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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박데기 영애의 반격을 조심하세요 (27)화 (27/139)

27화

* * *

다음 날, 아침.

눈을 떠 보니 세이룬이 잠들었던 옆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내가 너무 늦게 일어났나…….”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옆에 있는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간밤에는 평안하셨나요, 비전하?”

포카와 레비나가 들어온 것은 내가 설렁줄을 잡아당긴 것과 거의 동시였다.

어영부영한 내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전문가적인 솜씨로 나를 사람 꼴로 만든 포카와 레비나는 이후 간단한 아침 식사를 가져왔다.

아침 식사를 모두 마친 후에는 타한이 찾아와 하인장을 비롯한 성 안의 사용인들을 모두 소개해 주었다.

‘대공가에 소속된 7개의 기사단 중 3개단은 지금 서쪽 변경으로 파견을 나간 상황이라 인사가 늦어진다고 했었지.’

그래서 가문의 기사들은 대략 한 달 후에 정식으로 인사할 예정이라고 했다.

성의 규모만큼 사용인들도 많았던 까닭에 나는 소개를 받는 데에만 오전 시간을 모두 할애할 수밖에 없었고, 자연히 오늘 오후에 떠날 예정인 후작 부인과 마주칠 시간은 없었다.

내가 후작 부인과 마주한 것은 신부의 보호자이자 하객으로 온 후작 부인이 수도 에이리트로 출발하기 직전이었다.

“절대로, 네 본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알겠느냐?”

대공성을 떠나기 전, 후작 부인이 이를 갈 듯 말했다.

아뇨, 몰랐는데요.

속으로 비죽 빈정거린 나는 사극 버전 발연기 모드로 과장되게 몸을 숙였다.

“알겠사옵니다, 마마…… 아니, 주인마님. 부디 살펴 가시옵소서.”

“그래.”

내 발연기에 심히 만족한 후작 부인은 고개를 끄덕인 뒤 마차에 올라탔다.

“이랴!”

마부의 우렁찬 외침과 함께 마차가 출발했다.

아련한 척 촉촉한 눈으로 떠나는 마차를 배웅하던 나는 마차가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표정을 싹 바꿨다.

“아싸.”

주먹을 짧고 굵게 휘두르면서 묵직한 된소리 환호를 내뱉는데, 문득 옆에 서 있던 세이룬과 시선이 마주쳤다.

진짜로 시선이 마주쳤다는 것은 아니고, 세이룬의 고개가 내게로 향해 있다는 걸 봤다는 뜻이다.

“…….”

순간, 뻘쭘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가늘게 떨리고 있는 그의 어깨와 굳게 깨문 그의 입술로 보건대, 지금 그는 웃음을 참느라 곤욕을 치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흠흠.”

나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태연한 얼굴로 목을 가다듬었다.

“오늘 날씨가 참 좋네요.”

“기분도……, 큼. 좋으신 것, 같습니다.”

세이룬이 웃음을 참으려 노력하며 대꾸했다.

나는 산뜻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어젯밤 삐졌던 세이룬이 다시 돌아와 줬잖아요?”

‘삐졌다’는 말에, 세이룬의 두 뺨이 순식간에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손등으로 입을 가린 채 고개를 숙인 그가 자그만 목소리로 항의했다.

“삐지지 않았습니다…….”

“삐진 거 아니에요? 음, 이상하다. 삐진 게 아니라면 뭐지~? 어제 자러 가는 세이룬의 뒷모습에서 찬바람이 쌩쌩 불었는데~?”

“그건―”

서둘러 변명하려던 세이룬은 한동안 입술을 뻐끔거리다가 결국 변명거리를 찾지 못하고 도로 입을 다물었다.

끙끙거리는 그를 보며 숨죽여 웃던 나는 이러다가 그가 다시 또 삐질라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참, 세이룬. 나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요. 둘이서만 얘기하고 싶은데.”

“둘이서만…… 말입니까?”

