히 행동이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뤼아는 꼼꼼하지는 않더라도 친절한 가이드였다.

질문이 나올 새 없이 처음부터 완벽하게 설명해 준 것은 아니지만, 궁금한 점이 있어 질문을 하면 귀찮아하는 기색 없이 오히려 눈을 빛내며 설명해 줬다.

나는 옆에서 행복한 표정으로 내 질문에 대해 대답하고 있는 세뤼아의 설명을 들으며, 복도 곳곳에 달려 있는 유리등을 훑어봤다.

서양풍인 성체와 아무런 위화감 없이 어우러져 있는 저 장식은 분명 동양풍이었다.

‘동방의 려 제국이 고향이라고 했지.’

그 흔적이 이렇게 곳곳에서 묻어나는구나.

내 시선이 유리등을 향해 있는 걸 알아차렸는지, 설명을 마친 세뤼아가 부드럽게 물었다.

“드레인 가문이 동방의 려 제국 출신이라는 건 알고 있니?”

“네, 알고 있어요. 그래서 세이룬이 려 제국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눈을 가리고 있다는 것도요.”

“하하, 많은 걸 알고 있구나. 저 유리등은 그곳의 양식을 일부 섞어 만든 등이란다. 예쁘지?”

세뤼아가 그렇게 말하며 눈을 휘어 웃었다.

나는 나를 향해 달콤하게 휘는 보랏빛 눈동자를 멍하니 바라보며 홀린 듯이 대답했다.

“네, 예뻐요…….”

어머님이 너무 예쁘셔서 눈을 뗄 수가 없어요.

‘어머님 독사진을 천백 장 찍을 수 없는 게 유일한 한이구나.’

꿩 대신 닭이라고, 대신 어머님의 초상화를 천백 장 그려 볼까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아가, 사용인들은 소개 다 받았니?”

세뤼아의 물음에, 나는 흠칫 정신을 차리며 대답했다.

“네. 타한이 소개해 줬어요.”

세뤼아가 느른하게 눈동자를 휘며 내 눈가를 슥 쓰다듬었다.

“이렇게 빨리 소개받다니, 타한이 네가 마음에 들었나 보구나. 하긴,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운데 이곳의 그 누가 너를 좋아하지 않겠니.”

“…….”

나도 모르게 차게 식은 표정이 얼굴에 떠올랐다. 세뤼아는 큭큭 웃으며 “봐 봐, 귀엽잖아”하고 다시 중얼거렸다가, 고개를 돌려 창밖을 한 번 훑었다.

“사용인 소개도 다 받았다고 했으니…… 아가, 나와 차나 한잔 할까?”

세뤼아가 시선을 미끄러뜨리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해사원에 예쁜 공간이 있단다.”

“네, 좋아요.”

어머님과 티타임을 함께할 수 있는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야 없지.

나는 세뤼아의 말을 끝까지 듣기도 전에 냉큼 대답하며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세뤼아는 다시금 녹아들 듯 웃은 뒤,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

세뤼아가 안내한 곳은 정말로 티타임을 즐기기에 딱 알맞은 곳이었다.

성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는 새하얀 돔에는 때 이른 붉은색 장미가 우아하게 피어 있었고, 그 아래에는 하얀 대리석 바닥 위로 고풍스러운 테이블이 자리하고 있었다.

“무슨 차를 좋아하니?”

의자에 앉은 세뤼아가 나와 눈을 맞추며 물었다.

나는 별생각 없이 머릿속으로 곧장 떠오르는 차 이름을 입에 담았다.

“녹차요.”

지금껏 속 편하게 다른 차를 마셔 볼 기회가 거의 없던 내가 이름을 알고 먹어 본 차는 보리차와 녹차가 전부였다.

‘보리차는 물값 아낀다고 수돗물 끓여 먹느라 어쩔 수 없이 마셨고, 마셔 본 녹차라곤 티백밖에 없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에서 벗어나 신아와 함께 자취하기 시작한 나는 정말 말 그대로 ‘무일푼’이었다.

지체 장애인이 된 엄마는 그 새끼 몰래 나를 집 밖으로 내보내는 것 말고는 나를 도와줄 수 없었다. 집안 사정이 넉넉한 신아가 나를 경제적으로 지원해 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대학교도 가지 못한 채 계속 폭력과 학대에 시달려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신아에게 받기만 하겠어.’

신아는 갚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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