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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박데기 영애의 반격을 조심하세요 (26)화 (26/139)

26화

그가 나직하게 물어왔다.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순간 머뭇거리던 나는, 문득 아까 그가 이곳에 들어왔을 때 말을 잘못 듣고 서러워했던 걸 떠올렸다.

미인 남편을 또 울상 짓게 만들 수야 없지.

이건 세이룬을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내 정신 건강과 심장 건강을 위해서이기도 했다.

“네, 좋아해요.”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시선을 살짝 내리깔며 더없이 순수하게 웃음 지었다.

“부인님의 것입니다.”

“네?”

“좋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제 머리카락은 부인님의 것입니다.”

“아, 네…….”

그, 그래요.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한테 제 머리카락을 준 게 저렇게 기쁘다는데, 거기다 대고 인정머리 없이 거절할 수도 없고.

“아, 전하. 저 궁금한 게 있는데―”

“세이룬.”

“네?”

“제 이름, 세이룬입니다. 이름으로 불러 주세요.”

다시금 그리 부탁한 세이룬이 배시시 웃었다. 그 웃음을 보며 나는 슬며시 손을 가져가 심장을 쥐어짜듯이 가슴께를 움켜쥐었다.

아, 심장아. 나대지 말라고.

“네……, 세이룬. 그럼 저는 에리카라고 불러 주세요.”

“네.”

힘껏 고개를 끄덕인 그가 ‘에리카……’하고 내 이름을 입속에서 굴려 보았다.

그 목소리가 무척이나 달게 느껴져서, 나는 다시금 뜨거워지려는 낯을 자각하고 재빨리 화제를 원위치시켰다.

“그, 궁금한 거 있다고 제가 아까 그랬잖아요!”

당황한 감정이 필터를 거치지 않고 목소리에 그대로 묻어 나왔다.

지레 깜짝 놀란 나는 큼큼, 헛기침을 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왜 가리개를 쓰고 있는 거예요?”

아까 방에 들어섰을 때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던 점이나,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내 곁으로 걸어온 점 등으로 보아서는 시력에 문제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뭐, 천은 밖에선 안 보이지만 안에서는 잘 보이는 소재를 쓰고 있는 모양이고.

‘아니면 혹시 눈가에 커다란 흉터가 있다거나?’

이런저런 예측을 하고 있는데, 줄곧 나를 바라보고 있던 세이룬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 가문은 원래 동방의 려 제국 출신입니다.”

“려…… 제국이요?”

처음 듣는 나라 이름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드레인 대공 가문이 이렌텔 제국이 아닌 타국 출신이라니.

‘이신아 이 자식, 나한테 비밀로 하고 이런 설정을 짜고 있었냐!’

놀란 내 모습을 보고 살짝 웃음 지은 세이룬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어 말했다.

“네. 려에서는 칠 세 이상 남녀가 성인이 될 때까지 서로 맨 얼굴을 마주 보지 못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제 가문은 려를 떠났어도 그 전통을 지금까지 이어 왔고, 저 또한 그 전통을 지키기 위해 부득이하게 가리개를 착용하게 되었습니다.”

“아……. 혹시 저도 가려야 되는 건가요?”

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 얼굴을 매만졌다. 세이룬은 서둘러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부인님께서는 얼굴을 가리실 필요 없으십니다.”

“하지만, 저도 이제 드레인 가문의 일원이잖아요.”

나는 세이룬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 보며 말했다.

내 말에, 잠시 그대로 바짝 굳었던 세이룬은 이내 얼굴을 온통 분홍빛으로 물들이며 푹 고개를 숙였다.

“……이 공국에서 부인님 외의 미성년자는 저 하나입니다. 저만 얼굴을 가리면 충분하니, 부인님께서 구태여 귀찮은 일을 감내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 뒤로 잠깐 입을 다물었던 세이룬이 이어 조심스레 덧붙였다.

“얼굴…… 보게 해 주십시오.”

그러고는 손등으로 제 입을 가려 버린다.

자기가 낯부끄러운 말을 던져 놓고서 자기가 끙끙거리며 부끄러워하는 모습이라니.

그 모습이 문득 내 검은 뱀 샤샤와 겹쳐졌다.

‘우리 샤샤도 정말 부끄러움 많이 탔었는데.’

부끄러움을 탈 때마다 고개를 숙이는 점까지도 똑 닮았다.

알싸한 그리움이 물밀듯이 가슴을 적셔 와서, 푸스스, 입가에 옅은 웃음이 지어졌다.

신기하기도 하지.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이 샤샤와 비슷한 구석이 있을 줄은 누가 알았…….

‘……잠깐만.’

불현듯, 머릿속에 한 가지 의문점이 생겨났다.

세이룬이 스스럼없이 대해 와서 지금껏 잊고 있었는데, 분명 그와 나는 오늘 처음 만난 사이였다.

보통 처음 만난 사이에 이렇게까지 잘해 주는 일은 없지 않나?

그런데 왜 이렇게 잘해 주지?

“세이룬.”

“네, 부인님.”

내 부름에, 그때까지도 부끄러워서 끙끙거리고 있던 세이룬이 반짝 고개를 들었다.

나는 그런 그의 기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일부러 힘들게 마음에도 없는 말과 행동을 하시는 거면, 그러지 않아도 돼요.”

“네……?”

되묻는 세이룬의 목소리는 놀란 것처럼 자그맣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가 당황하지 않게, 조금 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조곤조곤 덧붙였다.

“우리 오늘 처음 만났잖아요. 괜찮아요. 괜히 저 위한답시고 그러시지 않아도 돼요.”

“…….”

세이룬은 입을 꾹 다물었다. 왠지 시무룩해진 듯도 했다.

