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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박데기 영애의 반격을 조심하세요 (25)화 (25/139)

25화

“배려에 감사합…… 네?”

당연히 세뤼아가 자리를 비켜 줄 줄 알았던 후작 부인은 절로 찡그려지는 얼굴을 간신히 억누르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

세뤼아는 나를 대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오만한 표정으로 후작 부인을 내려다봤다.

“대공의 신부를 외부인과 둘만 둘 수는 없어서.”

포카와 레비나도 힘껏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보호하듯 내 양옆으로 딱 달라붙었다.

후작 부인은 화를 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했다.

“……전하. 저는 엄연히 에리카의 보호자입니다만.”

“셀루리아 후작 부인.”

세뤼아가 보라색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기울였다.

“에리카의 보호자는 이제 당신이 아니라 나야.”

세뤼아가 선언하듯 말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는지, 후작 부인은 왈칵 얼굴을 찡그리며 외쳤다.

“저는 에리카의 외숙모입니다! 당연히 보호자는 저이지요!”

“당신이 뭔가를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에리카의 ‘어머님’이야.”

“뭐……!”

후작 부인이 분한 듯 소리쳤지만, 결국 마땅한 반박을 찾아내지 못했다.

세뤼아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근처를 지키고 있던 기사에게 명령했다.

“레이븐.”

“예, 선대공 전하.”

“후작 부인을 자리로 모셔가.”

“명 받들겠습니다.”

레이븐이라 불린 기사가 후작 부인에게 “가시죠”하고 말했다. 하지만 후작 부인은 기어코 가지 않겠다고 버텼고, 결국 기사 둘이 더 붙어서 후작 부인을 데리고 객석으로 안내했다.

“에리카.”

후작 부인이 끌려가는 모습을 흥미진진하게 보고 있던 나는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네?”

“오늘 결혼, 진심으로 축하해. 네가 내 며느리가 되어서 정말 기쁘단다.”

세뤼아가 부드럽게 웃었다. 자수정 같은 아름다운 눈동자가 웃음을 담고 가늘게 휘었다.

순간, 가슴 속에서 놀라울 정도로 따스한 것이 일렁였다.

나는 이 따스함을 알고 있다.

“쫄지 마, 김해수. 네가 그 집에 갈 때마다 내가 항상 같이 가 줄 테니까.”

든든한 내 편이 있을 때 느끼는 감정이었다.

“……감사합니다.”

일부러 환하게 웃었는데, 목소리가 울음을 머금고 먹먹해져서 의미가 없어졌다.

다 알고 있다는 듯, 세뤼아는 부드럽게 웃어 주며 붉게 물든 내 눈가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직접 손을 뻗어 내 머리 뒤쪽으로 젖혀져 있던 베일을 앞으로 드리워 주었다.

“자, 아가. 이제 주인공이 입장할 시간이란다.”

세뤼아가 속삭였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홀 안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신부, 에리카 르 드레인 대공비 전하 입장하십니다!”

그와 동시에, 홀로 통하는 길에 드리워져 있던 커튼이 활짝 걷혔다.

나는 화사한 빛이 쏟아지는 곳으로 한 걸음 걸어갔다.

* * *

주례단 앞에 서 있던 나는 결국 충동을 참지 못하고 내 옆에 서 있는 드레인 대공을 흘끗 곁눈질했다.

고아한 연미복을 입은 대공은 나처럼 긴 흑색 베일을 앞으로 드리우고 있어서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반듯하게 서 있는 자세나 떡 벌어지는 대강의 골격을 봐서는 ‘나 완전 멋져요’ 하고 온몸으로 외치는 듯했다.

그렇게 주례사의 기나긴 말을 흘려들으며 대공을 염탐하고 있을 때였다.

“……!”

대공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진 것 같다고 느껴진 순간, 그가 홱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뭐지 싶어서 대공을 다시 흘끗거리는데, 문득 베일 옆으로 드러난 그의 귀가 발갛게 물들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지금 어깨가 좀 떨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꼭 누군가를 훔쳐보다가 들키기라도 한 사람처럼…… 잠깐.