무슨 이유에서인지, 세이룬의 뺨에 다시금 홍조가 서렸다.

어쩐지 기대하는 것 같은 그를 보며, 나는 의아한 마음에 눈을 깜박거렸다.

뭔데. 뭘 기대하고 있는 건데.

“네, 그래서 말인데…… 음, 좀 조용한 곳 없을까요?”

“해사원에 풍경이 아름다운 정자가 있습니다.”

세이룬이 예쁘게 웃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맞잡으며 생각했다.

그 풍경도 당신보다는 덜 아름다울 것 같은데요.

* * *

세이룬이 데려간 곳은 대공성의 본 정원인 ‘해사원’의 한쪽에 자리 잡고 있는 커다란 연못이었다.

갖가지 아름다운 수초로 꾸며져 있는 연못은 가운데에 우아한 학 모양의 분수가 있었는데, 세이룬이 말한 정자는 바로 그 연못가에 세워져 있었다.

‘선대공랑께서 즐겨 착용하시는 비녀도 그렇고, 정자의 생김도 그렇고, 상당히 동양적인 느낌이 물씬 풍긴단 말이지.’

그러고 보니, 드레인 대공 가문의 고향이 동방의 려 제국이랬나?

‘서로판에 동로판 비스무리한 설정까지……. 신아가 설정 짜다가 나가떨어지지 않을 리가 없었구만.’

이래서 과유불급이라는 단어가 존재하는 것이다.

속으로 한숨을 폭 쉬고 있는데, 세이룬이 다소곳이 물어왔다.

“하실 말씀이 무엇입니까?”

“아까 셀루리아 후작 부인이 떠났을 때, 제가 무척 기뻐했던 거 보셨죠?”

태세 전환이 굉장히 엄청났다는 특이점은 사뿐히 무시하기로 했다.

내 질문에, 세이룬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보았습니다.”

“저는 지금껏 후작저에서 학대를 당하며 살아왔어요.”

그 말을 시작으로, 나는 세이룬에게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모두 말했다.

사교계에서는 철저히 숨겨졌던 에리카의 출생에 대한 비밀에서부터, 그 구박데기 에리카가 실은 베일에 가려진 억만장자 해수였다는 사실까지.

물론 샤샤의 이야기와 내가 빙의자라는 것만 제외하고 말이다.

고맙게도, 세이룬은 내 이야기를 잘 경청해 주었다.

내 말을 들으며 이를 지그시 사리물던 세이룬은, 말이 끝나자 나직이 물어왔다.

“……많이, 아프셨습니까?”

왠지 서글퍼하는 듯한 그 물음에, 당연히 아팠다고 대답하려던 나는 순간 멈칫했다.

눈앞의 이 사람은, 내가 그 억만장자 해수였다는 사실에조차 관심을 보이지 않고 진심으로 내 아픔에 공감하고 있었다.

과거 신아가 그래 주었던 것처럼.

공감은, 상당한 고통을 동반한다. 단순히 세이룬이 내 아픔을 이해해 주기를 바란 것뿐이었던 나는 계획했던 대답 대신 다른 대답을 꺼냈다.

“그렇게까지 아프지는 않았어요.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나는 이 사람이 나 때문에 아파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입술을 꾹 깨물고 있던 세이룬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거짓말.”

그 말에, 문득, 과거 샤샤와 나눴던 대화 하나가 떠올랐다.

밖에서 샤샤와 함께 살 집을 보고 돌아오는 도중, 셀루리아 후작 부인이 급하게 나를 찾는다는 소식을 전해 준 문지기가 나를 비하하는 말을 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샤샤는 나를 위로하듯이 제 뺨을 비벼 왔고, 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었지.

“난 괜찮아.”

- ……거짓말

“진짠데.”

그때 봤던 샤샤의 금빛 은빛 두 눈은 나에 대한 걱정으로 한없이 가득했었는데.

문득, 싸한 그리움이 가슴 속에서 엷게 번져 갔다.