그 모습이 왠지 비 맞은 강아지처럼 처량해 보여서, 그의 어깨를 도닥여 주기 위해 손을 들었을 때였다.

그가 자그맣게 속삭였다.

“……좋아합니다.”

속삭임은 작았지만, 그 목소리는 똑똑히 들렸다.

나는 짐짓 멍하게 세이룬을 바라봤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에 머리가 새하얗게 비어 버렸다.

그런 나를 보며, 세이룬은 간절한 얼굴로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담듯 다시 속삭였다.

마치, 내게 이 말을 새기고 싶어 하는 것처럼.

“어떻게 말해야 이 마음을 온전히 전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을 만큼…… 정말 많이 좋아합니다.”

그렇게 말한 그가 수줍게 볼을 붉히며 덧붙였다.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흠칫 정신을 차렸다.

‘정신 차려, 에리카. 이게 진심일 리가 없잖아.’

오늘 처음 본 사람한테 저렇게 절절한 고백이라니!

첫눈에 반한 사람도 이렇게까지 절절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였다.

지금, 세이룬은 나를 좋아하는 것처럼 연기하고 있다.

“세이룬. 솔직히 말해 봐요.”

나는 흡사 역모 회의라도 하듯, 진중한 얼굴로 나직하게 말했다.

“지금, 협박받고 있는 거죠?”

“……네?”

한껏 진지해진 분위기에 덩달아 심각하게 표정을 굳히고 있던 세이룬이 돌연 어벙하게 되물었다.

“혹시라도 이렇게 행동하도록 협박받고 있다면, 당근을 흔들…… 아니, 머리카락을 흔들도록 해요.”

“아닙니다. 저는 정말로……!”

세이룬이 억울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 해야 자신의 진심을 믿어 줄지 고심하는 눈치에, 나는 빤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흠, 그러면 한 가지 질문해도 될까요?”

“네, 무엇이든.”

“저, 언제부터 좋아하셨어요?”

“……!”

일순, 움찔 어깨를 떤 세이룬이 슬쩍 내 시선을 피했다.

어디로 보나 난감함이 역력한 기색이었다. 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거봐요. 세이룬, 괜히 저 위한답시고 마음에도 없는 말 하지 않아도 돼요.”

“……정말로, 정말로 진심인데…….”

한껏 시무룩해진 세이룬이 용기를 내서 다시 주장했다.

나는 다 안다는 듯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그렇게 생각해 드릴게요.”

“정말입니다…….”

“네, 그럼요. 세이룬은 진심이에요.”

“…….”

내 딴에는 그를 달랜답시고 한 말이었는데, 그에게는 전혀 위로가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입술을 꾹 깨물고 있던 그는 이내 팩 고개를 돌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 진심이라는 것은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평안한 밤 보내시길 바랍니다.”

왠지 퉁명스러운 듯한 목소리로 밤 인사를 툭 던진 세이룬은 가림막 건너편으로 쌩 가 버렸다.

흡사 ‘나 삐짐’하고 뒤통수에 붙여 놓은 것 같은 행동에, 나는 멀거니 눈을 깜박였다.

‘진짜로 삐진 거야……?’

어떻게 잘 삐지는 것까지 샤샤와 비슷할 수가 있을까.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가,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세이룬의 기분이 빨리 풀렸으면 좋겠어요.”

샤샤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서일까.

“당신이 날 피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지 않네요.”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샤샤의 기분을 풀어 줄 때 종종 하곤 했던 말이었다.

가림막 너머로 보이는 실루엣이 일순 움찔거렸다.

“잘 자요.”

나는 가벼운 밤 인사를 덧붙인 뒤, 자리에 누웠다.

눈을 완전히 감기 전, 가림막 옆에서 나지막한 대답이 들려왔다.

“……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 * *

보름달이 뜬 밤.

가림막 옆의 숨소리가 완전히 고르게 변했을 때, 세이룬은 감고 있던 눈을 스륵 떴다.

소리 없이 몸을 일으킨 그는 착용하고 있던 눈가리개를 풀었다. 어둠으로 가득한 허공에서 금빛 은빛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가리개를 손목에 가지런히 묶은 그는 침대에서 벗어나 에리카에게로 다가갔다.

결혼식이 상당히 피곤했던 모양인지, 에리카는 미동도 없이 곤히 잠들어 있었다. 세이룬은 침대 아래에 다소곳이 앉아서 달빛에 비치는 에리카를 하염없이 바라봤다.

‘오랜만에 보는…… 맨 얼굴.’

천천히 손을 뻗어 달빛이 덧그린 뺨을 가만히 쓸어 보았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온기가 사랑스러워서,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가 눈가리개를 착용하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려 제국의 전통을 따라야 했기 때문이고, 나머지 하나는 자신의 특이한 눈동자를 가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세이룬은 에리카에게 자신이 뱀 샤샤라는 것을 밝히고 싶지 않았다.

물론 에리카는 샤샤를 좋아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소중한 반려동물에게 향하는 애정이었다. 자신을 반려로서 받아들여 주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만약, 자신이 인간이 아님을 알게 된 그녀가 자신과의 결혼을 무르고 싶어 한다면?

‘……싫어.’

그렇게 된다면, 그는 정말로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완전히 둥글었던 달이 반쯤 구름에 잠겼다.

그때까지 에리카의 잠든 모습을 바라보던 세이룬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리는 까닭에, 도저히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곧장 성을 빠져나가 연무장으로 향한 그는 즉시 그 휘하의 중앙 기사단을 집합시켰다.

그렇게 드레인 대공가의 중앙 기사단은 그날 밤 주인을 잘못 만난 죄로 주인과 함께 훈련을 하며 밤을 지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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