그럼 설마, 그도 나처럼 나를 훔쳐보다가 눈이 마주쳐서 재빨리 안 본 척하고 있는 거야?

‘와. 드레인 대공가 완전 미인 맛집이네.’

아름다운 외모를 사용해서 사람을 효과적으로 홀리는 어머니와 고상하고 우아한 미인인 아버지, 그리고 저렇게 귀염미 뿜뿜하는 아들이라.

‘바람직한 집안이다.’

나는 티 나지 않도록 다시 시선을 주례자에게로 고정하며 입가에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마음이 참으로 평화롭구나.

* * *

긴 결혼식을 마치고, 나는 포카와 레비나의 안내를 받아 어느 방에 들어섰다.

듣기로는 대공 부부가 합방을 할 때 사용하는 방이라고 했다.

“근데, 미성년자는 첫날밤 안 보낸다고 하지 않았어?”

나는 수건을 든 레비나에게 젖은 머리카락을 맡긴 채 물었다.

고개를 끄덕인 포카가 한 손으로 침대 위를 가리키며 힘차게 대답했다.

“네, 비전하. 그래서 침대 가운데에 가림막을 세웠어요!”

“음…… 굳이?”

나는 진중한 표정으로 합리적인 의심을 했다. 그러자 포카가 울먹울먹한 얼굴로 내게 물어왔다.

“비전하께서는 대공 전하와 같이 주무시는 게 싫으세요?”

‘아니, 그렇게 물으면 내가 꼭 첫날밤에 남편을 소박맞힌 무정한 부인이 된 것 같잖아!’

한껏 당황한 내가 서둘러 손을 내저으며 아니라고 말하려 했을 때였다.

“제가…… 싫으십니까……?”

어느새 열려 있는 문으로 서러움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 대공 전하!”

내 시중을 들던 포카와 레비나가 서둘러 일어나 남자에게 예를 갖췄다.

나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대공을 마주 보았다.

씻자마자 서둘러 온 듯, 젖은 머리카락에 수건을 하나 덜렁 감은 채 문 앞에 서 있는 그는 눈을 가리는 얇은 가리개를 착용하고 있었다.

일어나자마자 당장 ‘그건 오해예요’라고 말하려 했던 나는 순간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백설 공주 뺨치는 희고 투명한 피부와 물기를 머금은 듯한 붉은빛 입술, 샤프한 턱선. 그리고 실크 잠옷 사이로 살짝 보이는 탄탄한 근육까지.

미쳤다.

천하절색의 미인이, 지금 눈을 가린 채 내 앞에 서 있었다.

심장아, 제발 나대지 마라. 지금 충분히 아프게 뛰고 있다.

‘아, 잠깐만. 혹시 나 침 흐른 거 아니겠지?’

나는 급히 소매로 입가를 닦았다. 다행히 묻어 나오는 것은 없었다.

“정말로…… 싫으십니까?”

다시금 들려온 대공의 목소리에, 멍하니 그의 미모를 감상하던 나는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싫냐니, 그게 무슨 소리……! 아, 맞다. 포카가 중얼거리는 거 내가 부정을 못 했지.’

아니, 당신은 또 왜 그런 터무니없는 오해를 하면서 땅을 파고 계십니까……?

“절대로 아니에요! 제가 왜 대공 전하를 싫어하겠어요?”

그것도 이렇게 예쁜 남자를 말이다!

내가 펄쩍 뛰며 부정하자, 서러운 듯 이를 사리물던 그가 조심스럽게 다시 물어왔다.

“정말이십니까……?”

“그럼요!”

대공님을 덕질해도 모자랄 판에 싫어하다니! 그 무슨 망발이란 말인가!

힘껏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안도한 듯 그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 완벽한 곡선을 그리는 입술에 멍하니 시선을 빼앗겼다.

무슨 남자 입술이 저렇게 예쁘지…….

“저, 저희는 그럼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그때까지 쭈뼛거리며 서 있던 포카와 레비나가 붉어진 얼굴로 총총 밖으로 나갔다.