그래서일지도 몰랐다.

지금 세이룬의 저 가리개를 풀면, 그때 샤샤의 눈동자와 꼭 같은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은.

‘핫. 정신 차려, 에리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샤샤의 눈이 왜 세이룬의 눈가리개 안에서 나와.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예요.”

나는 숨을 한 번 들이쉰 뒤, 담담히 말했다.

“저는 셀루리아 후작 가문에 복수할 생각이에요.”

“……복수, 말입니까.”

“네. 최종적으로는 가문을 완전히 짓밟아 버리는 것까지 생각하고 있어요.”

세이룬의 시선이 오롯이 느껴졌다.

보이지 않아서, 그 시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저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 복수를 절대로 그만둘 생각이 없어요. 하지만 이 복수가 드레인 대공가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도 분명히 인지하고 있고요.”

혹여라도 복수 과정에서 삐끗하면, 현재 내가 속해 있는 드레인 가문이 역으로 피해를 입을 수 있었다.

복수로 인해 피해를 입는 게 나 하나면 상관없지만, 강제로 이 일에 끌어들여진 대공가는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

“그래서 제안드려요. 제가 성인이 되는 날 이혼해 드리겠습니다. 물론 제 문제로 인한 이혼이니만큼, 위자료는 섭섭하지 않게 두둑이 넣어서……”

“싫습니다.”

내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단호한 거절이 돌아왔다.

“싫습니다…….”

어째서인지, 그리 말하는 세이룬은 굉장히 상처받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당황한 나는 얼른 입을 열었다.

“하, 하지만 세이룬. 이혼하지 않으면 드레인 대공가가 저 때문에 타격을 입을 수도……”

“제 청혼을 승낙하셨지 않습니까.”

내 말을 자르고 세이룬이 서럽게 말했다.

“저와 결혼해 주시겠다 약조하셨지 않습니까…….”

하얀 가리개 아래로, 맑은 눈물이 똑 떨어져 내렸다.

“이혼은 싫습니다…….”

세이룬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애원하듯 말했다.

설마 이런 일로 그가 울 거라고 상상조차 못 했던 나는, 갑작스러운 세이룬의 눈물에 그만 머릿속이 하얘져 버렸다.

뭐, 뭐야! 왜 갑자기 우는 건데!

“우, 울지 마세요. 자, 착하죠? 뚝!”

나는 허둥지둥 세이룬을 달랬다.

두 손을 뻗어서 창백한 뺨 위로 흘러내린 눈물을 닦아 주는데, 돌연 그가 손을 들어서 뺨에 닿은 내 손을 감싸 쥐었다.

“그럼…… 이혼하지 않겠다고 말씀해 주십시오.”

그가 물기 어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그에게 붙들린 손을 빼냈다.

“하지만 세이룬, 잘 생각해야 해요. 세이룬은 대공이잖아요. 제가 하려는 복수는 무려 한 가문을 무너뜨리는 일이에요.”

잠시 말을 멈춘 나는 조금 뜸을 들이다가, 나직이 덧붙였다.

“만약 조력자가 있다면, 그 조력자들까지 전부.”

셀루리아 후작 가문은 황가와 비공식적인 혼약을 맺은 가문이었다.

내가 셀루리아를 무너뜨리려 한다면, 황가는 내가 황실의 약혼 상대를 공격하려 한다는 명분으로 나를 제거하려 할 것이다.

“그런 일에 잘못 엮이면 정말 곤란해질지도 몰라요.”

그 명분의 이름은 ‘반역’이 되겠지.

물론 실패할 생각이 없으니 일을 시작한 것이지만, 그래도 한없이 위험할 수 있는 일에 관련 없는 목숨을 휘말리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제 가문이 부인님 때문에 곤란해질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여전히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그는 그렇게 말했다.

“설사, 곤란해진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

“제가, 이 가문이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평판이나 안위 따위가 아닌, 에리카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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