“그, 그래…….”

서둘러 답해 봤지만, 이미 저만치 멀어진 이들에게서 돌아오는 건 공허한 침묵뿐.

나는 뻘쭘하게 뒤통수를 긁적이다가, 문득 그의 머리카락이 아직까지 젖어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저기, 머리카락 말려 줄까요?”

단순히 상대를 향한 선의에서 비롯된 호의였다.

대공에게 몸을 돌리며 묻자, 그가 멈칫하며 나를 보았다.

“……말려 주실 겁니까?”

어쩐지 기대하는 듯한 목소리가 머뭇머뭇 이어졌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럼요. 자, 이리 와요.”

두 뺨을 발갛게 물들인 그가 푹 고개를 숙이며 내 쪽을 향해 다가왔다.

침대 위로 올라앉은 나는 내 앞을 탁탁 두드렸다. 내 손짓을 본 그는 수줍은 듯 앞에 다소곳이 앉았다.

“전하, 고개는 조금 더 젖혀 주세요.”

그에게서 수건을 받아 들며 내가 말했다.

내 말대로 고개를 조금 더 젖힌 그가 잠깐의 침묵 뒤에 입을 열었다.

“세이룬입니다.”

“네?”

“세이룬입니다, 제 이름. 이름으로 불러 주세요.”

그가 소곤거리듯 말했다.

비밀스러운 무언가라도 알려 주는 듯한 목소리에, 왠지 얼굴이 달아올랐다.

‘뭐…… 뭐야 이거.’

한번 그가 의식되기 시작하자, 갑자기 수건 한 장 사이로 느껴지는 그의 머리카락 감촉마저 굉장히 신경 쓰였다.

‘나 남자 면역력 없지 않은데…….’

나름 남자 사람 친구도 여럿 있었는데, 왜 이렇게 의식되는 거냔 말이다.

물결처럼 길게 흘러내리는 세이룬의 검은빛 머리카락은 몹시 매끄럽고 부드러워서, 부드러운 비단실을 매만지는 것 같은 몽실몽실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게다가 물기를 닦기 위해 수건이 머리카락을 스칠 때마다 풍겨 오는 이 달콤한 향기는 정말이지……

‘저, 정신 차려, 에리카. 너 지금 미성년자야. 얘는 너랑 나이 똑같은 미성년자라며. 너 이러다가 정신줄 놓으면 그땐 정말 은팔찌 맞추는 거야.’

정신이 성인이라고 성인이었으면, 내가 왜 이때 동안 미성년자로서 온갖 서러움을 다 겪고 있었을까!

나는 경건한 마음으로 오늘까지 대공성에 남아 있을 후작 부인을 떠올렸다.

‘후…… 잠시 잊고 있던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한다.’

당황스러운 상황에서 한없이 흔들리던 마음은 점점 차분해져 가기 시작했다.

‘그래, 다시 생각해 보니 머리카락 감촉이니 향기니 별거 아니네.’

그냥 흔들리는 수건 속에서 세이룬의 샴푸 향이 느껴진 것뿐이다.

나는 그제야 편안히 웃으며 세이룬의 머리카락을 마저 말렸다.

“아, 다 됐다.”

적당히 마른 머리카락 사이에 손가락을 넣어 한 번 쓸어내려 보았다. 물기는 묻어 나오지 않았다.

만족한 나는 축축해진 수건을 던져서 베드스툴 위에 걸쳤다.

나이스, 한 번에 성공했다.

“감…… 사합니다.”

긴장이 풀린 것처럼, 세이룬이 떨리는 숨을 내쉬듯 속삭였다. 그는 내 손길이 닿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매만지고 있었다.

장발 미인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모습이라니. 너무 행복하다.

“예쁜 머리카락이네요.”

나는 습관처럼 베개를 끌어다가 그 위에 턱을 얹으며 흐뭇하게 말했다.

멈칫한 세이룬이 천천히 나를 돌아보았다.

“좋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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